김재희

김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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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취재하는 방송·영화 담당 기자입니다. 재미를 주는 콘텐츠를 더 재밌는 기사 안에 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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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4-03-26~2024-04-25
문화 일반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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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3%
검찰-법원판결3%
패션3%
음악3%
사회일반3%
인사일반3%
기타20%
  • 카이스트 출신 과학자가 도축장 돌며 짐승 피 받아온 이유 [BreakFirst]

    3초의 정적. 여성 헬스케어 기업 이너시아의 김효이 대표(26)가 창업하겠다고 주변에 말했을 때 마주한 반응입니다. 정적 뒤에는 “왜 굳이?”라는 질문도 따랐습니다. 우려는 당시 23살의 어린 대학원생이 창업을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창업 아이템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뛰어든 영역은 생리대 연구와 제조였습니다.‘한 번 쓰고 버리는 제품에 왜 혁신적 기술이 필요해?’라는 친구들의 의구심, ‘전공을 살려 인공지능(AI) 분야로 창업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교수님, 부모님의 우려까지…. 하지만 ‘내 불편함을 내 손으로 해결하겠다’는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습니다. 일회용 생리대에 들어 있는 휘발성유기화합물(VOCs)로 인해 생리통 등 여러 신체적 불편 증상이 생긴다는 의혹은 2017년 이후 계속됐습니다. 실제로 VOCs 추정치가 생리통이나 신체 증상과 관련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환경부 발표(2022년)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연구 속도가 느려도 너무 느렸습니다.‘친환경 물질을 쓰면서 흡수력은 더 좋게 만들 수 없을까?’ 관성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에 대해 ‘불편한’ 감각을 깨우는 것은 혁신의 시작이었습니다. 김 대표는 카이스트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세 명의 여학우와 함께 밤샘 연구를 시작했습니다.―과학고 조기졸업, 카이스트 학사, 석사, AI 박사과정과 ‘생리대 개발’이 쉽게 연결되지는 않는데요.카이스트에서는 지금도 굉장히 좋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그 결과가 실제 우리 삶으로 다가오는 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생각에 공감하는 친구들 네 명이 모여서 ‘우리가 연구해서 우리 삶을 직접 바꿔보자’는 결심을 했죠. 그중 하나가 생리라는 문제였고요. ‘생리 너무 고통스럽다. 이 문제 해결하면 노벨상 수상감이다’라는 말을 저희끼리는 매일 하거든요. 저도 고등학교 시절 제 생리 기간을 전교생이 알았다고 할 정도로 생리통이 심했어요. ‘생리통을 해결할 방법은 뭘까?’가 삶의 큰 과제였거든요. 그런데 다들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이 문제를 누군가 해결해 주기만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우리의 불편함을 직접 타파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이너시아를 설립하게 됐죠.―2017년부터 이어진 일회용 생리대 유해 물질 논란으로 요즘엔 친환경, 유기농을 내세운 생리대들이 많이 나왔던데요. 생리대를 감싸는 커버에는 유기농 순면을 사용했지만, 그 속에 들어간 흡수체에 미세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제품도 있었습니다. 미세 플라스틱을 뺀 제품의 경우 흡수력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고요. 저희는 수술용 지혈제 성분인 셀룰로스에 주목했습니다. 친환경 물질인 셀룰로스를 써서 논란에서 자유롭고, 흡수력도 만족스러운 제품을 개발하기로 했습니다. ―의료 AI 박사과정을 밟다가 생리대를 개발하겠다고 하니 주변 반대도 컸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 동료들에게 창업하기로 했다고 하면 “축하한다” “응원한다”고 해요. 그다음 “무슨 창업을 하는데?”라는 질문에 “생리대요”라고 하면 3초간 정적이 흐르더라고요. 당시 AI를 접목한 소프트웨어 창업이 유행하는 시기였거든요. 저희만 하드웨어, 그것도 생리대를 개발하겠다고 하니 당황할 만도 했죠. 시장조사를 위해 전국을 다니며 생리대 개발자, 생산자, 마케터들을 만났는데 악담도 많이 들었습니다. ‘생리대는 싸게 많이 만들수록 좋다’, ‘생리대 만들겠다고 한 친구들의 끝이 좋지 않았다’ 같은 말을 하더라고요.도축장에 가 피를 구하니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냐’ 의심도 받았죠.물리학 제1 법칙, 관성의 법칙입니다. 정지해 있는 물체는 항상 정지하려고 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운동하려는 성질을 말합니다. 교수님, 부모님, 친구들의 우려는 관성의 또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관성을 깨겠다는 야심과 패기가 컸습니다. 김 대표가 만든 ‘이너시아’(inertia)에도 이런 뜻이 담겼습니다. 이너시아는 영어로 ‘관성’이라는 뜻입니다. 움직일 기미가 없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문제를 움직이게 만들어 ‘운동하는 관성’으로 바꾸겠다는 겁니다.―주변 사람들의 우려를 뒤로 하고 생리대 개발에 뛰어드셨습니다. 학부생이 쓸 수 있는 공용 실험실에서 몰래 실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원 수업과 과제가 끝난 오후 8시부터 새벽 4시까지가 활동 시간이었습니다. 새벽에 실험실 불이 켜져 있으니 출근하던 교수님들이 문을 벌컥 열었다가 놀라신 적도 있어요. 생리대 흡수력을 테스트하려면 피가 필요해 전국 도축장도 돌았습니다. 물과 피의 속성이 다르거든요. 전국에 2개 있는 도축장에 직접 가서 피를 공수해 왔어요. 도축장에서 일하시는 분께 “버리실 피 좀 주실 수 있을까요?” 하니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죠. “생리대를 개발하고 있는 카이스트 학생입니다”라고 말씀드리니 그제야 남은 선지나 피를 주셨어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나요? 돌아보면 성장은 늘 ‘계단형’이었어요. 6개월 정도 정체됐다가 어느 순간 한 번에 문제가 해결되더군요. 정체 구간에 빠져있을 땐 매일 같이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한번은 공동 창업자 친구가 액체 질소를 사용해 실험하다가 다칠 뻔했어요. 그 친구가 놀라서 우는데 ‘이게 맞나’ 싶었어요. 저도 그 친구를 붙잡고 엉엉 울면서 “정말 미안하다”고 했어요. 공동 창업자들 모두 영재고, 과학고 나와서 카이스트 학사, 석사까지 마친 나름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친구들이잖아요. 저를 믿고 안정적인 길 대신 모험을 택한 건데 ‘피 떨어뜨리는 실험이나 시키고 있는 게 맞나’ 싶은 생각도 들었죠. 낮에는 AI를 연구하는 대학원생, 밤에는 생리대를 개발하는 창업가라는 이중생활을 이어가길 6개월. 공장에서 만든 생리대 샘플은 300개를 넘었습니다. 카이스트 대학원생들의 패기를 믿고 수억 원을 투자한 투자자는 제품 출시를 압박했습니다. 뛰어도 모자란 그 시점, 김 대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바보 같았던 걸까요.―6개월 넘게 개발하던 생리대를 버리고 원점으로 돌아갔다고요. 천연 소재인 셀룰로스만으로 충분한 흡수력을 구현할 수 없어서 셀룰로스에 다른 원료들을 합성해 흡수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희가 원하는 ‘100%의 안전성’을 보장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인풋은 셀룰로스였는데 아웃풋은 다른 물질이 된 거니까요. 다른 원료 첨가 없이 오로지 셀룰로스만 활용해 흡수체를 만들기로 목표를 재설정했습니다. 셀룰로스의 분자 구조, 모양 등에 따라 흡수력, 재질, 사용감이 달라지기 때문에 가공 작업을 수없이 많이 반복하며 최적화에 공을 들였습니다. 그 과정에만 1년이 걸렸습니다. ―공정을 ‘최적화’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흡수체라고 해서 무조건 흡수력만 높이는 게 아닙니다. 물 흡수 비율은 낮추고, 분비물인 혈(血)의 흡수 비율은 월등히 높이는 식입니다. 물이 덜 흡수되니 덜 축축해지고, 혈 흡수를 많이 하니 덜 찝찝하겠죠? 세밀한 부분까지 조정해서 소비자의 착용감을 개선했습니다. 높은 수준의 안전성 검사도 진행했습니다. 투자금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지만 수억 원을 들여 세포독성 검사, 피부 자극 검사를 진행했어요. ―‘생리대에는 기술력이 필요 없다’고 말하던 업계 관계자들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셀룰로스 100%로 흡수체를 만들었다고 하니 거짓말이냐고 의심하는 경쟁사도 있었습니다. 간장게장 맛의 100%를 간장으로만 냈다고 하면 ‘합성 조미료 넣은 거 아냐?’라고 의심하는 것처럼요. 의심의 시선이 억울하기도 했지만, 서서히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2022년 아시아 기업 중 유일하게 스위스 로잔연방공대가 주관하는 펨테크(femtech·female과 tech의 합성어) 육성 프로그램에 선정됐고, 지난해 중소기업벤처부가 선정한 ‘소재·부품·장비 스타트100’에도 뽑혔습니다. 슬로건 하나도 내부에서 판단하지 않아요. 우선 다 출시합니다. 소비자들이 가장 정확하고 냉정하게 판단해주거든요. 100% 셀룰로스 소재도, 최적화 공정도 중요했지만, 생리대 개발 과정에서 김 대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소비자의 반응입니다. 이론과 숫자가 가장 중요한 실험실의 연구자에서, 시장의 반응을 면밀히 살피는 사업가로 변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연구자로 시작해 이론을 현실로 구현하는 개발자, 투자를 유치하고 제품을 마케팅하는 사업가로 변해왔습니다. 그 과정이 쉽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전 연구실에서 좋은 기술을 만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어요. 훌륭한 기술을 접목한 생리대를 개발했으니 투자가 붙고, 제품이 팔리는 게 당연하다고 본 거였죠. 그런데 정작 투자자들의 반응은 냉랭했습니다. “공돌이들은 물건만 잘 만들고 끝이다. 그 물건을 소비자가 정말 원하는지, 소비자들이 어떤 걸 바꾸길 원하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분도 있었어요. “기술력이 뛰어난 기업보다 판매력이 좋은 기업에 투자하는 게 낫다”고 대놓고 말하는 투자자도 있었고요. 결국 메시지는 같았어요. ‘소비자 지향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소비자 지향적인 사고방식, 어떻게 실천하셨나요? 완제품 샘플을 20개 만들어서 전부 사용자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중고 물품 판매 앱을 비롯한 지역 커뮤니티에서 체험단 300여 명을 모집해 그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들어서 개선했습니다. 창업자들이 각각 하루에 10~20명의 소비자들을 만나 인터뷰도 했어요. 1000여 명으로부터 생리대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의견을 받았습니다. 소비자 지향적인 사고는 지금도 이너시아의 근간입니다. 저흰 슬로건 하나도 내부에서 판단하지 않아요. 우선 다 릴리즈 해봅니다. 소비자들이 가장 정확하고 냉정하게 판단해주거든요.생리대 개발한다니 피식피식 웃는 사람들도 있었어요.김 대표는 요즘도 3초의 정적과 마주합니다. 다만 이유는 달라졌습니다. 창업하겠다고 나섰을 땐 의구심이었다면 지금은 놀라움입니다. 월 매출은 수억 원에 달합니다. 제품을 처음 선보인 2022년 ‘월 매출 1억 원’이 꿈의 숫자였던 걸 생각하면 큰 변화입니다.―매출의 성장세가 가파른데요.올 1, 2월 매출이 지난해 연 매출을 넘었습니다. 월 매출은 수억 원대에 접어들었고, 일 매출만으로 3000만 원을 달성한 날도 있습니다. ‘나의 불편함에 동감하는 소비자가 어딘가에 있다’라는 확신 하나로 가망이 없어 보이는 시장에 뛰어든 건데, 제 확신이 맞았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어요. 창업 초반 컨퍼런스를 갔을 때 생리대를 개발한다고 하면 피식피식 웃는 사람도 있었어요. ‘쟤넨 뭐 하는 애들일까’라는 의심의 눈초리도 받았고요. 지금은 다릅니다. 좋은 제품을 개발해냈고, 또 소비자가 좋아해주고 있으니까요.―이너시아를 어떤 기업으로 키우고 싶으신가요?‘이너시아’의 뜻이 ‘관성’이잖아요. 여성들이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관성적으로 사용해왔던 모든 물건을 과학 기술로 하나둘씩 바꿔 나가겠다는 의미를 담았죠. 지금까지 개발을 시도했던 제품이 30개 정도 됩니다. 불편함을 느꼈던 물건이라면 모두 개발에 나설 겁니다. 어떤 여성 소비자가 ‘이 물건이 사고 싶은데 어디 걸 사지?’라고 고민할 때 주저 없이 이너시아를 선택할 수 있는 그 날을 꿈꿉니다. 아침 식사가 왜 영어로 Breakfast인지 아시나요? Fast는 ‘금식’이란 뜻입니다. Break Fast는 ‘금식을 깬다’는 의미죠. BreakFirst는 이른 아침 당신의 허기를 가장 먼저 깨주는 뉴스레터입니다. 초심을 잊은 당신, 관성에 매몰된 당신을 위해 다양한 업계에서 ‘처음’을 만들어낸 이들을 만납니다.매주 월요일 오전 7시 30분 발송되는 ‘관성을 깨는 1분, BreakFirst’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권태와 졸음을 영감과 혁신으로 채워 보세요. 구독자에게만 공개된 영상 인터뷰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뉴스레터 구독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p0=70010000001050&m=list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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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장이 또 이상한 소리하네’…직접 선수로 뛰며 개발하자 세계가 알아줬다[BreakFirst]

    목에 핏대가 설 정도가 아니었을까. 2014년 3월 경기 광주시 길림양행(현 바프·HBAF) 사무실에서 윤문현 대표(46)는 직원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습니다. “생각도 못 합니까? 말도 못 하나요? 할 수 있는 때까진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젊은 사장님이 목소리를 높여도 직원들은 냉랭했습니다. 대형마트 자체 상표(PB) 견과류 제품을 납품하던 업체인데, 시즈닝을 한 ‘맛있는 견과류’를 자체 개발해서 내놓자고 하니 직원들은 당황했습니다. 매사에 긍정적 태도를 보였던 생산팀장까지 표정이 영 별로였습니다.“저희는 개발팀도 없는 회사인데, 어떻게 가공 제품을 만듭니까?”개발팀은 없었지만, 윤 대표에겐 ‘생존 본능’이 있었습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도태돼 사라지고 만다.’ 2006년 갑자기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아 경영하게 되면서 그는 절박함을 배웠습니다. 결국 반대를 무릅쓰고 직원 1명과 함께 무작정 가공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 정리해둔 레시피는 수백억 원대 매출 성장의 씨앗이 됐습니다. 유행을 넘어 사회현상으로 주목받았던 ‘허니버터’ 열풍에 빠르게 올라타는 기술적 기반이 된 겁니다. 빚을 걱정하던 회사는 연 매출 1000억 원대의 건실한 기업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도 괜찮은데 굳이? 왜?’라는 관성을 매번 거슬러 온 윤 대표의 몸부림의 결과입니다.회사 사람들 모두 저를 싫어했습니다. 회사를 헤집고 있었으니까요.―2006년 아버지의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사업을 이어받으셨습니다. 길림양행은 미국에서 아몬드를 수입해 국내에 공급하는 단순 유통 회사였습니다. 아몬드 수입 규제가 풀리고, 공급 경로가 다양화하면서 납품처가 끊기고 있었습니다. 제조업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공장을 세우기 시작하셨는데,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습니다. 전 그때 대학을 갓 졸업하고 대기업 입사를 일주일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받게 됐는데 100억 원의 빚과 함께였습니다. 병상에 계신 아버지를 보면서 죄송함과 감사함이 겹쳤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돈 벌고 계셨구나’를 처음 깨달았거든요. 회사는 부도 직전이었지만 시도도 안 할 순 없었습니다. 제조업으로 가거나, 사업을 접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회사를 지배하던 가장 큰 관성은 무엇이었나요?‘우리 회사는 유통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부정적 확신이었습니다. 회사 직원, 거래처 사람들로부터 ‘제조로 가는 건 더 빨리 죽는 길이다’라거나 ‘견과류로는 돈 못 번다’ 같은 말을 듣기도 했어요. 제조 공정을 구축하려면 투자 비용이 들어가는데, 진입 장벽이 낮으니 경쟁사가 넘쳐나고 그렇기 때문에 수익은 못 내는 구조라는 말이었죠. 처음엔 회사 사람들 모두 저를 싫어했습니다. 어느 날 사장님이 쓰러지시고, 새파랗게 어린 아들이 와서 회사를 헤집고 있었으니까요. (당시 윤 대표는 28살이었다)―회사를 이어받은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뭔가요?복잡하게 엉킨 실타래가 있다고 해보세요. ‘어디를 어떤 순서로 당겨야겠다’고 계획하진 않죠? 어느 한 곳이 풀리면 옆의 것이 풀리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다 풀리게 됩니다. 실타래 풀 듯 문제를 풀기로 했습니다. 당장 매출을 만드는 게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대형마트는 PB 상품 개발에 한창이었는데, 먼저 그 시장을 뚫기로 했습니다. 대형마트에 견과류 PB 상품을 납품하는 업체가 당시에 7~10곳 있었습니다. 끼어들 여지가 없었죠. 그래서 전국 마트, 편의점을 돌며 ‘언제든 연락 달라’며 인사를 하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한 곳씩 거래처를 확보한 뒤에는 다들 하기 싫어하는 일을 찾아서 했습니다. 판촉 사원을 두고, 시식 행사를 하는 겁니다. 인건비가 들고 사원 관리도 귀찮아 전부 꺼리는 일이었죠. 그것부터 했습니다. 모두 기피하는 일을 모아서 하다 보면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당시 우리 회사엔 개발팀도 없었거든요. 맨땅에 헤딩으로 시작했습니다.대형마트에 PB 상품을 납품하면서 실타래는 풀린 듯했습니다. 회사는 2010년 460억 원, 2012년 520억 원, 2014년 650억 원의 매출을 올리며 안정적인 성장세를 보였습니다. 그때 윤 대표는 또 한 차례 ‘엉킨 실타래’를 발견합니다. PB 상품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PB 상품은 대형마트라는 브랜드와 유통 채널을 활용해 마케팅이나 유통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감하고, 소비자에게 값싸게 제공됩니다. 대신 납품업체의 마진도 그만큼 적습니다. 윤 대표는 독자적인 레시피를 개발해 자체 브랜드를 만들기로 합니다. 2014년 직원들과 또 한 차례 설왕설래가 이어졌습니다.―당시 매출을 보면 안정적인 상황이었는데 사업을 다른 방향으로 확대하려고 하셨습니다.미국과 유럽을 다니며 시장 조사를 하면서 한국에도 가공 견과류 시장이 반드시 생긴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미국의 마트를 가 보면 견과류 진열대의 4분의 1은 가공 견과류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한국에서 견과류에 대한 인식은 ‘건강식품’에 가까웠죠. 원물 그대로를 먹었습니다. 다양한 맛이 없었죠. 저는 견과류가 ‘스낵화’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견과류를 수입해 포장 판매하는 제조업은 진입장벽이 낮아서 경쟁사도 많았고요. 차별화가 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한국에선 가공 견과류 시장이 전체 견과류 시장의 5%도 되지 않았습니다. 또 험난해 보이는 길을 가려니 직원들의 반발이 컸을 것 같습니다. 당시 회사엔 개발팀도 없었습니다. 직원들도 냉랭했습니다. 직원 한 명을 데리고 ‘맨땅에 헤딩’으로 아몬드 가공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쿠키 가게를 운영하던 지인에게 부엌을 빌려서요. 가장 어려웠던 건 당액으로 아몬드를 코팅한 뒤 시즈닝 가루를 입히는 기술이었습니다. 코팅된 아몬드가 서로 들러붙고, 시간이 지나면 눅눅해졌거든요. 당액의 농도, 냉각 시간을 달리하며 시행착오를 반복해 레시피를 완성했습니다. 바로 써먹지는 못해서, 일단 레시피가 담긴 문서를 사무실 서랍 아래 칸에 넣어 놨죠.―그 레시피 덕분에 히트 제품인 ‘허니버터아몬드’가 태어났군요.기억하시겠지만 2014년에 허니버터칩(해태제과) 인기가 엄청났습니다. ‘허니버터고등어’ 까지 나온 걸 봤습니다. 당시 편의점 GS25에서 ‘허니버터칩같은 제품 없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유행이 한창일 때니까, 2주 안에 가져오라고 하더라고요. 당시 샘플 제조를 담당하던 직원에게 아몬드를 튀기지 말고 구워서 당액을 묻힌 뒤에 허니버터맛 가루를 입히라고 지시했습니다. 직원이 “이렇게 하면 아몬드끼리 다 들러붙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때 서랍에 넣어두었던 레시피가 떠올랐습니다. 그 레시피로 2주 만에 허니버터아몬드를 만들었습니다.2주 만에 탄생한 ‘허니버터아몬드’는 회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습니다. 출시 첫 달 매출이 2억 원이었는데, 다음 달에는 10억 원, 그다음 달에는 20억 원이 됐습니다. 별다른 마케팅이나 판촉을 하지도 않았는데 중국업체 바이어가 회사에 제 발로 찾아왔습니다. 수출국이 25개국으로 늘었습니다. 바프의 매출액은 2018년 1400억 원까지 치솟았습니다. ―돌아보면 허니버터아몬드만 반짝 성공하고 그대로 끝날 수도 있었던 시기였습니다.허니버터아몬드를 낸 뒤 경쟁사들이 유사 제품을 만들었는데 우리 제품에는 못 미치는 것 같았어요. 직원들도 ‘대표님, 다른 회사들은 못 따라 합니다’라고 말했죠.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허니버터아몬드 같은 제품을 만드는 건 자물쇠를 푸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했습니다. 000부터 999까지 세 자리를 넣으면 언젠가 풀리죠. 운이 좋으면 빨리 풀리고요. 후속 제품을 만들어 성공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업체들이 자물쇠를 풀 동안 시장 점유율을 높여야 하니까요. 회사에선 ‘허니버터아몬드 생산 공정만 24시간을 돌려도 물량이 부족한 상황인데 데 왜 신제품을 얹으려 하느냐’고 반대했습니다.―직원들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신제품으로 호불호가 강한 와사비맛을 선택하셨습니다.내부 반발이 컸습니다. 신제품도 안 되는데, 와사비맛은 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와사비맛 제품이 팔리는 걸 본 적이 없대요. 전 ‘제대로 만들면 된다’고 설득했습니다. 와사비는 원래 고기나 밥에 얹어 먹으면 잘 어우러지는 식재료잖아요. 와사비향을 메인이 아닌 ‘터치’로 기로 하고, 육수맛을 가미했습니다. ‘10명 중 9명이 5점을 줘도 한 명이 10점을 주는 제품을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마니아층을 공략하면 추가 매출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36가지 맛에 달합니다. 더 개발할 게 있을까 싶은데요. 6개월 동안 마카다미아를 비롯해서 견과류에 입힐 101가지 맛을 개발했습니다. 유럽, 미국, 일본에 비해 한국은 마카다미아 소비량이 굉장히 낮은 국가거든요. 이번에도 제가 마카다미아에 새로운 맛을 입혀서 내자고 했더니 직원들은 ‘마카다미아는 안 팔립니다. 아몬드로 내시죠?’라고 하더라고요. 이번에도 직원들에게 반문했습니다. “바프가 국내 최대 견과류 브랜드인데, 우리가 안 하면 누가 마카다미아 취급하겠습니까. 선두가 리스크를 감수해야 합니다.”좋아하는 사람 계속 생각나듯, 회사가 좋으면 계속 생각나겠죠. 인터뷰하던 윤 대표가 스마트폰을 열어 사진첩을 뒤적였습니다. 그가 내민 사진에는 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 크기의 ‘딸기 맛 마카다미아’ 모형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요즘 사무실에서 모형을 이리저리 만지며 ‘어떻게 하면 딸기와 비슷한 모양을 만들 수 있을까’ 고심 중이라고 합니다. 손톱 크기만 한 마카다미아의 각도까지 신경 쓸 정도로 그의 머릿속은 오직 견과류로 가득 차 있습니다. ―관성을 깨려고 할 때마다 직원들의 반발이 컸던데요. 설득의 방법이 있었나요.회의 때 ‘사장이 또 이상한 소리 하네’라는 직원들의 표정을 종종 만나죠. 생각해보면 제가 직접 선수로 뛰는 게 가장 좋은 설득 방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리더라면 어떤 사안이든 가장 많은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랬는데, 그건 제가 직원들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더 많은 시간을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직원들도 저 같았으면 좋겠는데 억지로 되는 건 아니죠. 좋아하는 사람이 계속 생각나듯, 회사를 좋아하고 회사 생활이 즐거우면 자연스럽게 계속 생각나겠죠. 직원들도 그렇게 될 수 있는 회사를 만들려고 합니다. ―바프를 어떤 회사로 키우고 싶으신가요.‘멋있는 회사’가 되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을 멋지다고 표현할 때 여러 이유가 있는 것처럼, 멋있는 회사에도 여러 요건이 있습니다. 매출은 기본입니다. 회사의 성과는 매출이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돈만 많다고 멋있는 회사라고 하진 않죠. 직원들이 즐겁게 다녀야 합니다. 직원들의 만족감과 경험치가 업무에 반영되거든요. 그래서 회식도 평범한 곳에선 안 하고, 직원들에게 헬스장도 끊어 줍니다. 가장 중요한 건 도전정신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회사가 되고 싶습니다. 아침 식사가 왜 영어로 Breakfast인지 아시나요? Fast는 ‘금식’이란 뜻입니다. Break Fast는 ‘금식을 깬다’는 의미죠. BreakFirst는 이른 아침 당신의 허기를 가장 먼저 깨주는 뉴스레터입니다. 초심을 잊은 당신, 관성에 매몰된 당신을 위해 다양한 업계에서 ‘처음’을 만들어낸 이들을 만납니다.매주 월요일 오전 7시 30분 발송되는 ‘관성을 깨는 1분, BreakFirst’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권태와 졸음을 영감과 혁신으로 채워 보세요. 구독자에게만 공개된 영상 인터뷰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뉴스레터 구독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p0=70010000001050&m=list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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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냉동김밥은 저렴한 냉동식품?’…편견을 깨자 길이 나타났다[BreakFirst]

    폭우. 경남 하동의 섬진강이 범람하고 화개장터가 침수된 2020년 8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하동에서 김밥 사업을 하던 ‘복을 만드는 사람들’(복만사) 조은우 대표(43)는 도로를 뒤덮은 빗물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공장도 물에 잠겨버렸으면 좋겠다.’ 내 안에 포기할 용기조차 없을 땐 외부의 힘으로 포기 ‘당하고’ 싶다는 비겁한 마음이 스미곤 합니다. 조 대표가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2년 걸려 만든 ‘냉동김밥’은 시장의 외면을 받고 있었습니다. 공장이 물에 잠기면 ‘김밥을 세계에 수출하겠다’던 포부도 함께 없던 일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주문량이 폭주해 공장을 확대해야 하는 지금 상황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지만, 기회를 잡은 것은 관성을 깨고 2년간 절치부심한 한 조 대표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그동안의 여정이 궁금합니다. 대학에서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어요. 전공과 관련된 회사에 취업했지만, 사업에 갈증이 있었죠. 처음엔 외식업에 뛰어들었어요. 프랜차이즈를 갖는 게 꿈이었거든요. 20대에 두 번 고깃집을 차렸고, 그때 번 돈으로 호기롭게 상경했습니다. 죽집을 시작했는데 결국 망했어요. 그때 남은 재산이 1000만 원이었는데, 그 돈을 들고 하동으로 귀촌했습니다. 죽을 만들던 노하우를 살려 이유식 사업을 벌였는데, 공동 창업자들과 의견이 달라 갈라섰습니다. 하동을 대표하는 지역 명물을 만들어보고 싶어 빵과 호떡 사업을 벌였는데 반응은 시원치 않았습니다. 2017년에는 ‘대롱치즈스틱’이란 걸 만들었어요. 꿈이 이뤄지나 싶었습니다. 대구 동성로 1호점을 시작으로 13호점까지 지점이 늘어났고, 고속도로 휴게소 130곳에 입점했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국내에서는 생소한 냉동김밥을 개발하기 시작하신 거죠? 한창 사업을 키워나가던 때였는데, 2018년 12월쯤이었습니다. 기사를 봤는데, 일본의 무인양품에서 한국식 냉동김밥이 대박이 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내가 직접 만들어서 수출해볼까?’라는 생각이 냉동김밥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사업을 하다 보니 지역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도 기업가의 역할이라는 마음도 생겼는데, 김밥을 만들면 지역 농산물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겠다 싶기도 했고요.―애써 개발했는데 발매 첫해인 2020년 매출은 4억 원에 불과했다고요. 냉동김밥을 개발하고 시장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나요?‘냉동김밥은 아무도 안 먹는다’는 시장의 고정관념이 컸습니다. 냉동김밥은 신선김밥보다 맛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가격이 저렴해야 한다는 인식이 바이어들에게 강하게 박혀있었어요. 국가보조사업에 지원해도 떨어지는 이유는 늘 같았어요. 발표가 끝나면 심사관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같은 가격이라면 굳이 냉동김밥을 먹을까요?’ ‘품질이 좋지만 비싼 냉동 김밥’이라는 제품 자체가 관성을 거스르는 조합이었던 것 같아요. 그나마 관심을 보이는 해외 바이어가 있어도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로 배 정박 기간이 두 달을 넘어가 제품을 보낼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때는 나쁜 생각도 자주 했죠.사실 한국인에게 냉동김밥은 생소한 제품입니다. 지도를 조금만 검색해봐도 방금 만든 김밥을 살 수 있는 곳이 가득합니다. 더군다나 김밥의 유통기한은 상온 7시간, 냉장 36시간입니다. 더 큰 문제는 맛입니다. 해동 뒤 눅눅해진 김, 아삭함이 사라진 채소는 그다지 끌리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냉동김밥을 만들 생각도, 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냉동김밥의 개발 과정이 궁금합니다. 냉동김밥을 해동하면 김이 젖으면서 김밥이 풀어지고 재료는 눅눅해집니다. 해동해도 터지지 않는 냉동김밥을 만들기 위해 수분을 제어하는 기술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오이처럼 수분이 많은 재료는 제외했고, 당근, 우엉, 유부 등 재료는 최대한 말렸어요. 완전히 말리면 퍽퍽해지기 때문에 신선감을 유지하는 선에서 건조하는 ‘수분 제어 기술’을 연구했죠. 밥과 재료가 수분을 덜 머금게 하도록 김밥을 빠르게 얼리는 ‘급속 냉동’ 기술도 개발했습니다. 김이 가열되면 질겨지기 때문에 적당히 얇으면서 탄력감 있는 김을 고르기까지 시중에 나온 모든 김은 다 먹어봤어요. 해동 시간은 3분을 넘지 않으면서 김밥 가운데까지 충분히 따뜻해질 수 있게 가운데가 옴폭 패여 있는 용기도 직접 개발했습니다. ―‘즉석김밥이 최고’라는 세상의 관성을 어떻게 깰 수 있었다고 생각하세요?냉동을 냉동이라 부르지 않기로 한 겁니다. 냉동김밥이라는 단어 자체에 ‘저렴하고 품질은 다소 떨어지는 냉동 제품’이라는 고정관념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깨기로 했죠. 더군다나 처음부터 수출을 염두에 두고 레시피를 개발하다 보니 통관이 까다로운 육류는 빼고 채소를 많이 넣었어요. 자연스럽게 해초 두부, 땡초, 버섯잡채, 우엉 유부, 톳두부 등 건강한 레시피의 ‘비건김밥’이 됐어요. 열량도 대폭 낮췄습니다. 냉동된 밥을 해동하면 전분 노화현상이 일어나서 열량 흡수율이 낮아집니다. 그 원리를 응용해 급속 냉동으로 김밥 열량을 떨어뜨리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일반 김밥은 500kcal가 넘는데 저희 냉동김밥은 200~300kcal에 불과합니다. 저렴한 냉동식품이라는 분류에서 빠져나와 건강한 ‘웰빙푸드’로 재정의했습니다.―냉동김밥을 ‘웰빙푸드’로 재정립한 성과는 어땠나요? 시장의 반응이 오던가요? 메일이 하나 왔는데, 마켓컬리 MD(상품 기획자)였어요. 휴게소에서 저희 냉동김밥 제품을 봤는데, 처음 보는 제품이라 ‘우리가 먼저 팔아봐야겠다’고 생각했대요. ‘내 마지막 동아줄이다’ 싶었어요. 그동안 준비해왔던 대로 ‘저칼로리의 건강한 김밥’이라는 콘셉트의 기획안을 준비했어요. 기존에 팔던 ‘매콤제육’이나 ‘계란김밥’만 강조했다면 계약이 불발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결국 다이어터를 타깃으로 한 ‘비건 김밥’이 관심을 받았고, 거래가 시작됐습니다. 이후 윙잇, 쿠캣 등 국내 대형 유통사 18곳에 입점했습니다. ―2020년 복만사 냉동김밥 ‘11시45분’의 수출국은 홍콩 단 한 곳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인기를 끄니 해외 판로도 조금씩 뚫리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대형 온라인 마켓에서 판매량 순위권에 오른 제품이라고 하니, 국제식품박람회를 찾은 해외 바이어들도 큰 관심을 보이더군요. 온라인에 달린 ‘무조건 재구매하는 제품이다’ ‘맛있는 다이어트 식품은 처음이다’ 등의 리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죠. 그렇게 미국, 프랑스, 홍콩 등 12개국에 수출하게 됐습니다. 냉동을 냉동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습니다.수출이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KIMBAP’에 대한 해외의 인식은 좋지 못했습니다. 해외 매체에서는 ‘아시안 푸드’를 비하의 소재로 쓰고 있었습니다. 미국 드라마에서는 일본 사케를 두고 ‘땀에 젖은 양말 냄새가 난다’거나, 생선 머리를 넣고 끓인 국에서 ‘쓰레기 맛이 난다’고 조롱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김밥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시안 이민자 자녀가 학교에 점심 메뉴로 전통음식을 싸 갔다가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경험을 ‘런치박스 모먼트’라고 부르는데요. 이 경험의 단골 메뉴 중 하나가 ‘KIMBAP’이었습니다. ―해외에서 김은 독특한 식감과 향 때문에 ‘혐오식품’ 취급받곤 하는데요. 해외시장에서 김밥이 잘 팔릴 거라고 예상하셨나요? 수출했던 국가 중에 프랑스와 아랍에미리트 등에서 재발주가 들어왔어요. 저도 의아하더군요. 비이어에게 ‘이걸 외국인들이 왜 사 먹습니까?’라고 물었어요. “스시인줄 알고 먹는다”더군요. 그래서 김밥 대신 ‘코리안 스시’로 이름을 바꾸면 더 잘 팔리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름이 익숙하면 접근하기 쉬우니까요. 그래도 한국의 대표 음식에 ‘스시’라는 이름을 붙일 순 없었어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군 복무 다음으로 뿌듯한 게 김밥이란 이름을 고수한 겁니다. 지난해 8월, 한국계 미국인 사라 안은 자신의 SNS에 영상을 하나 올립니다. 1분 남짓한 영상에는 냉동김밥을 시식하는 장면이 담겼습니다. 틱톡에서 1370만 회, 인스타그램에서 880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이후 북미권에서는 ‘KIMBAP’ 품절 대란이 벌어졌습니다. ‘1인 2줄’ 구매량 제한을 걸 정도로 김밥이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드디어 한국 냉동김밥을 손에 넣었다”는 인증 영상이 쏟아졌습니다. 혐오 식품 취급 받던 김밥의 급격한 신분 상승(?)으로 복만사에도 복이 굴러 들어왔습니다. ‘11시45분’의 수출국은 19곳으로 늘었습니다. 매출은 지난해 60억 원까지 치솟았습니다.―사라 안이 먹은 ‘바바김밥’ 제조사는 ‘올곧’이라는 기업이죠. 여기에 인기가 높아지자 대기업까지 뛰어들었다고요. 시장을 독점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은 없나요? 냉동김밥이 점점 인기를 끌면서 주문량이 늘어나 우리 공장의 생산력으로는 납품 일정을 맞추기도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다양한 생산자가 있어 오히려 저희의 공백을 메워줬다고 생각해요. ‘코리안 스시’가 될 뻔한 한국의 김밥이 제 이름인 ‘KIMBAP’을 달고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그런 점에선 올곧 같은 업체에 오히려 고맙다는 마음도 듭니다. “최고가 돼라.””던 친척의 말이 각인된 것 같아요.조 대표는 지금까지의 성공에 여러 행운이 따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업 실패로 1000만 원을 들고 하동으로 왔을 때까지 조 대표는 오히려 불운의 사나이에 가까웠습니다. 냉동김밥으로 기사회생하기까지 7번이나 실패의 쓴맛을 봤으니까요. 두 번의 고깃집, 죽, 이유식, 빵, 호떡, 치즈스틱까지 7번이나 종목을 바꿔가며 창업했지만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7번의 실패 뒤 찾아온 성공은 운보다는 도전 정신 때문이었을 겁니다. 칠전팔기는 그를 위한 단어입니다. ―7번의 실패에도 지치지 않고 관성을 깨는 도전을 이어온 원동력은 뭔가요? 어렸을 때 숱하게 부모님께 혼나도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잖아요.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됐던 순간이 잊히지 않는 것처럼요. 초등학교 2학년쯤이었을 거예요. 명절에 온 가족이 모였는데, 마당에서 큰어머니가 제 어깨를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은우야, 뭐든 한 분야에서 최고가 돼라. 세계가 아니면 한국에서, 한국이 아니면 지역에서, 지역이 아니면 친구들 사이에서라도 최고가 돼라.” 그 순간, 그 말이 제게 각인돼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한 분야에서는 최고가 돼야 한다’라는 의지가 몸에 배 있는 것 같습니다. ―복만사의 목표가 궁금합니다. 최근 투자사 두 곳에서 연락이 왔어요. 볶음밥, 주먹밥 등으로 종목을 넓혀보자고 하더군요. 회사를 키울 기회지만 거절했습니다. 제 철학이 지켜지지 않을 것 같아서요. 농산물은 값싼 중국산으로, 쌀은 미국 칼로스 쌀로 교체하라고 하겠죠. 원가가 비싸도 품질이 우수한 국산 농산물을 사용한다는 게 제 철칙입니다. 위생적인 김밥 양산화 방법을 개발해서 건강하고 깨끗한 김밥을 세계에 수출하고 싶어요. ‘냉동김밥 주제에 4000원씩이나 해?’가 아니라, ‘이렇게 건강하고 맛있는 웰빙푸드가 4000원밖에 안 해?’라는 인식을 세계인에게 심어주고 싶어요. 김밥 하나로 승부를 보는 ‘김밥계의 장인’이 될 겁니다.아침 식사가 왜 영어로 Breakfast인지 아시나요? Fast는 ‘금식’이란 뜻입니다. Break Fast는 ‘금식을 깬다’는 의미죠. BreakFirst는이른 아침 당신의 허기를 가장 먼저 깨주는 뉴스레터입니다. 초심을 잊은 당신, 관성에 매몰된 당신을 위해 다양한 업계에서 ‘처음’을 만들어낸 이들을 만납니다. 매주 월요일 오전 7시 30분 발송되는 ‘관성을 깨는 1분, BreakFirst’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권태와 졸음을 영감과 혁신으로 채워 보세요. 구독자에게만 공개된 영상 인터뷰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뉴스레터 구독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312469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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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기 결혼, 10억 원의 빚… 그럼에도 낸시 랭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유 [복수자들]

    고양이 인형을 어깨에 얹고 ‘키티 섹시 낸시 앙’을 외치는 발랄한 여성이 있습니다. 이 문장만 보고도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팝 아티스트 낸시 랭입니다. 20년 전부터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온 그를 방송인으로 아는 이도 많지만 낸시 랭의 본업은 ‘팝 아티스트’입니다. 7년 전 사기 결혼 피해를 겪고 인생의 위기에 봉착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 ‘팝아트’라고 합니다. 가정 폭력, 불법 촬영물 협박 등 누구보다 가혹한 고통을 겪은 그가 전 세계 여성을 위로하는 ‘스칼렛’ 시리즈를 선보인 데에 이어 올여름엔 ‘스페이스 아트’를 주제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삶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해 살아갈 힘을 얻게 된 낸시 랭을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2023년은 ‘팝아티스트’로서 바쁜 한 해였습니다. “올여름 ‘스페이스 아트’를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어요. 백남준 선생님이 비디오 아트를 창시했다면 낸시랭은 스페이스 아트를 창시하겠다는 목표로 야심차게 준비한 전시입니다. 누리호에 탑재된 큐브 위성을 개발한 연구팀을 이끈 한국항공대 오현웅 교수(항공우주 및 기계공학부)와 ‘나라 스페이스’ 박재필 대표와 협업한 전시였어요.”―‘스페이스 아트’는 낯선 장르인데요, 처음 착안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말 그대로 우주와 팝아트를 결합한 예술의 한 장르라고 생각해주심 돼요. 우주와 팝아트를 접목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2년 전 누리호 1차 발사 실패 때였어요. 우주 산업은 과거엔 국가가 주도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였잖아요. 하지만 최근엔 우주 산업이 점점 민간으로 넘어오고 있어요. 일론 머스크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죠. 국가라는 소수 권력이 점유했던 우주 기술을 점점 민간으로 넘어오는 현상이, 대중적 이미지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고 오는 ‘팝아트’ 정신과 맞닿아있다고 생각했어요.”대중적으로 널리 소비된 이미지를 차용해 예술 작품으로 승화하는 ‘팝아트’는 미국의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으로 국내에 알려진 현대미술의 한 장르입니다. 홍익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낸시랭이 전공과 무관한 팝아트를 선택한 건 그것이 대중적이고 상업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술과 대중, 상업은 얼핏 어울리지 않는 듯합니다.―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예술, 팝아트에 매료된 이유는요? “우리가 다 익숙하게 알고 있는 대중적인 오브제를 활용해, 자신의 생각을 담아 작품으로 표현한 게 ‘팝아트’라는 장르예요. 이미 대중들의 눈에 익은 어떤 이미지를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상업적이고 가장 대중적이죠. 그렇기에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하고 향유할 수 있어요. 팝 아트는 예술 앞에서 계급과 계층, 성별과 나이 등의 경계를 허물어 줍니다. ‘그들만의 예술’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예술’을 지향하죠.”낸시랭이 팝아티스트로서 첫발을 뗀 건 2003년입니다. 베니스 비엔날레 당시 한국 대표로 선정되지 못하자, 산 마르코 대성당 앞에서 빨간 속옷을 입고 바이올린을 켜는 퍼포먼스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2006년 8월 KBS ‘인간극장’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방송활동을 병행하는데요, 당시엔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이 방송에 출연한 건 극히 드문 일이었습니다.―지금이야 연예인 아닌 일반인들도 방송에 많이 나오지만 2000년대 초반 낸시랭이 처음 방송에 나왔을 때는 파격적이었어요. “그때 욕을 엄청 많이 먹었어요. 당시만 해도 가수, 배우, 앵커, 개그맨 같은 사람만 텔레비전에 나왔거든요. 사람들은 연예인도 아닌데 왜 방송에 나오냐면서 엄청난 욕과 악플에 시달렸어요. 근데 지금은 보세요. 의사, 변호사, 심지어 일반인들도 다 TV에 나오잖아요. 선구자적인 무언가를 시도했다고 생각해요. 처음이었기에 욕을 많이 먹었던 거죠.그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생계 문제도 있었어요. 돈을 벌지 않으면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죠. 방송을 한 건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어요.”―20여년간 26회의 개인전을 열었을 정도로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셨어요. 하지만 많은 이들이 낸시 랭을 예술가 보다는 방송인, 구설수로 알고 있어요. “미국의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이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그땐 아날로그, 흑백TV의 시대였는데요, ‘미래에는 누구나 15분 동안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것이다.’(1968년 전시 브로셔에 직접 쓴 문구) 앤디 워홀은 그 시대에 그런 혜안을 가졌을 정도로 시대를 앞선 아티스트였어요. 근데 앤디 워홀의 인생을 보면 할리우드 스타급으로 파파라치, 스캔들, 구설수, 화제를 몰고 다녔단 말이에요. 지나고 보면 저의 인생 궤적도 비슷한 평가를 받을 거라 생각해요.”―보통 작품 활동하실 때 영감은 어디에서 받나요. “삶의 특정한 순간, 저의 내면 깊숙이 꽂힌 아이디어에 충실한 편이에요. 팝아트 작가라고 해서 팔릴 만한 작품만 하진 않아요. 저의 꿈, 상상력, 시대의 문제, 철학…. 모든 게 영감이 될 수 있어요. 최근의 제가 ‘우주’에 꽂혀있는 것처럼요.”팝 아티스트로 승승장구하던 낸시랭에게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찾아온 적도 있습니다. 2017년 사기 결혼 피해를 당한 것인데요. 당시 낸시랭이 당한 사기 결혼 사건은 세간을 뜨겁게 달궜고 하루에도 100건 이상의 기사가 보도됐습니다. 이 일로 그에겐 마음의 상처뿐 아니라 10억 원의 빚까지 생겼습니다다.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할 정도로 괴로웠다는 그가 다시 일어서게 된 것은 팝아트 덕분이었습니다. 가정 폭력, 불법 촬영물 유포 협박 등의 피해를 겪은 낸시 랭이 자신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한 ‘스칼렛’ 시리즈를 2020년 선보인 겁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터키 이스탄불, 미국 마이애미, 싱가포르 등에서 전시를 열었습니다. ―‘스칼렛’ 시리즈에 담긴 의미가 궁금합니다. “스칼렛은 채도가 굉장히 높은 빨간색을 뜻하는 말인데, 데미 무어가 주인공인 영화 ‘스칼렛’이 있어요. 그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상영할 때 ‘주홍글씨’로 번역됐어요. ‘낙인찍히다’는 의미죠. 영화 속 주인공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 여성인데 마녀사냥을 당하고 낙인이 찍힌단 말이에요. 제가 사기결혼과 여러 범죄의 피해자가 되면서 여러 가지 힘든 일이 몰아쳐 왔었어요. 그때의 전 극단적인 선택을 고려했을 정도로 암담한 고통 속에 있었거든요. 그때 처음 진지하게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제가 당한 일들, 저 혼자 당한 게 아니더라고요. 같은 고통을 겪은 전 세계 여성들을 떠올리며 작업했어요.”―‘스칼렛’을 전 세계에 선보인 이유는요? “각 나라의 문화와 법이 다르잖아요. 같은 상황을 두고도 어떤 나라에선 가해자를 처벌하지만 어떤 나라에선 피해 여성에게 더 큰 벌을 주곤 해요. 각 나라의 문화, 관습, 법이 달라서 옳다 그르다 말할 순 없지만 예술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전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다른 인종, 관습, 문화를 가졌음에도 ‘이건 잘못된 것이다’라는 양심이란 게 있지 않을까. 그걸 건드리는 게 예술의 역할일 거예요. 사람들이 저의 작품과 퍼포먼스를 통해 본인 스스로의 양심을 들여다보고 판단하고 생각하게 하고 싶었어요. ‘스칼렛’은 제게 정말 중요한 작업이었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예술이 있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고, 지금 여기 살아있을 수 있었어요.”―작품을 통해 회복, 치유를 경험하신 거네요. “사람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이유가 너무 감당하기 힘든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에만 매몰된단 말이에요. 주변에서는 가만 놔두질 않죠. 끝없는 고통 속에 살다 보면 저도 모르게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어요. 다행히 옆에서 절 붙잡아주고 도와준 고마운 지인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여기 살아있을 수 있었죠. 1초가 100년처럼 너무 길게 느껴질 정도로 힘들었던 시기,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어요.”―10억원의 빚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고 계시거든요. “정말 열심히 살고 있는데 원금은 1원도 못 갚았어요. 매달 천만 원 넘게 나가는 이자를 갚고 있어요. 제가 사업하는 사람도 아니고, 고정 수입이 없는 예술가가 감당하기 너무 버겁죠. 전시회에서 작품이 모두 팔려도, 그 돈을 제가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다 이자 갚는 데만 다 나가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의욕이 꺾이는 시기가 있었어요.”―지금은 극복하셨나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가 쓰지도 않은 사채 이자 갚느라 6년, 7년을 살았는데 원금은 하나도 못 갚았잖아요. 작품이 잘 팔려도 행복하지 않고 저는 써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빼앗기니까…. 한동안은 너무 죽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절망적이었어요. 이게 언제 끝날까. 하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해요. 원금은 한 푼도 못 갚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지난 6년간 매달 1000만 원 이상의 돈을 벌었다는 뜻이잖아요. ‘낸시랭 정말 열심히 살았다’ 이렇게 다독여주고 싶어요. 앞으로도 씩씩하게 살아갈 거예요.“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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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수만의 ‘원 픽’ 브라이언이 청소에 미친 이유[복수자들]

    “더러우면 싸가지 없는 거예요.” 다소 과격한 소신 발언으로 인기몰이 중인 이가 있습니다. 그는 청소 하나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브라이언(42)입니다. 그는 브레이브걸스 유정의 더러워진 자동차 창문 틈을 수건으로 문지르며 희열을 느끼고, ‘옷 무덤’이 된 걸그룹의 숙소를 보고는 두 눈을 희번덕이며 “What the hell”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청소가 취미이자 특기인 브라이언은 ‘청소광 브라이언’이라는 유튜브 콘텐츠로 그야말로 ‘떡상’했습니다. 브라이언이 집에서 청소기를 밀고 세탁기를 돌리는, 그야말로 청소‘만’ 하는 모습을 담은 청소광 1화는 한 달 만에 조회수 320만 회를 넘었습니다. ‘청소 하나로 이렇게 웃긴 사람은 브라이언밖에 없다’ ‘첫 방송 보고 화장실 청소했다’는 댓글이 쏟아집니다. ‘청소 예능’이라는 전무후무한 장르를 개척한 브라이언은 한 때 소녀팬을 몰고 다니던 실력파 아이돌이었습니다. 1999년 환희와 함께 ‘플라이 투 더 스카이’로 데뷔한 그는 ‘Sea of love’ ‘Missing You’ ‘중력’ ‘습관’ ‘남자답게’ ‘가슴 아파도’ 등 수많은 히트곡으로 사랑받았습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이면도 있었습니다. 예민한 성격인 그는 무대에 오르고 예능에 출연하는 매 순간 긴장과 불안감에 시달렸습니다. 멤버 환희와는 ‘친하면 열애설, 안 친하면 불화설’이 났습니다. 안티팬들의 스토킹과 협박으로 죽음을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달고도 썼던 가수 시절을 지나, 그는 ‘미국 청소 아저씨’로 인생 2막을 시작했습니다. ‘찐광기’를 뽐내며 예능 블루칩으로 떠오른 그에게 방송, 유튜브 할 것 없이 섭외 연락이 쏟아집니다. 매일 아침 8시부터 저녁 9시가 넘어서까지 촬영 3~4개가 잡혀 있는 살인적인 스케줄에도 그가 에너지를 잃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청소에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전 국민이 청소하는 그날까지” 청소의 이로움을 전파하겠다는 브라이언을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청소광’에 이어 ‘키스광’도 노린다는 그의 속셈을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소로 제2의 전성기를 맞으셨어요. 첫 화 ‘청소광 브라이언’ 첫 화는 조회수 320만 회가 넘었습니다. 청소 콘텐츠로 이렇게 큰 인기를 끌 거라고 예상하셨나요?전 그냥 청소를 좋아할 뿐이었어요. 청소를 콘텐츠로 만들고, 심지어 그걸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죠. ‘청소광’ 유튜브를 처음 기획할 때도 걱정이 많았어요. 회의 때 작가님들에게 “이걸 누가 볼까요? 청소에 관심이 있을까요?”라는 말도 했었고요. 별 기대 없이 평소와 똑같이 청소를 한 건데 너무 재밌게 편집이 잘 된 거예요. 첫 화를 보고 ‘아, 이거 되겠구나’ 싶었죠. 청소를 귀찮아하거나 게을렀던 분들이 청소광을 보고 자극 받아서 청소 시작했다는 반응이 제일 기분 좋아요. ―‘더러우면 싸가지 없는 거예요’라는 명언을 남기셨는데, 평소 신조인가요?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농담이 아니었어요. 더럽다는 건 주변 사람들에게 지켜야 할 예의를 안 지키는 거예요. 누군가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청소가 안 되어 있다면 싸가지 없게 느껴지잖아요. 깔끔하고 깨끗한 건 타인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청소로 사업을 할 계획은 없나요?예전엔 ‘내가 좋아하는 걸 비즈니스로 하자’는 생각이 강했어요. 운동을 좋아해서 크로스핏 체육관을 열었고, 꽃꽂이를 좋아해서 꽃집을 열었죠. 그런데 일이 되면 힘든 순간이 와요. 스트레스를 받으니 그 일을 못 즐기겠더라고요. 청소를 너무 좋아하는데 비즈니스로 하면 청소하는 게 싫어질까 봐 사업은 하지 않으려고요. 그 대신 청소 제품 PPL이 엄청 들어와요. 저희 집에 설거지 세제가 100병 있어요. 평생 다 써도 남을 거예요. 그래서 청소용품을 매니저, 친척,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있어요. ―청소광에서 브레이브걸스 유정님의 차를 세차해 주시고, 걸그룹 숙소를 청소해주는 등 청소 하나로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어요.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으시나요? 다른 예능을 할 때는 작가님들이 대부분 구성을 하시고 저에게 어떤 콘셉트인지 전달해주셨는데, 청소광에서는 제가 아이디어를 많이 내요. 무엇보다 제가 청소를 정말 좋아하고, 청소에 대해선 제작진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아니까요. 그래서 회의를 할 때도 재밌어요. 브라이언은 SM엔터테인먼트를 세운 이수만 전 대표의 눈에 단번에 든 ‘확신의 SM상’이었습니다. 이 전 대표는 오디션장에서 브라이언을 보자마자 “쌍꺼풀 없는 눈이 H.O.T.의 장우혁과 비슷해 마음에 든다”며 그를 뽑았고, 연습생 생활 5개월 만에 그를 플라이 투 더 스카이로 초고속 데뷔시켰습니다. 외모뿐만 아니라 실력도 출중했습니다. 브라이언의 맑은 미성은 그룹 인기를 견인했습니다. 플라이 투 더 스카이는 매년 시상식에서 R&B 부문 상을 놓친 적이 없었습니다. 탄탄대로 같았던 그의 가수 생활에 우여곡절도 많았습니다. 교통사고로 인한 매니저의 죽음, 안티팬들의 괴롭힘 등이 이어져 극단적인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플라이 투 더 스카이로 큰 인기를 얻으셨어요. 그런데 힘든 순간도 정말 많으셨다고요. 가장 힘들었던 때가 있어요. 2002년에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 터졌어요. 여중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사고였죠. 당시 저와 환희가 라디오 DJ였어요. 생방송 중에 게스트가 이 사건에 대한 제 생각을 물어서 ‘운전을 하던 미군들이 확실히 잘못한 일이지만, 미국이라는 나라 전체를 미워하는 건 이상한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했어요. 그 뒤에 댓글창에 ‘네 나라로 떠나라’ ‘브라이언 죽어라’ 이런 댓글이 쏟아졌어요. 케이크 안에 칼날을 숨겨서 집으로 보낸 사람도 있었어요. 어떤 분이 편지를 주셔서 팬레터인 줄 알고 열어 봤는데 사고 현장에 있던 여중생 얼굴에 저와 환희 얼굴을 합성한 사진이 들어있던 적도 있어요. 환희한테도 너무 미안했고, 저 스스로도 괴로웠어요. 소주를 매일 마시고 매니저 형한테 ‘저 그냥 죽을래요’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당시엔 ‘절대 말실수하면 안 돼’라고 스스로를 괴롭혔는데, 시간이 지나니 내가 실수했다는 걸 인정하고,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는 게 최선인 것 같아요. 인간은 실수할 수밖에 없잖아요. 너무 스스로를 탓하지 말고 즐겁게 사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한때는 ‘국민가수’로 불렸을 정도로 플라이 투 더 스카이가 큰 사랑을 받았어요. 가수 활동을 할 계획은 없으신가요? 예전에는 노래하는 게 정말 즐거웠거든요. 그런데 반복된 성대결절로 목이 안 좋아진 뒤로 노래를 하는 게 부담스럽고 두려워졌어요. 제가 다시 음악을 하길 기다려주는 팬들에게는 미안해요. 한때 정말 사랑했던 노래를 못 하게 된 게 스스로도 정말 아쉽고요. 목 상태가 돌아온다면 다시 노래하고 싶어요. 지금은 내가 불편하고 두려우니까 못 하고 있지만요. 노래를 언젠가 다시 잘하게 된다면 그때는 컴백할 수 있겠죠? ―가수활동을 하지 않는 지금의 삶이 행복하신가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나만의 이미지가 구축되고, 그걸 사람들이 좋아해 준다, 삼박자가 맞기가 정말 힘들거든요. 그게 되고 있어서 너무 즐겁죠. 가수를 할 때는 항상 부담이 컸어요. 나만 생각하면 안 되고 팀 멤버도 생각해야 하니까요. 내 말실수 때문에 멤버가 피해 보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요. 또 저는 방송에 나가면 긴장이 심했어요. 안 그래 보여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엑스맨’ ‘연애편지’를 찍을 때 출연 전날부터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걱정이 심했어요. 지금은 오롯이 나 자신만 신경 써도 되고,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어서 자유로워요. 일을 하면서도 내 삶을 충분히 즐기는 행복에 빠졌어요. 어떤 분들은 좋은 것만 하려는 게 욕심이라고 하세요. ‘왜 남들 생각은 안 하냐?’고 하시는데, 남을 지나치게 생각하면 내 인생은 포기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런 마음을 존중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맑은 미성으로 노래하던 ‘꽃미모’의 열여덟 소년은 청소의 이로움을 전파하는 유쾌한 마흔 둘 ‘미국 청소아저씨’가 됐습니다. 그의 데뷔무대인 1999년 ‘데이 바이 데이’ 유튜브 영상에는 요즘 들어 ‘청소광 아저씨 데뷔 무대다’라는 댓글이 달리고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아와 행복을 찾아나가는 브라이언에게 ‘전성기’라는 단어는 무색합니다. ‘꽃미남 아이돌 듀오’ 수식어가 ‘미국 청소 아저씨’로 바뀌었을 뿐,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그의 긍정 에너지는 빛을 잃지 않습니다. ―‘미국 청소 아저씨’로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으세요?워낙 깔끔하고 냄새에 민감한 이미지다 보니 저를 처음 만난 사람들이나 길에서 만난 팬들이 ‘저한테 혹시 냄새나나요?’라며 조심스러워하시는 모습을 보면 죄송하더라고요. 그래도 청소는 늘 하는 것이고, 전 청소를 하면 즐거워요. 그걸 사람들이 좋아해 주니 부담이라기보다 행운인 거죠.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온 국민들이 다 청소할 때까지 계속할 거예요.―채널A ‘금쪽상담소’에 출연하셔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고, 지나치게 예민해서 힘들다고 고백하셨잖아요. 요즘에는 좀 나아지셨나요? 어제도 3시간밖에 못 잤어요. 아침 일찍 촬영이 있어서 어제는 일찍 잠들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요.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불면증이 더 심하게 오는 것 같아요. 불안감 때문에 잠에 못 드는 거죠. 평소에도 푹 못 자고 1시간에 한 번씩은 깨요. 깨서 물 먹고, 화장실 가고, 강아지들 잘 자나 보고…. 푹 자 본 적이 없어요. 해외 나갔다가 한국 돌아와서 시차 때문에 푹 자본 적은 있는데, 그 외엔 늘 수면 패턴이 불안정했어요. 제 성격인 것 같아요. ―방송에서 13년 째 솔로라고 하셨는데… 연애나 결혼에 대한 생각도 궁금해요. 친형이 21살에 결혼해서 조카가 20살이 넘었어요. 형을 보면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지금은 나이 들어가며 혼자 있는 행복에 빠졌어요. 연예인은 매니저, 스태프, 작가, PD 등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삶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복처럼 느껴져요. 비혼주의자까진 아니지만 혼자 보내는 시간이 소중해졌어요. 만약 누군가를 만난다면요? 인생을 심각하지 않게, 재밌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유머가 있는 사람이 좋아요. 아, 그리고 무엇보다 입냄새 나면 안 돼요. 저랑 방귀는 안 텄으면 좋겠고요. 하하. ―언제 행복함을 느끼세요?일 끝나고 집에 와서 샤워하고 애쉬, 로미랑 소파에 누워있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아무것도 안 하고 편하게 있을 때, 스트레스나 두려움 없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아이들한테 키스해주고 포옹해주는 순간이 요즘의 저에겐 제일 큰 행복입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3-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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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마머리를 잘라서 수세미로 썼다고?… 일상이 코미디인 이 두 남자들[복수자들]

    ‘근면! 성실! 정진 또 정진!’을 외치는 29살 동갑내기 두 청년이 있습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그들은 대전의 작은 개그 극단에서 무료 공연을 올리며 공채 개그맨의 꿈을 꿨습니다. 당시 대학을 중퇴한 두 청년은 아르바이트해 번 돈을 모조리 개그 공연에 썼습니다. 단돈 천 원짜리 티켓이 단 한 장도 안 팔렸지만 계속 무대 위에 올랐습니다. 나란히 입대한 후에도 매일 연락을 주고받으며 개그 콩트를 짰을 정도로, 두 사람은 코미디에 진심이었습니다.2020년 초 코로나 한파가 스탠드업 코미디 업계에 불어 닥치면서 방송국마다 코미디 프로그램이 폐지되고 개그맨 공채 시험도 중단됐습니다. ‘제2의 옹달샘’을 꿈꾸던 두 남자의 꿈도 사라지나 했습니다. 한 길만 보고 달렸는데 그 길이 송두리째 사라진 겁니다. 하지만 두 남자는 ‘근면! 성실! 정진 또 정진!’했습니다. ‘길이 사라졌다면 직접 길을 내겠다’는 마음으로. 개그 극단, 아프리카tv를 거쳐 유튜브까지 뛰어들었습니다. 그랬던 두 남자, 지금은 누적 조회수 4억 회를 기록한 유튜브 채널 4개를 운영하는 핫한 ‘코미디 크리에이터’가 됐습니다. ‘매콤한 두 남자의 매콤한 일상’을 다룬 유튜브 채널 ‘핫소스’의 두 코미디언 송형주, 김선응을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https://youtu.be/T5WCnbWVb84)에서 볼 수 있습니다.―대학 중퇴까지 하며 준비했던 개그맨 공채 시험이 중단됐을 때, 어떤 심정이었나요? “일반인으로 따지면 오랫동안 공무원을 준비했는데 공무원 시험 자체가 사라진 거예요. 공채 개그맨이 되겠다는 목표 하나만을 위해서 몇 년을 노력했잖아요. 심지어 저희는 군대 있을 때도 서로 연락 주고받으면서 개그 이야기만 했어요. 군대에서도 하루에 개그 콩트 2개씩 짜면서 공채 시험을 준비했어요.”(형주)―군대에서 개그를 짰을 정도면 정말 열심이었네요. “제대한 후에는 더 열심히 했어요. 그때는 정말 돈이 정말 없었는데 같이 회의하면서 개그 짤 공간이 없는 거예요. 카페에 가도 커피값이 드니까요. 밖에서 하자니 밤에는 춥고…. 늦게까지 머물 수 있는 실내를 찾다 보니 영화관 로비에서 회의 많이 했어요. 영화도 안 먹고 팝콘도 안 먹었는데 진상이었죠.(웃음) 심야 영화가 늦게까지 하면 영화관이 새벽 3시까지 열 때도 있거든요.”(선응) “개그를 보여줄 무대가 없으니까 홍대에서 개그 버스킹도 시도해봤어요. 길거리 나가서 무작정 준비해간 개그 콩트를 선보이는 거예요. 근데 개그는 기승전결이 있다 보니, 아무리 짧은 개그여도 길거리에선 사람들이 안 보시더라고요.”(형주)대전 출신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대학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동아방송예술대학교 13학번 동기였던 둘은 ‘제2의 옹달샘’이 되겠다며 학교를 중퇴하고 코미디 공연 무대에 섰습니다. 대전의 개그 극단 ‘건전지’에서 활동할 때는 직접 티켓도 팔았습니다. ―극단 활동할 때 연봉이 5000원(?)이었다면서요. “그거 잘못된 팩트입니다. 마이너스였어요. 저희가 다른 데서 아르바이트해서 그 돈을 공연하는 데에 쏟아 부었거든요. 5000원도 못 벌었고 사실상 마이너스, 적자였어요.”(형주) “티켓 한 장이 천 원이었는데 그것도 안 팔리더라고요. 무료 공연만 했던 거죠”(선응)―극단 활동을 6개월이나 했습니다.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땐 정말 돈이 없었고 정말 가난했어요. 하루에 저한테 쓸 수 있는 돈이 1000원 정도였는데, 식당에 가면 밥이 전부 6000원인 거예요. 연애도 못했어요. 연애하면 밥도 먹고 커피도 마셔야 하는데 그럴 돈이 아예 없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제가 책임질 수 없고 행복하게 해줄 수 없었어요. 돈이 아예 없었거든요.”(선응)개그맨 공채 시험을 준비하며 활동했던 극단 생활을 접은 두 사람은 아프리카tv에서 사람들을 웃겨보겠다고 나섰습니다. 라이브 방송을 켜면 입장하는 사람들은 한두 명, 많아야 대여섯 명에 불과했습니다. 개그 극단에서 무료 공연하던 시절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tv에서의 반응도 시원치 않았습니다. “주로 라이브 방송을 하다보니까 상황극 코미디를 선호하는 저희와 잘 안 맞았어요. 또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도 찝찝했고요. 아프리카tv는 후원을 받는 시스템이잖아요. 돈 많은 사람들이 저희 라이브방송을 보시고 후원해주시면 괜찮은데, 저희 방송을 보는 분들이 주로 중·고등학생들인 거예요. 간식 먹을 거 안 사 먹고 저희 후원해주고…. 그런 것들 때문에 죄책감이 심했어요.”(선응)개그 극단, 공채 시험, 아프리카tv까지…. 연달아 실패했지만 ‘건전지’ 같은 두 남자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유튜브 채널 ‘핫소스’를 개설한 겁니다. ‘매콤한 두 남자의 매콤한 일상’의 ‘핫소스’, 지금은 잘 나가지만 처음부터 빵 떴던 것은 아닙니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 패러디, 연애 시뮬레이션 등 여러 종류의 콘텐츠를 시도했지만 조회수는 처참했습니다. 하지만 굴하지 않았습니다. 근면, 성실, 정진 또 정진했습니다. ―어쩌다 하게 된 ‘짓궂은 장난’ 콘텐츠가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그때 선응이가 되게 비싼 돈을 주고 파마를 했어요. 엄청 뽀글뽀글, 풍성한 파마였는데, 선응이가 잘 때 그 머리를 밀어버린 거예요. 밀어버린 머리를 수세미로 쓰면서 설거지하는 영상을 올렸어요. 저희끼리 하는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장난이었는데, 그게 대박이 난 거예요. 조회수가 100만이 넘었어요.”(형주) “다른 사람들은 ‘심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저희가 정말 친한 사이라 그런 장난은 매일 매일 하거든요. 장난치고, 웃고 떠드는 일상을 그대로 올린 거였는데, 좋아해주시니까 ‘이거다!’ 싶었어요.”(선응)‘100톤 곡식 창고에 친구 차 숨기기’ ‘잠든 친구 오지에 버리기’ ‘친구 앞에서 뒷담화 하기’ ‘친구 방 구석구석에 초인종 설치하기’…. 초등학생도, 중학생도, 성인이라면 더더욱 하지 않을 것 같은 유치하면서도 창의적이고 신박한 콘텐츠에 구독자들은 열광했습니다.―‘초등학생 취향 아니냐’는 의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히려 좋아요. 저희 개그가 초등학생도 보고 웃을 정도로 어렵지 않다는 거잖아요. 가볍게, 누구나, 나이에 상관없이 전 국민이 다 볼 수 있는 콘텐츠라고 생각해요.”(선응) “실제 구독자들 보면 10대 후반에서 20대, 30대 초반까지 다양합니다. 초등학생부터 어르신까지, 전 국민이 소비할 수 있는 웃긴 콘텐츠 많이 만들어보겠습니다!”(형주)‘핫소스’에서 시작한 두 사람의 ‘코미디 유니버스’는 점점 영토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구독자 참여형 콘텐츠를 올리는 ‘핫챌린지’, 먹방과 토크쇼가 공존하는 ‘핫식당’, 숏폼 콘텐츠 전용 ‘핫쇼츠’까지. 4개 채널을 합친 구독자는 219만 명에 달합니다. ―유튜브 채널을 4개 운영 중입니다. 일을 너무 많이 벌린 건 아닌가요? “후회할 때도 있어요. 너무 바쁠 때는요. 너무 바빠서 살면서 놓치고 사는 것이 하나 정도는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그런데 다른 걸 놓치는 만큼 유튜브는 놓치지 않으려고요. 예전의 저희처럼 기회가 간절한 사람들한테는 부러운 후회일 수도 있으니까요.”(선응)―한 채널에 집중하지 않고 채널을 여러 개로 나눈 이유가 궁금합니다. “구독자 맞춤형이라고 보시면 돼요. 메인 채널인 ‘핫소스’는 친구끼리 짓궂은 장난치는 콘텐츠잖아요. 저희가 장난치고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핫소스’만 구독하면 되고요. 혹시 저희가 먹방하면서 대화하는 걸 보고 싶은 사람들은 ‘핫식당’을 보면 되거든요.”(선응)“유튜브 알고리즘 때문이기도 합니다.(웃음) 하나의 채널에 특정 장르 콘텐츠만 쭉 올리는 것이 구독자, 조회수 올리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형주)―어떤 콘텐츠를 촬영할 때 가장 즐거우신가요? “‘핫챌린지’ 찍을 때 재밌어요. 구독자들이랑 함께 만들어가는 콘텐츠거든요. 구독자분들, 팬분들 만나서 대화하는 게 좋아요.”(선응) “형주팀 선응팀 나눠서 밥 사주는 콘텐츠를 촬영한 적 있었어요. ‘정총무가 쏜다’를 모티브 삼아서 촬영한 건데, 그때 구독자분이 운영하는 식당에 갔거든요. 거기서 우리 콘텐츠 사랑해주시는 구독자분들 배불리 먹이는 게 너무 뿌듯했어요. 팬들과 함께한 티키타카도 좋았고요.”(형주)―구독자는 많지만 조회수가 낮은 채널도 있습니다. ‘핫소스’는 평균 조회수 50~100만 회를 유지하는데요. 비결이 있나요? “근면, 성실, 정진 또 정진입니다.(웃음) 묘수가 따로 없어요. 될 때까지 하는 거예요. 조회수가 나올 때까지, 사람들이 웃어줄 때까지.”(형주)―방송이 아닌 유튜브에서만 활동하는 게 아쉬울 때는 없으신가요? “저희가 방송을 하다가 유튜브로 넘어온 케이스면 모르겠는데, 아예 유튜브에서 시작해서 그런지 그런 아쉬움은 없어요. 저희가 개그맨이 되고 싶었던 이유도 사람들을 웃기고, 저희를 보고 웃어주는 팬들을 만나고, 그런 거였어요. 방송에 나가지 않아도 유튜브를 통해 충분히 코미디를 하고 있고 팬들과 소통하고 있어요.”(선응) “오히려 유튜브에서 시작한 게 더 좋다고 생각해요. 이젠 저희가 하고 싶으면 그냥 하면 되잖아요. 누군가의 선택을 받거나 오디션에 합격할 필요도 없고요.”(형주)―‘코미디 크리에이터’로서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 “회사를 차리는 겁니다. 코스피에 상장할 수 있는 유튜브 콘텐츠 제작사요. 꿈이 원대하죠? 아직 시작도 못 했습니다.(웃음)”(형주) “저희는 유튜브로 팬들을 만나고 있지만 직업은 코미디언이에요. 공채 개그맨 지망 시절 가졌던 꿈과 같아요. 최고의 코미디언이 되는 겁니다.”(선응)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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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마가 편집했나 악마를 편집했나… ‘나는 솔로’ PD가 입을 열었다[복수자들]

    “‘나는 솔로’를 안 보면 대화에 못 낀다.” 과장이나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현커’(현실커플) 세 커플 탄생시킨 6기, “손 선풍기 안 가져왔어?” 한 마디로 숱한 패러디를 양산한 10기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더니, 최근 방영된 16기에서 정점을 찍었습니다. 가족과의 식사자리에서도, 직장인들의 ‘커피 타임’ 때도 ‘나는 솔로’는 가장 ‘핫’한 대화 소재였습니다. 한밤의 발레로 사랑을 고백한 영숙, 올해의 유행어 “테이프 깔까?”의 주인공 광수, 카메라와의 아이컨택을 선보인 상철 등 독보적인 캐릭터들의 향연에 이효리, NCT 도영 등 연예인들까지 ‘나는 솔로’ 팬을 자처했습니다. 16기 출연진이 방송 후일담을 전하는 유튜브 라이브 방송 시청자는 25만 명까지 치솟았습니다. ‘본방사수’라는 단어가 무색해진 시대에 “수요일 밤 10시 30분만 기다린다”는 골수팬들을 양산해낸 ‘나는 솔로’의 중심에는 남규홍 PD가 있습니다. 프로그램의 인기와 함께 남 PD도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섰습니다. ‘각본 없는 드라마’를, 배우도 아닌 일반인과 만들어가고 있는 그에게 질문들이 쏟아집니다. ‘어디서 그런 인물들을 섭외하는 것이냐’부터 ‘악마의 편집이 사실인지’, ‘인기를 견인한 출연진에 인센티브를 얼마나 지급하는지’까지 방송과 관련된 사소한 정보들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회자됩니다. 도파민 폭발시키는 출연진을 끌어모으는 남규홍 PD에게 이런 수식어가 붙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복 많은 남자.’ 놀랍게도 남 PD는 “실제로 만나보면 그들 모두 평범한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사랑’ 하나에만 집중해 농축된 감정을 터뜨리다 보면 누구나 ‘빌런’이 될 수도, ‘어쩌다 보니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평범한 남녀가 짝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 남 PD를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2011년 ‘짝’에 이어 일반인의 짝짓기 프로그램을 연이어 만드는 이유, 출연진 ‘빌런 논란’에 대한 그의 생각을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https://youtu.be/BQFoQrj_Gxg)에서 볼 수 있습니다.―최근 방영된 16기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어요. 결혼 커플 두 팀 탄생한 6기, 온갖 패러디 양산한 10기, ‘빌런’ 총집합했다는 16기 중 PD님의 ‘원픽’이 궁금합니다.제 마음속 원픽 기수는 9기라고 늘 이야기 했었는데요. 세 기수 중 고르자면 6기를 고르고 싶네요. 프로그램이 안정기에 접어든 시기이기도 하고, 출연자들도 굉장히 열심히 임해주셔서 애정이 큽니다. 같이 삽질하던 시기거든요. 어려울 때 고생을 같이 한 분들이 오래 기억에 남아요. 16기도 화제가 많이 돼서 굉장히 고맙죠. ―기수 화제성에 따라 인센티브를 지급하시잖아요. 역대급 인기를 누린 16기 인센티브에 관심도 지대해요. 200만 원 이상은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누군가는 300만 원을 가져가기도 했고요. 웬만하면 동등하게 가는 게 맞지만, 특별한 케이스에는 더 받게 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고요, 원칙은 없습니다. 출연료와 인센티브를 다들 궁금해하시는데, 돈에만 관심이 너무 치중되는 건 좀 아쉽죠.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출연료가 점점 올라가다 보면 프로그램이 망해요. 출연료를 노리고 나오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진정성이 떨어질 수 있거든요. 돈을 안 줘도 나오겠다는 각오가 있는 사람들이 프로그램에서 활약하는 케이스를 훨씬 더 많이 봤어요. 돈이 계기가 되는 순간 순수한 마음이 훼손될 수 있어요. ―이번 16기 ‘돌싱 특집’이 큰 인기를 끌었잖아요. 노년층, 성소수자, 외국인, 연예인 특집 등을 만들어달라는 시청자들 의견도 있는데, 특집 계획이 있으신가요?모솔, 돌싱 특집 외에 다른 특집편 계획은 없습니다. 일반인 출연자들도 너무 많이 밀려있어요. 특집은 ‘방송을 위한 특집’으로 끝날 것 같아서 자제하려고 합니다. 언론이나 방송계 종사자들은 웬만하면 커트하려고 해요. 진정성이 떨어질 수 있거든요. 방송인들은 마이크를 잡고 진행하려는 습성이 있어서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 나올 수 있어요. 그분들만 모은 특별편을 만들 순 있겠지만 현재로선 일반인을 우대하고 있습니다. 나는 솔로에는 ‘빌런 논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출연자 빌런 논란은 매 기수마다 불거집니다. 시청자들은 ‘이번 기수의 빌런은 누구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기도 합니다. 출연진이 아닌 남 PD가 ‘최종 빌런’이라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출연진의 경악할만한 행동들을 제작진이 유도한다는 지적입니다. 이에 대해 남 PD는 “출연진이 빌런도 아니고, 제작진이 빌런의 모습을 유도하지도 않는다”고 선을 긋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오롯이 집중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출연진 섭외에도 그리 안달하지 않는답니다. “누가 나와도 그 정도는 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편집을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았어요. 악마가 편집했다 VS 악마를 편집했다, 어느 쪽이 맞습니까?착한 악마가 편집한 거죠. 출연진 빌런 논란이 계속 있는데요, 악마는 저 하나로 족합니다. 출연진들은 실제로 만나보면 평범해요. 감정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모습들이 시청자에게 빌런처럼 보여지는 거죠. 저희가 그런 행동과 상황을 유도했다고 오해할 수 있는데, 솔로나라에 가면 누구나 다 그 정도 모습은 나온다고 봐요. 그래서 제가 캐스팅에 그렇게 안달복달 하지 않아요. 누구를 뽑아 놔도 적어도 망하지는 않거든요. ―‘빌런’이 합격 기준이 아니라면 출연진을 뽑을 때 어떤 점을 중요하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합격 팁은 뭔가요?합격과 불합격이 있는 건 아닙니다. 1, 2년 전에 인터뷰했던 분들도 출연하는 경우가 있죠. 기준선에만 통과됐다 싶은 분들은 때에 따라 이후 기수에 출연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준선에는 어떻게 통과하나요?)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분이 좋고요, 사람을 서로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니 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갖추면 좋아요. ‘내 자녀가 저 프로그램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게요. 매력도 중요해요. 조금만 대화를 해 봐도 즐겁고 재밌는 분들은 굉장히 좋은 출연자죠. 마음을 동하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인터뷰 20~30분 안에 시시콜콜 그 사람의 모든 걸 예상하거나 기대하면 안 돼요. 그냥 하늘에 맡깁니다. ―한 인터뷰에서 ‘혁명을 일으킬 만한 인물을 원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남 PD님이 생각하는 ‘혁명가’란 어떤 사람인가요? 혁명가에게는 자기희생이 필요해요. 조직이나 단체를 여러 측면에서 좋게 바꾸려는 따뜻한 마음과, 그걸 실천할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혁명가거든요. 그런 분들이 솔로나라에 오면 분명 새로운 기운이 돌죠. (16기의 혁명가는 누구였나요?) 광수님이요. 그분이 스토리에 많은 파란을 일으켰어요. 모든 사건들에 다 관여를 하면서 판을 뒤집어놓았기 때문에 혁명가 역할을 한 거죠. 광수님 소개에도 그렇게 썼습니다. ‘어쩌다 보니 주인공’. ―외모도 보시나요?외모가 뛰어난 분들이 훨씬 유리한 건 사실이에요. 그분들은 판을 흔들어놓거든요. 혁명사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제작진 입장에서 예쁘고 잘생긴 분들을 환영하는 건 당연합니다. (외모적으로 가장 혁명적이었던 출연자를 꼽는다면?) 11기 영철, 17기 옥순. ‘달걀 속 노른자위 같은 사람 마음, 기름 두르고 후라이를 해 보면 안다.’ 남 PD가 직접 적은 방송 속 글귀입니다. 달걀을 깼을 때 노른자위의 경계는 흐리멍덩하지만 후라이를 하면 노른자의 경계가 점점 선명해집니다. 사람 마음도 마찬가지라고 남 PD는 말합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는 두드러지지 않았던 인간 본성은, ‘솔로 나라’라는 기름이 부어지는 순간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솔로나라의 촌장으로서 기름 붓는 역할을 계속 하겠다고 남 PD는 말합니다. ―세 딸의 아버지이십니다. 딸이 이 중 하나의 프로그램 출연해야 한다면요? 하트시그널 vs 나는 솔로 vs 환승연애.나는 솔로에 나오는 게 좋죠. 기왕 경험할 거면 진하게 경험하는 게 좋아요. 본인들은 더 많은 걸 가져갈 수 있어요. 감정이 고농도로 농축되면 짧은 시간 안에 터질 때도 있어요. 출연진들이 전부 하는 말이 ‘솔로 나라 와서 울 줄 몰랐다’는 거예요. 그런데 한번 출연해보면 알아요. 농축된 감정들이 낯선 환경에서 폭발하는 경험을 하시게 됩니다. 감정을 터뜨리지 않으면 병이 납니다. 울고 싶으면 울어버리고 시원하게 해소해야 돼요. 감정을 그때그때 터뜨려버리면 다 해소되게 돼 있고, 그게 또 다른 에너지가 돼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어요. ―기존 연출작 짝과 나는 솔로가 일반인 매칭 프로그램이잖아요. 유사한 포맷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유가 있나요? 의도한 겁니다. 짝의 경우 굉장히 훌륭한 프로그램이 뜻하지 않게 사라진 측면도 있어요. 짝의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만 살려보자고 의도해서 만든 게 나는 솔로에요. 죽은 자식은 정말로 눈물나거든요. 제 죽은 자식인 짝을,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영리하게 살려 놓은 게 나는 솔로에요. 짝과 나는 솔로 모두 우리 시대의 사랑에 대한 자화상 역할을 합니다. 남녀가 짝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시청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거라고 기대합니다. 짝 제작진이었던 나상원 PD, 백정훈 PD와 저, 이렇게 세 사람이 닷 다시 뭉쳐 짝의 정신을 이어 받아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계속 갈 겁니다. ―남규홍에게 ‘달걀 속 노른자 위 같은 사람 마음’이란 뭔가요?제 마음이죠. 달걀 속 노른자위는 흐리멍덩해요. 구별도 안 되고 선도 애매하고 색도 애매한데 기름을 두르고 튀김을 해보면 선명하게 노란색으로 쫙 드러나거든요. ‘보통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라는 의미로 쓴 겁니다. 제 마음도 그런 마음이고요.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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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눔의 의리’ 실천하는 김보성 “의리 전파 위해 배우가 됐다”[복수자들]

    으리! 으리! 으리!두툼한 두 팔을 타이트하게 휘감은 검은 가죽점퍼,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구레나룻을 길게 늘어뜨린 이 남자. 인터뷰 시작하자마자 난데없이 ‘의리 삼창’을 외칩니다. 눈 감고 들어도 ‘으리!’를 외치는 그 남자, 누군지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겁니다. 자칭타칭 ‘의리의 사나이’ 김보성(57)입니다.과거엔 ‘콘셉트 아니냐’며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1989년 데뷔 후, 35년간 한결같은 태도로 의리를 외치고 있으니까요. 설사 콘셉트로 시작했다 할지라도 이토록 오랫동안 진지하다면 이젠 인정받아 마땅합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선 김보성 하면 의리, 의리 하면 김보성입니다. 김보성이 의리를 사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체 김보성에게 의리가 무엇이기에!〈복수자들〉이 ‘의리의 사나이’ 김보성을 직접 만났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김보성의 의리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주소를 복사해 주소창에 붙여 넣어도 됩니다. )―‘의리를 전파하기 위해 배우가 됐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의리를 인생의 신념으로 받아들이게 된 건 20대 초반이었어요. 어릴 때 죽을 고비를 많이 겪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같은 고민을 많이 했죠. 그러다 얻게 된 결론이 바로 의리였습니다. 짧은 인생, 후회 없이 의리를 지키며 살기로 결심했습니다.”―‘의리를 지킨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20대 초반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봤습니다. 영화에서 독일 장교가 ‘한 명 더 살릴 수 있었는데’ 하면서 오열하잖아요. 그 장면이 제게 큰 깨달음을 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그래서 데뷔하자마자 의리를 외치신 건가요? “배우 활동할 때도 꾸준히 방송에서 의리를 말했습니다만 진지한 어투로 의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니 모조리 편집이 되더라고요. 재미가 없었나 봐요. 그래서 작전을 바꿨죠. 다소 희화화되더라도 재밌게 의리를 외치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지 않을까. 의리에 대한 나의 의지와 신념을 전파하기 위해 더욱 효과적이지 않을까.”의리를 전파하기 위한 그의 계산(?)은 통했습니다. 김보성이 묵직한 주먹을 불끈 쥐고 ‘으리!’를 외치자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 러브콜에 쏟아지는 광고까지. 오랜 신념을 ‘효과적으로’ 전달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좋아해주기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김보성이 ‘입’으로 의리를 외치는 데에서 끝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보성은 ‘나눔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기부, 봉사 같은 공공을 위한 선행에 적극적으로 투신해왔습니다. 세월호 참사 때는 생활비 명목으로 대출받은 금액의 일부인 1000만 원을 떼어 기부했습니다. 당시 그는 세월호 합동 분향소에 찾아가 “성금을 많이 못 내서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한다. 내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게 원망스럽다”며 탄식했습니다. ―‘고작 1000만 원’이라고 하셨지만 대출받아 기부한다는 건 아무나 못 하는 일입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너무 너무 가슴이 아파서 몇 날 며칠 밤낮을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돈이 없어서 대출 받아 생활하던 때였어요. 너무 적은 액수라 부끄러웠고 더 많이 하고 싶었습니다. 소외되고 힘들고 아픈 사람들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김보성의 마음엔 능력이 부족해 더 많은 금액을 기부하지 못한 게 한(恨)으로 남았습니다. 이후로 그는 당시의 한풀이라도 하듯 ‘나눔의 의리’를 지키는 데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시각 장애인과 기아 아동을 위해 2000만 원을 기부하고, 국제구호단체 ‘월드비전’을 통해 미얀마 아동들에게 다달이 후원금을 보냈습니다.쉰 살이 되던 해에는 새로운 도전도 했습니다. 2016년 소아암 환아를 돕기 위해 종합 격투기 데뷔전을 치룬 겁니다. 경기에선 석패했지만 대전료와 입장료 전액 8000만 원을 소아암 환아를 위해 기부합니다. 뜻깊은 일을 했지만 김보성 개인에겐 시련이 닥쳤습니다. 경기 도중 안구가 함몰돼 실명 위기를 겪은 겁니다.―부상을 입으면서까지 소아암 환아 기부에 매진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봉사활동으로 만난 소아암 환아가 있었어요. 그때 그 아이와 약속했거든요. ‘우리 아기 빨리 나아서 아저씨랑 밥 같이 먹자’고요. 혼신의 힘을 다해서 경기를 치른 후에 병원을 몇 번 찾아갔어요. 근데 아이가 끝까지 저를 안 만나주는 거예요. 병세가 점점 악화되고 있었는데, 저한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거죠. 그러다 하늘나라로 떠났어요. 아이가 하늘나라로 떠나기 전날에도 엄마에게 ‘김보성 아저씨랑 약속 못 지켜서 어떡하냐’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아이가 그렇게 하늘나라로 떠나고, 장례식장에 가서 입관하는 모습도 지켜봤어요.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기부금만 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봉사활동도 하시는 거네요. “진심 어린 행동이 따르는 것, 그게 진정한 ‘나눔의 의리’입니다. 보여주기 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하는 거예요. 기부나 봉사를 특정 집단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자기들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기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건 숭고한 일입니다. 대출도, 부상도 두렵지 않았던 김보성. 감염병 앞에서도 그는 용감했습니다. 2020년 2월, 대구·경북 지역에서 코로나19 환자가 다수 발생한 시기에 직접 트럭을 몰고 가서 마스크 1만4000장을 시민들에게 직접 나눠준 겁니다.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 포옹하며 위로와 격려를 건넸습니다. ―그때도 기부만 하신 게 아니라 직접 트럭을 몰고 대구로 내려가셨습니다. “당시 대구 공기가 오염됐다는 루머까지 돌았어요. 마스크도 부족했고 대구를 격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어요. 대구 시민들이 정신이 피폐해질 정도로 너무 힘들었던 상황이었죠. 한 분 한 분 안아주고 싶었어요. 그때 마스크 나눠드리면서 ‘힘내시라’고 시민들과 포옹을 했어요. 많은 시민들이 좋아해 주셨어요. 어떤 분은 편지 써서 주시고 ‘감사하다’고 꽃도 주셨고요.”―‘나눔의 의리’를 지키려 대출도 받고 부상도 입으셨습니다. 가족들 반응은 어떤가요? “제 아내도 저처럼 대한민국 최고 의리녀입니다.(웃음) 소아암 환아 도울 땐 저 따라 직접 머리카락 잘라서 기부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든든하게 가정을 지켜주고 아이들 잘 키워주고 있고요. 제가 기부하는 것, 봉사활동 하는 것도 다 이해해줍니다. 봉사활동은 아내도 함께 나간 적도 많았어요. 한 번도 반대한 적 없고 지지해줬습니다.”이쯤 되면 김보성의 직업이 마치 ‘의리계몽운동가’인 것으로 착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본업은 배우입니다. 액션 배우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충무로에 입문해 수년간 연출부, 엑스트라, 극단 생활 등을 전전하다가 1989년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로 데뷔했습니다. 이미연의 상대역이자 주연급인 봉구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오릅니다. 1990년대만 해도 영화 ‘투캅스’ 시리즈, 드라마 ‘모래시계’ 등에 출연했지만 언제부턴가 영화, 드라마에서 ‘배우 김보성’을 보긴 어려웠습니다.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의리’를 외치는 김보성에게 예능인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배우보다 예능인 이미지가 강해졌습니다. 연기에 대한 아쉬움은 없으신가요? “예전에 한창 활동할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개그맨보다 더 웃기는 배우다.’ 사실 저는 예능에서 웃기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제가 말하는 스타일이 웃긴 건지, 상황이 웃긴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고 웃음을 준다면 저로선 감사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목마름은 아직도 많습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영화도 있습니다. 연기와의 의리도 지킬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지길! 으리! 으리!”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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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원 “안인득 방화-살인 유족에 국가가 4억 배상하라”

    조현병을 앓던 안인득(46)이 같은 아파트 주민 5명을 살해하고 17명을 다치게 한 2019년 ‘안인득 방화·살인사건’의 피해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24부(부장판사 박사랑)는 15일 ‘안인득 방화·살인사건’의 피해자이자 유가족인 원고 4인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국가는 총 4억여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딸과 어머니를 잃은 금모 씨와 금 씨의 여동생 금세은 씨 등이 2021년 11월 경찰의 안일한 대응이 참사로 이어졌다며 국가를 상대로 5억4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소송을 제기한 지 2년 만이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지난해 3월 ‘안인득 방화살인, 그 후 1068일의 기록’ 보도를 통해 이들의 피해 이후 삶과 정신적 고통, 소송을 제기하게 된 배경 등을 다룬 바 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안 씨가 범행 전 6개월간 이상행동을 보여 112에 수차례 신고됐지만 경찰의 조치가 없었던 점 등을 지적하며 “경찰이 안 씨에 대해 진단 및 보호신청을 요청하는 등 적극적으로 조치하지 않은 것은 현저하게 불합리하며 직무상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경찰이 행정입원 신청을 요청해 실제로 안 씨가 입원했다면 적어도 방화·살인을 실행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경찰의 직무상 의무 위반과 피해자의 사망·상해 간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금세은 씨는 이날 본보와의 통화에서 “승소했지만 가족을 잃은 아픔은 여전하다. 여전히 불면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린다”면서도 “이제라도 중증정신질환자를 국가가 제대로 관리해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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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원 “‘안인득 사건’ 국가 책임 인정…유족에 4억 원 배상하라”

    조현병을 앓던 안인득(46)이 주민 5명을 살해하고 17명을 다치게 한 ‘안인득 방화·살인사건’의 피해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24부(박사랑 부장판사)는 15일 ‘안인득 방화·살인사건’의 피해자이자 유가족인 금모 씨 등 원고 4인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국가는 총 4억여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딸과 어머니를 잃은 금모 씨와 아내 차모 씨, 금 씨의 누나, 금 씨의 여동생인 금세은 씨가 2021년 11월 국가를 상대로 5억4000만 원을 배상하라며 소송을 제기한 지 2년 만이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지난해 3월 ‘안인득 방화살인, 그후 1068일의 기록’ 보도를 통해 이들의 정신적 고통과 피해, 소송을 제기하게된 배경 등을 다룬 바 있다.판결문에서 재판부는 “경찰이 안 씨에 대해 진단 및 보호신청을 요청하는 등 적극적으로 조치하지 않은 것은 현저하게 불합리하며 직무상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어 정신건강복지법 조항과 경찰 내부 업무지침 등에 따라 “경찰은 정신질환이 있고 자·타해 위험성이 있다고 의심되는 대상자에 대해 행정입원 등 조치를 할 필요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또 안 씨가 2019년 4월 범행을 일으키기 전 6개월 간 이상행동을 보여 112 신고가 수차례 이뤄졌지만 경찰의 조치가 없었던 점을 지적했다. 재판부는 “경찰이 행정입원 신청을 요청해 실제로 안씨가 입원했다면 적어도 방화·살인을 실행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경찰의 직무상 의무 위반과 피해자의 사망·상해 간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인정했다.금세은 씨는 이날 본보와의 통화에서 “승소했지만 가족을 잃은 아픔과 충격은 여전하다. 아직도 불면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린다”며 “그럼에도 중증정신질환자를 국가가 제대로 관리해야 한다는 판례가 생겼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앞으로 경찰이 현장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중증정신질환자에 대한 보호조치를 해서 제2의 안인득 방화·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판결로 중증정신질환자에 대한 ‘국가책임제’ 도입이 힘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관측도 나온다. 법원에서 중증정신질환자의 입원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는 사법입원제도나, 환자 본인이 원치 않더라도 자·타해 위협이 뚜렷한 경우 환자를 병원에 호송하는 ‘비(非)자의 호송 체계’ 등이 국가책임제의 골자다. 백종우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법제이사는 “현재 우리나라의 정신건강복지법은 중증정신질환자에 대한 관리 책임을 가족에게 과도하게 지우고 있다. 비자의 입원 대부분이 가족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것도 경찰과 지자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다”라며 “이번 판결을 통해 중증정신질환자에 대한 관리와 치료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하는 ‘국가책임제’ 논의가 진척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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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혐오하던 나를 넘어섰다”… 美 런웨이 선 한국인 최초 ‘플러스사이즈’ 모델[복수자들]

    키 160cm의 NBA 역사상 최단신 선수 먹시 보그스. 아메리칸발레시어터 설립 이래 최초의 흑인 수석 무용수 미스티 코플랜드. 양손 대신 의수로 붓을 든 화가 석창우…. 이들의 공통점은 특정 직업에 대한 선입견을 깼다는 것입니다. 단신의 농구선수, 흑인 발레리나, 양손 없는 화가처럼 김지양 씨(37)도 ‘모델’이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을 깬 인물입니다. 그는 키 165cm에 70kg, 39-32-38의 신체 사이즈로 한국인 최초 미국 런웨이에 선 ‘플러스 사이즈 모델’입니다. 플러스 사이즈는 77사이즈(남성 기준 100사이즈) 이상을 뜻합니다. 여성 77사이즈, 남성 100사이즈 이상을 생산하는 기성복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의 등장은 잔잔한 호수 표면에 던져진 돌멩이와 같았습니다. 한국에서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생소했던 2010년, 그는 미국 최대 플러스 사이즈 패션위크인 ‘풀 피겨드 패션위크 LA’에서 한국인 최초로 데뷔했습니다. 살집이 있는 몸으로 런웨이를 당당하게 걷는 그의 모습은 ‘모델은 말라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그는 동양인 최초로 플러스 사이즈 모델 패션쇼 ‘캐리비안 패션위크’ 공식 홈페이지를 장식했고, 패션브랜드 ‘아메리칸어패럴’에 보낸 콘셉트 사진이 전 세계 온라인 투표에서 991명 중 8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2014년부터 플러스 사이즈 잡지 ‘66100’을 발행하기 시작했고, 같은 이름의 플러스 사이즈 의류 및 속옷을 판매하는 쇼핑몰을 창업했습니다. 수면 위 파동은 컸지만 후폭풍도 뒤따랐습니다. 잡지사들은 그에게 화보 촬영을 제안하면서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 했고, 인터뷰 기사에는 그의 외모를 비하하는 수많은 악플들이 매일같이, 아무렇지 않게 달렸습니다. 근거 없는 비방 속에서도 그가 자존감을 지킨 방법은 나 자신을 바라보고,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중턱이 평생의 콤플렉스였고, 화보 촬영 후 턱을 깎는 포토샵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운 적도 있다고 고백합니다. 겹겹이 존재했던 자기혐오와 마주한 뒤 “나는 지금 모습 그대로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은 그의 이야기를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소를 복사해 주소창에 붙여 넣어도 됩니다 https://youtu.be/0Kr9gt3byXg)―2010년 165cm에 70kg의 몸매로 미국 런웨이에 선 최초의 한국인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 주목을 받으셨어요. 지금도 같은 스펙을 유지하고 계신가요?그때보다 14kg이 더 늘었어요. 지금은 99사이즈를 입고 있습니다. ―데뷔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생소했어요. 어떻게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되기로 결심하신 건가요? 대학교에서 외식조리학을 전공하고 요식업 관련 회사에서 일하다가 여러 가지 일들이 얽혀 권고사직을 당하게 됐어요. 퇴사 후 뭘 할지 몰라서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제 길이라 생각하고 대학에서 전공한 일이 저와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당황스러웠어요. 마침 그때 포털 사이트에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 시즌1 지원자 모집 공고가 떴어요. 공고를 보는 순간 ‘이거다’ 싶었어요. 그동안 제가 살아오면서 실패하지 않을 법한 일들에만 도전해서 성취가 당연하게 주어졌는데, 모델은 실패할 것 같아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었어요. ―모델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으셨던 건가요?‘도전! 슈퍼모델 코리아’에 지원하기로 결심하고 프로필 사진 촬영을 하는데 저를 향해 터지는 조명이 너무 따뜻한 거예요. 삶에서 내가 오롯이 주인공인 순간이 별로 없는데, 카메라 앞에 서는 그 순간만큼은 제가 주인공이었어요. ‘이 순간이 오래갔으면 좋겠다’,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점점 커져서 모델에 제대로 도전해보게 됐어요. ―‘죄책감 없이 먹는 게 소원이야’라는 에세이를 내셨을 정도로 음식에 진심이세요. 먹는 것과 모델일, 두 가지가 양립하는 건 어렵다는 시선도 있어요. ‘자기관리가 귀찮아서 플러스 모델 하겠다는 것 아니냐’는 삐딱한 시선이죠.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건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라고 마음껏 먹는다는 거예요. 저희도 먹는 것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아니에요. 사이즈나 외형을 제가 에이전시나 계약한 업체에 제출한 프로필에 맞게 유지해야 하거든요. 예를 들어 제가 빨간 머리를 한 프로필 사진을 제출했으면 빨간 머리인 상태로 있어야 하고, 검게 태닝을 한 모습이면 그대로여야 하죠. 몸무게가 프로필 기준 더 쪄서도 안 되지만, 더 빠져서도 안 되고요. 모델이란 직업이 가지는 특수성은 플러스 사이즈 모델에게도 그대로 적용돼요. 또 우선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처음 등장한 이유는 기성복 사이즈 이상을 입는 사람들도 모델이 착용한 옷을 보고 제대로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고르게 해주자는 것이었어요. 모델이 무조건 마르기만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선입견인 거죠. 모델은 엄청 소식을 하거나, 아예 먹지 않는데 그런 극단적인 식단이 맞는지, 지속 가능한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어요. 베르사체는 2020년 베르사체 역사상 처음으로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세 명이나 런웨이에 올려 화제가 됐습니다. 2021년 샤넬 런웨이 쇼에는 네덜란드 출신 플러스 사이즈 모델 질 코틀레브가 당당한 워킹으로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습니다. 포용과 평등, 신체적 다양성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한국은 조금 더딥니다. 여전히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기용하는 브랜드는 거의 없고, 런웨이에도 마른 모델이 대부분 섭니다. 일감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때론 부당한 처우도 참아내야 합니다. ―남성 잡지 맥심에서 2021년부터 ‘플러스 사이즈 모델 콘테스트’를 열고 있어요. 기존에 열던 ‘미스 맥심 콘테스트’보다 의상의 노출 수위가 훨씬 높아 뚱뚱한 여성들을 성적 대상화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적 시선도 있는데, 어떻게 보셨나요?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문제는 오랜 시간 설전을 펼쳐왔던 주제잖아요. 몸집이 큰 여성을 대상화하는 건 여성에 대한 혐오, 뚱뚱한 사람에 대한 혐오 등 다양한 혐오들이 중첩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맥심의 플러스 사이즈 모델 콘테스트는 미디어가 뚱뚱한 여성을 어떻게 소비하고자 하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에요. 하지만 플러스 사이즈 모델의 일감이 정말 적기 때문에 어떤 기회라도 있다면 잡아야 하는 게 현실이죠. 그래서 콘테스트에 나가는 분들을 제가 비난할 순 없을 것 같아요. ―맥심과 같은 남성 잡지의 화보 제안을 받은 적이 있나요?플레이보이코리아에서 제안했지만 거절했어요. 당시엔 돈을 준단 말을 안 한 게 가장 큰 이유였어요. 이건 제가 굉장히 오랫동안 겪어온 일이에요. 절 모델로 쓰고는 싶은데 돈을 주긴 싫은 거죠. 그런 경우 인터뷰 명목으로 절 부르고, 풀 메이크업을 시켜서 촬영을 해요. 결과물은 두 페이지짜리 화보고, 인터뷰는 아주 작게 나가죠. 일에 합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상황을 10년 넘게 겪어왔어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은 대부분 쇼핑몰을 열어서 모델을 하거나, 수요가 비교적 많은 해외에서 활동하려는 분들도 있어요.―플러스 사이즈 모델에게도 요구되는 기준이 궁금해요.‘누가 더 예쁘게 살쪘는가’에 대한 소리 없는 경쟁이 있긴 해요. 허리가 가늘고 가슴과 엉덩이가 큰, ‘커비(Curvy)’한 몸매를 선호하죠. 결국 마른 모델을 뻥튀기해 놓은 체형이에요. 그래서 볼륨감을 키우기 위해 가슴과 엉덩이 확대 수술을 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 자체도 문제라고 생각해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은 기성복보다 더 큰 체형의 사람들도 자신의 신체와 잘 맞는 옷을 이미지로 보고 구매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해야 하는데, 플러스 사이즈 모델조차 현실에 없는 몸매의 기준에 또 다시 맞춰지는 거죠.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향한 혐오의 시선과 악플들, 적은 일감으로 인한 생활고까지 겹치면서 우울증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아무리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라도 얼굴은 갸름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변 권유에 보톡스를 맞을까 고민한 적도 있습니다. 주변의 기준에 나를 맞추는 것이 맞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나’를 회피하지 않고 마주한 결과 그는 영원하지 않을 미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 활동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최근에 조울증 약을 먹고 있어요. 너무 오랜 기간 일에만 매몰돼 지냈던 것 같아요. 독립출판물 출간이 돈을 많이 버는 일이 아니다보니 5년 정도 잡지를 끌어오면서 많이 지쳤어요. 쇼핑몰을 운영하게 된 것도 힘들었어요. 주변에서 ‘너 모델 된 것도 쇼핑몰 해서 돈 벌려고 그러는 거지?’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죽어도 쇼핑몰만은 하지 않겠어’라고 생각했는데, (경제적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내몰리듯 시작했거든요. 악플에도 많이 시달렸어요. 여러 가지가 겹치면서 조울증이 찾아온 것 같아요. ―가장 상처가 됐던 악플은 뭔가요? ‘김지양은 허언증 환자’라는 악플이요. 길거리에서 헌팅을 당한 적이 있는데 너무 불쾌했어요. 싫다고 분명하게 거절했는데 계속 따라왔거든요. ‘싫다면 싫은 것이다’라고 SNS에 글을 올렸는데, ‘김지양은 허언증 환자다, 저렇게 뚱뚱한 여자를 누가 헌팅하느냐’라는 악플이 달렸어요. 가 남편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있지도 않은 남편을 있다고 거짓말한다’는 악플도 정말 황당했죠.―모델을 꿈꿨지만 자금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쇼핑몰을 창업하셨어요. 지금도 쇼핑몰을 운영하는 게 힘드신가요? 지금은 굉장히 만족해요. 쇼핑몰 ‘66100’은 여성 66사이즈, 남성 100사이즈를 의미해요. 기성복에서 ‘라지’에 해당하는 사이즈죠. 그 이상의 사이즈를 영캐주얼이라 보통 부르는 브랜드들에서 제작하지 않아요. 그래서 66100은 ‘66 사이즈, 100사이즈 사이즈를 넘어서는 당신의 무한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저희 쇼핑몰을 이용해본 고객들은 “여기 절대 망하면 안 돼요. 여기 말고는 바지 살 곳이 없어요”라고 말씀하세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힘이 나요. 속옷도 마찬가지예요. 패드와 와이어를 없앤 속옷 상의 ‘브라렛’을 처음으로 만들었고, 허리 40인치 이상인 분들도 입을 수 있는 팬티를 만들고 있어요. 기성복 사이즈 기준으로 105, 110까지만 나오는데 저희는 130까지 커버합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있나요?이중턱에 굉장히 큰 콤플렉스를 오랫동안 갖고 있었어요. 스스로에게 ‘괜찮아’라고 말해 준 지 얼마 안 됐어요. 자신의 몸에 대한 콤플렉스에 대해 곰곰이 따져 보면 그 안에 내재된 자기혐오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올해 초 발간된 ‘엉엉 우는 법을 잊은 나에게’를 쓰면서 많이 생각을 정리했어요. 출판사와 계약을 하고 5년 간 원고를 못 보냈어요. 출판사는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의 이야기를 바랐는데 저는 나 자신조차 건사하기 힘들어서 휘청대고 있었거든요. 그 때 자기혐오와 마주하는 시간을 가졌고, 고민의 시간을 지나 작년쯤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굴은 갸름해야 하지 않겠냐’라며 보톡스를 맞아 보라고 제안한 분도 있었어요. 보톡스는 영원하지 않아요.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에 중독됐을 때 문제가 되는 거죠. 내가 평생을 유지할 수 없는 것에 일시적인 만족감을 가지면서 살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스스로 사랑해 줄지는 개인의 선택이겠죠. ‘누군가의 말 때문에 이중턱을 이렇게 까지나 미워하고 싫어했다면, 이제 그걸 버릴 때도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은 열심히 이중턱과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김지양에게 ‘사이즈’란 어떤 의미인가요? ‘극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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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자 키 158은 말이 안된다”는 말에 마음 굳혔다…작은 키의 광대 일오팔[복수자들]

    ‘키 작다’가 칭찬이 되는 그날까지어느 유튜버 소개글에 나온 문구입니다. 이 유튜버 이름은 ‘일오팔’. ‘성은 일, 이름이 오팔’은 당연히 아닙니다. ‘일오팔’의 본명은 이명재(27·남). 육군 병장으로 만기전역한 그는 대한민국의 건장한 청년입니다. 그가 ‘일오팔’이란 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키가 158cm이기 때문입니다.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작았던 그는 중학교 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의사에게 “더는 못 큰다”는 진단을 받은 겁니다. 갓 중학생이 된 아들의 키가 더 크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미안하다”며 울먹였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은 어린 아들의 마음에 오랫동안 남았습니다. “자기연민에 빠져 스스로 초라한 인간이 되지 말고 보란 듯이 살아 보겠다”고 독하게 마음 먹는 계기가 됩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그의 키는 여전히 158cm입니다. 하지만 ‘작은 키’를 개성으로 내세워 47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됐습니다. ‘키 작다’가 칭찬이 되는 그날을 위해 고군분투 중인 유튜브 크리에이터 일오팔을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그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주소를 복사해 주소창에 붙여 넣어도 됩니다 )―유튜브 채널 슬로건(‘키 작다’가 칭찬이 되는 그날까지)이 인상적입니다.“그런 날이 오겠냐며 어떤 사람은 비웃을지 몰라도 적어도 저는 진심입니다.(웃음) 사실 연예계에도 작은 키로 활동하는 분들이 저 말고도 굉장히 많잖아요. 그분들 활동을 보면서 저도 응원을 받았던 것처럼, 저도 누군가에겐 그런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165cm, 170cm 정도만 됐어도’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은 없으신가요?“거짓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저는 어중간하게 작을 바에 아예 확 작은 게 낫다고 생각해요. 시장 논리로 따져보면 희소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키 작은 남자들 사이에서 저처럼 확 작은 사람이 오히려 경쟁력이 있지 않나.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일오팔은 스스로 ‘광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일까 개그맨, 연예인, 유튜버 보다는 ‘광대’라는 단어가 일오팔에게 더욱 맞는 옷처럼 느껴집니다. 일오팔의 콘텐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탕후루, 마라탕 등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김한강 시리즈’와 키작남(키 작은 남자)이 겪는 생활 속 애환을 담은 ‘일오팔 시리즈’. 2~3분 남짓 짧은 콩트에서 다양한 상황에 처한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영상에서 일오팔은 화려하고 잘난 사람이기보다는 조금은 부족하고 찌질한 사람이 됩니다. ―일오팔을 두고 ‘찌질 미(美)’가 있다고들 합니다. “처음 유튜브 시작할 땐 다양한 시도를 해봤어요. 근데 팬들이 저의 불쌍하고 우울해하는 표정을 특히 좋아해주시더라고요. 우울한 표정 연기를 하려면 어떤 캐릭터가 좋을까 고민한 끝에 ‘김한강’ 캐릭터가 탄생한 거예요.”―리얼리티 보다는 연기 콘텐츠가 많은 편입니다. “원래는 정통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셰익스피어 희곡도 다 읽고 연구를 많이 했거든요. 유튜브 시작하면서도 연기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그러다 ‘김한강’ 캐릭터를 만들었고 다양한 상황극을 보여줄 수 있게 됐죠. 언젠가 정극 연기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찌질하고 처량하고 불쌍한 캐릭터, 저한테 익숙한 역할이요.”―광대가 되고 나서 가장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면요?“제 영상을 보고 팬들이 응원을 많이 보내주세요. 그 중에서도 키가 작은 친구들이 저를 보면서 힘을 많이 얻는다고 메시지를 보내실 때가 있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정말 광대하기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저도 그 친구들 메시지가 진심으로 와닿고 감사하고 또 힘을 얻게 되거든요.한 번은 길거리에서 저보다 작은 남자 분(154cm)이 오셔서 ‘작은 키 때문에 힘들다’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제 영상을 보던 분이셨어요. 처음 만나는 사이였지만 진심을 터놓고 대화했어요. 표정이 밝아지시는 걸 보고 저도 한참동안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작은 키’는 누군가에겐 콤플렉스일 수 있습니다. 일오팔도 처음부터 ‘키 작다’는 말이 듣기 편했던 건 아닙니다. 악의 없이 던지는 말에 상처를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학창시절 때 놀림을 많이 받으셨다고 들었어요.“초등학교, 중학교 때까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친구들도 정말 많이 놀렸고요. 누군가 악의를 갖고 심하게 괴롭혔다기보다는 ‘키 작다’며 일상적으로 놀림을 받다보니까 지속적인 데미지가 오는 거예요. 별 생각 없이 던지는 말들이 축적되다보니 상처가 되더라고요.”―지금은 오히려 ‘작은 키’를 전면에 드러내는 콘텐츠를 만들잖아요. 계기가 있었나요?“중학교 때 친구들은 저를 두고 이렇게 말했어요. ‘쟤 진짜 웃긴 애다’ ‘쟤 키는 작은데 웃기긴 진짜 웃기다’ 친구들 사이에서 ‘웃긴 애’로 통하는 게 자연스러워지면서 중학교 졸업할 때쯤 스스로 결심했어요. ‘나는 광대해야겠다’고요.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어요. 유튜브도 고등학교 친구가 먼저 제안한 건데, 그 친구가 지금은 채널 ‘일오팔’의 PD를 하고 있어요. 친구가 유튜브하자면서 해준 말이 저한테 엄청 꽂혔거든요. 대놓고 이랬어요.” 남자 키 158cm은 진짜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너 유튜브 해야 된다.―얼핏 들으면 기분이 나쁠 만한 말인데요.“물론 기분 나쁘게 들을 수 있는데 전 아니었어요. 그 한 마디에 제가 완전 설득이 되어버린 거예요. 솔직히 제 키가 어중간하게 작은 것도 아니고 아주 확 작잖아요. 그게 약점이 아니라 개성이자 캐릭터, 강점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거죠.”―한국 여성 평균(161cm)보다 키가 작은 건데 연애할 때 고충은 없나요?“남들 하는 만큼 해왔습니다.(웃음) 연애 경험은 10회 정도 되는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모습을 멀리서 실루엣으로 보면 키도 몸집도 작아서 왜소하잖아요. 근데 가까이에서 앉아서 대화하면 ‘작아 보이지 않는다’면서 반전 매력이 있다고 해주시더라고요. 아무래도 자신감이 작은 키를 보정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감을 갖게 되면 성격도 좋아집니다.”―주눅 들거나 위축되는 법 없이 항상 이성 앞에선 당당한 편인가요?“물론 저보다 5cm 이상 크신 분들은 조금 부담스럽긴 합니다. 비 오면 우산을 같이 쓸 때가 있는데, 제가 우산을 들면 (저보다 키 큰) 여자분들 눈을 자꾸 찌른다고 하더라고요.(웃음) 물리적인 한계 때문에 멀어지는 것 말고는 연애에 있어서 키는 전혀 문제가 되진 않습니다!”유튜브 채널 ‘일오팔’은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채널 개설 2년여 만에 구독자 45만 7000명을 달성했습니다. 주력 콘텐츠인 쇼츠(60초 이하 유튜브 영상) 최고 조회수는 7045만 회를 찍었습니다. 최근엔 곽튜브, 빠니보틀 등 인기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다수 소속된 샌드박스로 소속사를 옮기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입니다.―부모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실 것 같습니다.“저번 명절 때 부모님 뵀는데 너무 기뻐하시더라고요. 최근엔 할머니랑 손잡고 걸어가는데 저를 거리에서 알아봐주시는 분이 계셨어요. 사실 할머니께 제 직업(유튜브 크리에이터)을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거든요. 근데 길거리에서 팬들이 알아봐주시니까 할머니도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저도 무척 기뻤습니다.”―꿈이 있다면요? “거창한 꿈은 없어요. ‘키 작다’가 칭찬이 되는 그날까지. 지금처럼 열심히, 잘 살아보겠습니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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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플, 조롱 보란 듯이 나만의 길을 갈 것” 13년 만에 타이푼 컴백한 솔비[복수자들]

    ‘작가 권지안’이 ‘가수 솔비’로 돌아왔습니다. 2012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021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국제 아트페어에서 대상을 수상하기까지. 지난 10여년 간 화가로 살았고 인정받은 그가 타이푼(TYPHOON)의 두 멤버와 13년 만에 신곡을 발표한 겁니다. 노래 제목은 ‘왜 이러는 걸까’. 최근 ‘복면가왕’에 출연해 화제가 된 타이푼 멤버 우재와 함께 부른 듀엣곡입니다. 2006년 결성된 3인조 혼성그룹 ‘타이푼’은 활동 4년여 만인 2010년 1월 해체된 그룹입니다. 타이푼이 해체됐을 무렵 그는 활동명 솔비를 잠시 접어두고 자신의 본명인 권지안으로 돌아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악성 루머와 댓글로 우울증을 앓던 그가 치료 목적으로 그림을 시작한 겁니다. 치료를 넘어 창작의 세계로 넘어온 그는 2012년 첫 개인전을 열게 됩니다. ‘전업 화가’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그를 두고 일각에선 가수 활동을 아예 접는 게 아니냐는 추측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작가 권지안만큼이나 가수 솔비도 놓치고 싶지 않은 소중한 나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음악과 미술을 결합한 ‘셀프 컬래버레이션’ 같이, 가수와 화가를 모두 경험한 그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작가 권지안’ 그리고 ‘가수 솔비’를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2006년 타이푼의 리더이자 메인보컬로 데뷔해 연예계에서 겪은 경험담과 “사과는 그릴 줄 아냐”며 질투 섞인 비난 세례에도 불구하고 작품 하나로 세계 미술계에서 인정받은 이야기까지.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그의 이야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채널 ‘기웃기웃’은 여기로 접속하면 됩니다. https://youtu.be/qkzYPq9J9Uk 네이버에선 주소를 복사해 주소창에 붙여 넣으면 됩니다.)―13년 만의 타이푼 신곡으로 컴백 소감이 궁금합니다. “2010년 타이푼 해체되고 한참 뒤인 2017년에 ‘그래서…’와 ‘우하하’라는 곡으로 리메이크 앨범을 낸 적이 있어요. 그걸 듣고 거북이 선배님의 ‘비행기’를 제작하신 분이 저희한테 제안해주셨죠. 타이푼이 거북이의 노래 ‘비행기’를 불렀으면 좋겠다고요. 흔쾌히 제안에 응했어요. 거북이 선배님들에 대한 저희 기억이 엄청 좋았고요. ‘비행기’는 터틀맨(故 임성훈) 선배님의 훌륭한 업적이기도 해서 타이푼 스타일로 밝게 부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비행기’ 리메이크 작업을 계기로 멤버들이 다시 뭉치게 됐어요. 우리 이렇게 끝내지 말고 신곡도 내보자고요. 13년 만에 나온 신곡이에요. 제목은 ‘왜 이러는 걸까’입니다.”―이전의 타이푼 곡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신곡 작업할 때 멤버들끼리 한 이야기가 있어요. 원래 우리가 했던 신나는 댄스곡 말고 다른 스타일의 노래를 해보자고요. 따뜻한 가을에 어울리는, 사랑이 넘치는 설레는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우재(타이푼 리드보컬)씨가 ‘복면가왕’에 출연해서 좋은 결과를 얻으면서 컴백 타이밍도 좋았어요. 우재 씨가 가창력이 굉장히 좋거든요. ‘복면가왕’을 통해서 우재 씨의 가창력이 널리 알려진 것 같아 너무 기뻤어요.”―올해는 ‘작가 권지안’이 아닌 ‘가수 솔비’로만 활동하시는 건가요? “올해는 미술 분야에선 안식년을 갖고 있어요. 10년 동안 작가로서 그림을 그려오면서 한 번 쉬어가는 것도 필요하다고 느꼈거든요. 새로운 작업을 위해선 다른 에너지도 필요하잖아요. 올해는 특히 음악에만 집중해보고 싶어서 ‘왜 이러는 걸까’ 다음으로 준비하는 음반도 있어요.”―솔로 음반인가요? “가수 알리 씨랑 함께 작업한 곡이에요. 최근 알리 씨랑 이탈리아, 스위스 여행을 다녀왔거든요. 그곳에서 영감을 받아서 제가 작사하고 알리 씨가 음악을 만들었어요. 11월 공개 예정이에요. 제목은 ‘에스프레소 마티니’입니다. 제가 ‘에스프레소 마티니’라는 칵테일을 되게 좋아하는데, 거기에서 영감을 받아 가사를 썼어요.”솔비는 가수 타이푼의 메인 보컬로 2006년 연예계 데뷔했습니다. 우재, 지환과 함께 3인조 혼성그룹으로 데뷔했지만 대중의 주목을 받은 건 솔비였습니다. 엉뚱하고 솔직한 캐릭터로 각종 예능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치며 솔비는 단박에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다보니 타이푼의 다른 멤버들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게 됩니다. 활동 스케줄, 수익 등 멤버들 간 격차는 자연스럽게 그룹 해체로 이어졌습니다.―타이푼 활동 시절 다른 멤버들보다 큰 인기를 누렸어요. “활동할 당시 제가 너무 바빴어요. 솔로 활동이 너무 많아지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타이푼 활동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죠. 제가 자발적으로 팀을 나온 건 아니었어요. 개인 활동이 많아지고 수익이 커지니까 회사에서 자연스럽게 분리한 거였죠.”―타이푼 해체 후 멤버들과는 어떻게 지냈나요? “가족 같았던 사이였어요. 팀이라는 게 비즈니스 관계라고 하지만 멤버들은 나의 모든 걸 다 알고, 그 사람의 모든 걸 다 알잖아요. 어쩌면 가족보다 가깝기 때문에 서운한 게 많을 수 있고요. 가족처럼 느끼기 때문에 험한 말이 오갈 수도 있는데 그러면서도 사이가 좋았어요. 우재, 지환 모두 저보다 동생인데 누나누나 하면서 잘 따랐고요.”―불화는 없었나요? “싸운 적도 많았죠.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멤버들의 문제라기보단 당시 매니저의 문제였죠. 그땐 혈기 왕성한 20대 초반이었잖아요. 한창 예쁠 때였고 연애도 하고 싶었고요. 그러다 보니까 매니저가 멤버들한테 ‘솔비 누나를 감시해라’고 시킨 거예요. 제가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매니저는 걱정되니까 그랬던 건데…. 제 입장에선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기분이 나빴어요. 그걸 시킨다고 또 하냐면서(웃음).”‘가수 솔비’는 각종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화면 속 솔비의 이미지는 이랬습니다. 엉뚱하고 솔직하지만 백치미를 지닌 미녀. 솔비의 이런 캐릭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방송에선 그런 이미지로만 그를 다뤘습니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많은 연예인이 그렇듯, 솔비 역시 악성 댓글과 루머에 시달리게 됩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위기였습니다. 그는 치료를 받아야 하는 수준의 우울증을 앓게 됩니다. 타이푼 해체 후 방송활동을 줄인 그는 우울증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미술을 접하게 됩니다. 처음엔 내면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미술이 지금은 그의 일부이자 전부가 됐습니다. 10년 만에 ‘가수 솔비’는 ‘작가 권지안’이란 호칭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 됐습니다. ―‘가수 솔비’와 ‘작가 권지안’. 본인과 더 닮은 자아는요? “솔비는 입혀지고 포장된 캐릭터에 가까워요. 사회에서 생성되는 인격이 있고 원래의 내가 가진 천성이 있잖아요. 실제의 저는 내성적이고 진지할 때도 많아요. 하지만 ‘방송인 솔비’는 어쨌든 시청자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줘야 하잖아요. ‘가수 솔비’는 무대에서 화려해야 하고요. 그런 의무감 때문에 특정 이미지가 강조되어서 가끔 지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작가 권지안’은 원래의 제 모습을 전부 포용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내성적이고 진지하지만 재밌거나 화려할 때도 있고요. ‘본래의 나’라는 편안함이 ‘작가 권지안’일 때 더 느껴지는 것 같아요.”‘미술계 완판녀’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작가 권지안’의 작품은 컬렉터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작품의 낙찰가는 수백만 원부터 수천만 원대를 호가합니다. 최고가를 기록한 것은 ‘플라워 프롬 해븐’(Flower From Heaven)입니다. 2022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71회 경합 끝에 2010만 원에 낙찰됐습니다. 추정가였던 400만 원의 5배 수준이었습니다. ―‘플라워 프롬 해븐’은 어떤 작품인가요? “개인적인 의미가 큰 작품이에요. 2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아버지를 추모하려고 ‘플라워 프롬 헤븐’이라는 음악을 만들고 가사를 쓰려고 했어요. 근데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을 대신할 수 있는 단어가 없는 거예요. 가사를 다 지우고 허밍으로 노래를 했어요. 허밍으로 부른 ‘플라워 프롬 헤븐’을 모티브로 그린 그림이에요. 이 그림에 스피커를 심어뒀는데, 그 안에 허밍 음악을 담았어요. 그림 낙찰받은 사람만 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거죠.”―어떤 음악인지 궁금합니다. “그림을 낙찰 받은 분께 음악 공개 여부를 결정할 권한이 있어요. 근데 그분께서 결국 음악을 공개하지 않으셨어요. 그분이 공개하지 않는 한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웃음)”―그림을 사는 분들을 위해 늘 기도하신다면서요. “저는 힘들고 우울하고 심리적으로 불안정할 때 미술을 선물처럼 만났거든요. 제가 그림을 통해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고 잘 극복했듯이 제 그림을 보는 분들도 치유의 에너지가 전달됐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그림을 구입해서 집에 걸어둔다는 건 마치 가족이 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내 공간에 누군가 들어와서 같이 사는 거잖아요. 그래서 누군가의 공간에 걸리든 제 그림이 행운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죠.”―‘작가 권지안’의 창작 동력은 긍정적 에너지인가요? “제 작품들 중 상처에 대한 표현을 담아낸 작업도 있지만 그럼에도 전 항상 긍정을 담으려고 해요. 왜냐하면 내가 미술을 통해서 극복했고 희망을 갖게 됐기 때문이에요. 미술뿐 아니라 삶도 그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갖기 위해 살아가는 거잖아요.”긍정과 희망을 그리고 싶다는 ‘작가 권지안’에겐 그의 작품세계를 폄하하는 말이 뒤따랐습니다. “사과는 그릴 줄 아냐”부터 시작해 ‘고등학교 입시 미술 같다’ ‘미대 신입생 수준이다’ ‘연예인 프리미엄 아니냐’ 같은 자극적인 말들이 쏟아집니다. 대부분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그가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주목을 받는다는 주장들이었습니다. 2021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국제 아트페어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을 두고도 갑론을박이 이어졌습니다. ‘가수 솔비’에게 쏟아졌던 악성 댓글이 이젠 ‘작가 권지안’을 향한 비난으로 바뀐 것입니다.―‘작가 권지안’을 향한 조롱과 폄하가 ‘가수 솔비’에 대한 악성 댓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평이라는 건, 작가를 분석하고 그 작가에 대해 작가의 세계를 정확하게 안 다음에라야 제대로 할 수 있는 거예요. 저에 대해 분석도 않고 시류에 한두 마디 보태는 건 농담 따먹기 수준이라고 생각해요. 처음엔 화가 났다기보다는 평론하시는 분이 방송에 나와서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계실까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평론가는 평론할 때, 방송인은 방송할 때, 화가는 그림 그릴 때 멋있어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다면 받아들일 가치가 있나요?”―본인 작품에 대한 비평 중에 와 닿았던 것도 있나요? “웬만한 비판적인 시각에 대해선 정말 흥미롭게 봐요. 왜냐하면 작가가 자기 세계에 빠져서 깊은 골로 들어갈 때가 더 문제거든요. 이걸 객관적인 눈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해요. 그걸 가능하게 하는 비평은 작가에게 좋은 재료이고 좋은 자극이에요.”―‘연예인 프리미엄’이라는 의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연예인이니까 프리미엄 붙는다’ ‘연예인 작품이니까 사는 거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실제로 돈을 주고 그림을 사 갈 때는 연예인이라서 사는 분은 없다고 생각해요. 저의 가수, 연예인으로서의 커리어와 저의 작품 가치는 별개라고 생각해요.”‘직업화가’가 된 후부터 그에겐 스스로 세운 원칙이 있습니다. 작품 판매 수익금의 10%를 기부하겠다는 것. 특히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영·유아 양육 보호시설 경동원과는 2014년 인연을 맺은 후 지금까지도 봉사활동과 기부를 해오고 있습니다. ―미술을 통해 다른 이를 돕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저는 미술을 통해서 치유를 받았잖아요. 제가 받은 긍정, 치유의 에너지를 나누고 싶은 거죠. 제게 있어 미술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아니에요. 저는 미술로 인생 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인내력이나 다양한 생각과 시야. 미술의 재료를 찾기 위해 자전적인 탐구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이요. 미술을 통해서 조금씩 세상을 알아가고 있어요.”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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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추행 누명 쓰고 아이돌 떠난 이 사람, 해병대서 ‘무적’이 되어 돌아왔다[복수자들]

    아이돌에게 ‘연애’와 ‘결혼’은 금기 중 하나입니다. 성인 간의 사랑이 지탄의 대상이 되는 건 가혹하다는 시선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돌에게 실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이미지입니다. 열애설은 아이돌이 구축해 온 판타지를 한 순간에 무너뜨립니다. 나이가 서른 살에 가까운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결혼 소식을 알릴 때 팬들에게 장문의 손편지를 통해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 결혼을 하거나 열애설이 터진 멤버의 탈퇴를 팬들이 나서서 요구하기도 합니다. 엑소의 첸, 하이라이트의 손동운, 아이콘의 바비 모두 비슷한 길을 걸었습니다. 아이돌 밴드 ‘엔플라잉’ 멤버였던 권광진(31)도 금기를 깬 아이돌 중 한 명입니다. FT아일랜드, 씨엔블루를 배출하며 아이돌 밴드 명가로 불렸던 FNC엔터테인먼트의 기대주 엔플라잉으로 2015년 데뷔한 그는 2018년 팬과의 교제로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가 팬미팅에서 팬을 성추행했다는 루머가 SNS에 퍼졌습니다. 당시 소속사는 “팬과의 교제가 사실로 확인돼 권광진의 탈퇴를 결정”했고, “성추행 의혹에 대해서는 정확한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추문에 휩싸인 채 팀을 떠났던 권광진이 탈퇴 5년 만에 입을 열었습니다. “당시엔 여자친구의 존재를 떳떳하게 인정하지 못했다”는 그는 열애설 상대였던 팬과 지난해 결혼했습니다. 성추행 루머를 퍼뜨렸던 이들은 2021년 허위사실 유포로 민·형사상 처분을 받았습니다. 탈퇴 후 해병대에 입대한 그는 제대한 뒤 해병대 콘텐츠를 다루는 유튜브 ‘무적권’을 만들어 ‘군튜버’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구독자 11만 명을 넘기며 인기를 끌고 있는 그를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아이돌의 연애에 대한 그의 생각을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18년 9월 엔플라잉 탈퇴 후 첫 인터뷰에요. 팬과의 교제로 소속사에서 퇴출당하신건데, 그 팬과 지난해 결혼을 하셨다고요. 당시 여자친구였던 지금 아내가 버스 정류장에 제 생일 축하 광고판을 걸었어요. 저도 그걸 보려고 갔다가 현장에 있던 아내와 우연히 마주쳤어요. 광고를 걸고 현장에 와서 챙기는 게 고마워서 제가 번호를 물어봤어요. 예뻐서 반한 것도 있고요(웃음). 연락을 주고받다가 사귀게 됐죠. 교제가 발단이 돼 팀은 탈퇴했지만, 이 친구는 제가 끝까지 책임졌습니다. 지난해 결혼을 했거든요. 처음 팬과 사귄다는 소문이 퍼져서 소속사가 맞느냐고 확인을 했을 때는 “안 사귄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아이돌은 연애를 하면 안 된다는 사상교육을 연습생 때부터 받아서 저도 모르게 방어기제가 발동했어요. 결국 교제 사실이 드러나서 소속사가 탈퇴를 결정했죠. 거짓말을 한 건 아직도 반성하고 있습니다. ―성추행 의혹도 있었어요. 허위사실 유포자들을 고소했고, 2021년 유포자들이 형사상 처벌, 민사상 배상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 때 심정이 어떠셨나요? 아이돌 시절을 통틀어 성추행 루머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어요. 제가 하지도 않은 짓으로 비난의 대상이 됐으니까요. 제가 성추행했다는 글을 SNS에 올린 사람이 제 아내와 같이 엔플라잉 팬 활동을 하던 친구였어요. 여자친구가 저와 사귄다고 하니 질투가 났는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지어내서 글을 올렸더라고요. 허위사실이었기 때문에 저는 경찰에 입건조차 되지 않았고요, 저는 처음 글을 올린 사람과 악플러들을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했습니다. 형법상 유죄 판결을 받았고, 민사상 손해배상을 물었어요. 4년여 만에 제가 무고하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2006년 15살의 어린 나이에 FNC에 입사해 10년 가까이 연습생 생활을 했습니다. 정용화, 강민혁, 이종현과 함께 씨엔블루의 데뷔 멤버로 확정돼 일본에서 앨범을 내고 활동했지만, 한국 데뷔 직전 팀 색깔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의 자리를 이정신이 대체했습니다. 한 차례 데뷔의 고배를 마신 뒤 2015년 엔플라잉으로 데뷔했지만 2018년 성추문으로 퇴출당했습니다. 10대와 20대를 바친 10여 년의 연습생 기간에 비해 아이돌로 활동한 기간은 턱 없이 짧았습니다. ―탈퇴 후 멤버들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멤버들과 종종 연락을 하고 지내다가 3년 전부터는 연락이 두절됐어요. 회사에서는 저와 멤버들이 교류를 한다는 게 사업적으로 안 좋을 거고, 팬들도 저와 멤버들이 연락하는 것을 싫어해서 자연스럽게 끊겼어요. 제가 탈퇴한 직후에 엔플라잉이 ‘옥탑방’으로 음원차트와 가요 프로그램에서 데뷔 후 처음으로 1위를 해서 정말 기뻤어요. 축하글을 제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팬들에게 항의 메시지가 오더라고요. 안 좋은 이유로 탈퇴했으니 더 이상 멤버들과 엮이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겠죠. 그래서 글을 바로 내렸어요. ―멤버들과 오랜 기간 연습생 생활을 같이 한 가족 같은 관계였을 텐데요. 초반엔 가족 같은 관계이다가 점점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바뀌기 시작했어요. 사내정치를 해야 하는 이유가 가장 컸던 것 같아요. 저는 옳고 그름이 확실한 스타일이고 그걸 가감없이 표현하는 성격이거든요. 어느 순간 제 생각을 드러냈을 때 멤버가 “그러면 안 된다”고 말렸어요. 그게 팀에게는 좋은 길이니 그랬을 거예요. 그러다보니 저도 제 생각을 숨기고, 멤버들에게도 솔직하게 터놓질 못했어요. 그런 게 쌓이다보니 점점 비즈니스 관계가 돼 갔어요. ―10년 넘게 연습생 생활을 했는데, 팬과 사귄다는 이유로 탈퇴를 해야 했어요. 억울하거나 아쉽지는 않나요? 너무 어린 나이에 소속사에 들어오다 보니 10년이 넘는 연습생 기간 동안 ‘내가 이 일을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명확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어렸을 때부터 밴드음악을 좋아해서 막연히 밴드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연습생이 됐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아이돌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윙크를 하고 하트를 만드는 것도 너무 힘들었고, 아이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걸 못하는 제 모습도 만족스럽지 못했죠. 그러다보니 방송에 나오는 제 모습도 모니터링하지 않았어요. ‘뜨거운 감자’ 때 무대를 보면 카메라도 안 쳐다보고 혼자 무대에서 뱅뱅 돌아요. 그래서인지 아이돌에 아무 미련도 안 남은 것 같아요. 권광진은 엔플라잉 탈퇴 9개월만인 2019년 9월 해병대에 입대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채 입대한 해병대는 그에게 인생 2막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는 7주간의 신병교육 과정에서 1000여 명의 기수 동기 중 1등에 해당하는 ‘무적해병상’을 받았습니다. 제대 후에는 해병대 관련 콘텐츠로 유튜브 ‘무적권’을 만들어 구독자 11만 명을 넘겼습니다. ―제대 후 해병대 유튜브 채널 ‘무적권’을 개설했어요. 최근 구독자 11만 명을 넘겼는데, 수익활동은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해병대 관련 굿즈를 판매하는 ‘해병대 스토어’도 운영하고, 유튜브 활동도 하면서 감사하게도 아이돌 때보다 지금 훨씬 더 많이 돈을 벌고 있어요. 제가 엔플라잉 활동 정산이 되기 전에 탈퇴를 해서 그럴 수도 있어요. 일을 하면 돈을 받는 구조를 이해한지가 얼마 안 됐어요. 엔터(테인먼트)라는 곳은 어렸을 때부터 연습생으로 들어가서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직업이라는 교육이 무의식에 흘러들어가 있어요. 그러다보니 오늘 스케줄을 가면서도 얼마를 받는지도 모르고, 콘서트를 해도 수익이 정확하게 얼마인지 모르는 거예요. 너무 어리다보니 돈에 대해 민감하지 않았던 것도 있고요. ―기수 동기 중 1등에 해당하는 ‘무적해병상’을 받았어요. 해병대가 왜 그렇게 좋으셨나요?엔플라잉에서 탈퇴했을 때 그 동안 쌓아온 모든 것들이 박살난 상황이었어요. 입대 당시 제 머릿속엔 ‘생존’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어요.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다보니 예전에 추구했던 것들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빈손에서 시작하니 해병대 생활에 더 절실하고 열심히 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갖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오롯이 쏟았죠. 군대 생활이 체질에 맞아서 직업군인도 고려했어요. 헬기조종 쪽으로 가려고 교재도 샀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새벽에 제 머리맡에 편지를 두고 나가시더라고요. 헬기 조종은 사고가 나면 무조건 즉사거든요. 위험한 일에 도전한다고 하니 걱정이 되셨는지 그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군인이 되는 대신 군대 콘텐츠를 만드는 일로 만족하고 있어요. ―병역기피로 논란이 된 남자 연예인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례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굉장히 안타까워요. 논란이 일었던 분들 대부분 잘 나가다가 한 순간 병역기피로 활동을 못하잖아요. 그런데 군대가 사실 그렇게 안 빡세거든요. 연예계가 훨씬 더 힘듭니다. 제가 해병대 입대 첫날 느낀 게, ‘잠은 재워주네?’였어요. 저는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잠을 많이 자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전 군대에서 오전 5시 반이면 눈이 떠져서 제일 먼저 씻고 자리를 정리했어요. 육체적으로는 해병대가 아이돌보다 더 힘들 순 있지만 시키는 것만 열심히 하면 돼요. 아무리 무거운 걸 메고 훈련을 받아도 정신적으로 힘든 것만 못해요. 팬과의 교제는 사실이었지만,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의 이름 뒤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성추행은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평생을 약속할 정도로 끌렸던 상대와 연애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퇴출당해야 했던 당시 상황이 억울할 법도 하지만 권광진은 “누구의 탓을 할 것도 없다. 오로지 내 부주의였다”고 말합니다. ―해병대가 여러 모로 삶의 터닝포인트였던 것 같은데요,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탈퇴 직후에는 성추행 루머를 퍼뜨린 팬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을 탓했어요. 군대에서 저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됐어요. 제 부주의로 팀을 탈퇴하게 됐기에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더라고요. 연습을 열심히 안했거나, 누군가에게 무례하게 행동했던 제 잘못들이 많이 떠올랐어요. 요즘엔 온라인에 성추행 루머를 올렸던 분들에게도 미안한 마음까지 들어요. 처음엔 제가 좋아서 팬 활동을 시작했던 분들이잖아요. 제가 성실하게 활동했다면 그 분들이 그러지도 않았을 텐데…. 한때 제 팬이었던 사람들에게 피해보상까지 받고 ‘나도 참 악랄했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다 제 잘못이라는 반성을 많이 하게 됐어요. ―앞으로의 목표가 궁금합니다. 제 별명이 ‘권하마’에요. 방송 중에 물을 많이 마셔서 구독자 분들이 붙여 주신 별명인데요. 물을 많이 먹는 이유가 혼자서 쉴 새 없이 말을 해서 그래요. 처음 라이브 방송을 할 때는 시청자가 2, 3명밖에 없었는데, 그 사람들을 위해서 몇 시간동안 열심히 떠들던 게 습관이 돼서요. 그런데 전혀 힘들지 않아요. 아이돌 때는 제가 생각했던 것들을 마음대로 발언할 수 없고, 항상 조심해야 했어요. 만들어진 이미지에 갇혀서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갔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제가 원하는 콘텐츠를 만들고, 제가 원하는 스케줄을 잡잖아요. 무적권 채널도 스스로의 힘으로 키워가고 있고요. 그래서 어떤 일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어요.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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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년 차 개그맨 ‘아싸 최우선’, “호응 없어도 끝까지 ‘웃기는 사람’ 되고 싶다”[복수자들]

    뭘 올려도 사람들이 안 봐요. 길거리 다니면 가끔 절 알아보긴 하시는데 구독자, 조회수는 더 떨어지고 있어요. 이제 저 어떡하죠?개그맨 최우선(35)이 ‘지독한 슬럼프에 빠졌다’며 짠내 나는 읍소 영상을 올렸습니다. 아무리 봐도 누군지 잘 모르시겠다고요? 맞습니다. 척 보면 알 법한 유명 개그맨은 아닙니다. 하지만 최우선은 데뷔한 지 7년이나 된, 꽤 오래 활동해온 개그맨입니다.‘윤형빈 소극장’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로 희극인 생활을 시작한 그는 2017년 tvN ‘코미디빅리그’의 한 코너 ‘잠입수사’로 데뷔했습니다. 지난해 ‘코미디빅리그’를 그만두고 여러 유튜브 웹예능에서 활약했지만 아싸 티는 벗지 못했는데요. 최근엔 SNL 코리아 시즌4에도 출연하는 등 천천히 ‘인싸’들의 세계로 넘어오는 중입니다.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 아싸 개그맨 최우선을 만났습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랫동안 꿈 꿨던 개그맨의 길을 7년째 걷고 있지만 최우선의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고 합니다. 기대 만큼 호응을 받진 못해도 끝까지 ‘웃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7년차 개그맨, 슬럼프에 빠졌다고요?“거리에 나가면 알아봐주시는 사람들이 늘었는데 (유튜브 콘텐츠는) 뭘 올려도 조회수가 잘 나오지 않아서 걱정이 큽니다. 2021년 2월 채널을 개설했는데 1년 만에 구독자 수 10만 명이 넘었거든요. 100만 뷰가 넘는 콘텐츠도 꽤 있었고요. 근데 최근 1년 간 구독자 수가 2만 명도 안 들었어요. 상승세가 확 꺾여서 고민이에요.”―읍소 영상을 올리셨는데요.“유튜브가 잘 안 되고 있다는 건 사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요. 이걸 제 고민이라고 오픈한 적은 없어요. 다른 유튜버들과 달리 구독자와 소통하거나 그런 타입은 아니었거든요. 혼자 꽁해 있는 것보다 오픈주방처럼 구독자들의 조언, 직언을 듣고 싶은 마음에서 올렸습니다.”―인기를 끌지 못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아싸 대학생’이라는 부캐 하나만 계속 연기하니까 그런 게 아닐까 추측해요. 조회수가 오르지 않는다는 건, 보는 사람만 보고 있다는 것이잖아요. 요즘 가장 큰 고민입니다. 저 역시 정답은 잘 모르지만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동안은 부캐를 활용한 콩트만 했다면 이젠 부캐를 활용한 여러 기획 콘텐츠에 도전해보려고요.”―아싸 대학생 부캐는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요?“실제 인물을 보고 영감 받은 캐릭터는 아니에요. ‘코미디빅리그’에서 연기했던 한 코너의 캐릭터였어요. 녹화는 했는데 방송엔 못 나왔거든요. 최근 개그맨들 사이에서 부캐가 한창 인기였을 때 저도 부캐를 해봐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코미디빅리그’에서 연기했지만 방송에 나오지 못한 ‘아싸 대학생’을 떠올렸죠. 제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재밌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실제의 저라는 사람과 결이 가장 비슷하기도 했고요.”―원래 ‘아싸’ 같은 성격인가요?“그냥 평범했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조용한 편이었고요. 학교에서 떠들고 웃기고 그런 타입은 전혀 아니었어요. 대부분 조용히 있는 편이었는데 친해지고 나면 재밌어지는 친구였어요. 새학기가 시작되면 1학기 때는 데면데면하다가 2학기 되면 웃겨지는 친구 있잖아요. 그게 저였어요. 다시 반 바뀌면 조용해졌고요.(웃음)”최우선이 본격적으로 ‘부캐’ 콘텐츠를 만들어 올리기 시작한 것은 2022년 2월. ‘코미디빅리그’에 함께 출연하며 동고동락했던 개그맨 김해준이 부캐로 큰 인기를 끌면서부터였습니다. 최우선과 김해준은 무명 시절 한 집에 동고동락할 정도로 친한 사이입니다.―절친 김해준 씨가 일약 스타가 됐는데요. “형이 너무 잘 돼서 놀랐어요. 제 주변 사람 중에 이렇게 유명해진 사람은 해준 형이 처음이었거든요. 스타들은 제게서 되게 멀리 있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바로 제 옆에서 같이 코미디 하던 형이 잘 되는 걸 보게 되니 많은 자극이 됐어요. 그것 때문에 ‘아싸 최우선’ 유튜브를 시작한 것도 있어요. 머리로만 새로운 도전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해준이 형 덕분에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계기가 됐죠.”―‘아싸 최우선’은 소수에게 컬트적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떡상’은 되지 않았지만 몇몇 팬들이 좋아해주시는거 보면 소수에게 어필하고 있진 않나 생각합니다.(웃음) 너무 소수여서 민망하긴 한데요. 그래도 저를 좋아해주시는 팬들이 있으니까 정말 괜찮을 때도 있습니다.”―‘아싸 대학생’은 어딘가 모르게 부족한, 모자란 느낌의 캐릭터인데요. “제가 하고 싶어하는 ‘페이소스’식 개그랑 잘 맞는 캐릭터예요. 저의 단점이나 결함, 슬프거나 짜증나는 일을 개그로 승화시키는 거죠. 나에게 불행한 일이 닥치더라도 타인에게 웃음이 될 수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마음이 제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윤형빈 소극장’ 시절부터 크게 의지했던 박휘순 선배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가장 닮고 싶은 개그맨으로 박휘순 씨를 꼽으셨더라고요.“박휘순 선배는 개그맨 지망생 때 ‘윤형빈 소극장’에서 처음 알게 된 사이예요. 잘 모르는 사이였는데 되게 잘해주시는 거예요. 밥도 사주시고 술도 사주시면서. 모든 후배들에게 다 잘해주는 서글서글한 성격인줄 알았는데, 저한테만 잘해주셨던 거였어요. 이유를 여쭤보니 ‘널 보면 내 지망생 시절이 생각난다’고 하시더라고요.”―두 분이 약간 닮은 것 같기도 합니다.“박휘순 선배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항상 웃어야 해. 안 웃으면 집에 우환이 있는 사람 같고, 지금 당장이라도 세상 떠날 것처럼 보이니까. 우리의 무표정은 무표정이 아니다. 항상 웃어라.’ 어쩌면 개그맨으로서 제게 팁을 주신 거죠. 사실 개그맨들이 대부분 외향적이고 표정도 밝잖아요. 저처럼 우울하고 축 처지는 분위기의 개그맨은 항상 웃어야 호감처럼 보일 수 있다고 진심으로 조언해주신 거였어요.”최우선은 ‘고학력 개그맨’으로도 유명합니다. 중앙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한때 세무사가 되려고 고시원에서 지낸 적도 있습니다. 처음 개그맨이 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대가 가장 심했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왜 반대하신 건가요? “대학 졸업했으니 멀쩡한 회사 취직해서 평범하게 살지 왜 그런 험한 길을 가려고 하느냐고요. 처음엔 엄청 반대하시다가 동생이 취업하면서부터 (부모님) 마음이 누그러지시더라고요.(웃음) 아들 둘 다 밥벌이 못 하고 살면 어떡하냐 걱정하신 거죠. 동생에게 고마워요. 덕분에 부모님 걱정을 덜었으니까요.”―부모님께 들은 칭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요?“원래 주변 사람들한테 자식 자랑 잘 안 하시는데, 저 개그맨 되고 나서 SNS 프로필 사진도 바꾸시더라고요. ‘코미디빅리그’에 출연한 영상 캡처한 사진으로요.(웃음) 동생은 취직해서 나가 사는데 저는 반백수처럼 부모님이랑 함께 살거든요. 집안일도 잘 하고 부모님이랑 대화도 자주 하니까 내심 저를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유튜브에 올리는 영상마다 낮은 조회수에 화제성도 떨어지니, 얼굴이 알려진 개그맨으로서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데요. 그만두거나 숨기보다는 정면돌파를 택했습니다. 100만 뷰, 수십만 구독자를 바라는 건 아니라고 합니다. ‘1년 내 작은 성과라도 만들어서 채널삭제하지 않는 것’이 그의 목표입니다.―목표가 너무 소박한 거 아닌가요?“옛날부터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재밌어하는 걸 좋아했어요. 팬은 많지 않고 유명세는 없지만, 그래도 제가 사람들을 웃길 수 있는 역할이 계속 주어지잖아요. 그것만으로 만족해요. 타인과 비교만 하지 않으면, 제 상황은 정말 만족스러워요. 잘 나가는 동료들과 비교를 아예 안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크게 신경 쓰는 편도 아니거든요.”―개그맨이 본인의 천직이라고 생각하나요?“데뷔 전까진 후회할 때도 많았어요. 개그맨 되겠다고 학원도 다니고 공연도 열심히 했는데 잘 풀리지 않았으니까요. 서른 살이 되던 해 ‘코미디빅리그’에 데뷔하고 여러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작지만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고 있어요. 느리지만 천천히 제 길을 가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개그맨만 힘든 건 아니잖아요.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나요? 그래도 하나뿐인 인생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불안하고 힘들 때도 있지만 재밌고 즐거울 때가 더 많습니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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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돌은 당신의 연애상대가 아니다… 前 아이돌 작심발언[복수자들]

    “아이돌은 무대에서 춤 추고 노래하는 사람들이지 적어도 팬들과 ‘유사연애’하는 직업은 아닙니다.”‘유사연애’는 가상의 인물에게 연애 감정을 갖고 상상으로 연애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아이돌 업계에서 유독 많이 언급되는 말이죠. 아이돌 그룹 틴탑의 전 멤버 방민수 씨는 K팝 아이돌 팬덤이 ‘유사연애’를 강요하는 문화 때문에 병들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그는 19살에 아이돌 그룹 틴탑의 리더 ‘캡’으로 데뷔해 14년간 아이돌 멤버로 활동하다가 올 5월 그룹에서 탈퇴했습니다. 아이돌 탈퇴 후 화가로 활동하는 그는 틈틈이 예초(刈草·풀 베는 일)도 하는 등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연예기획사의 유사연애 비즈니스, 사생팬과 유사연애로 대표되는 팬덤의 실체 등에 대해 가감 없는 비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복수자들〉이 그를 만나 ‘아이돌 14년의 삶’에 대해 물었습니다. 아이돌과 팬의 유사연애를 조장하는 연예 기획사의 상술, 아이돌에겐 공포 그 자체라는 사생팬 문화, 아이돌 내 비인기 멤버의 설움 등을 다뤘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인터뷰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방민수는 2010년 데뷔한 이후부터 14년간 줄곧 ‘아이돌 부적응자’였습니다. 19살에 데뷔한 그는 성인이 된 후에도 아이돌이라는 이유로 자유롭게 자기 표현을 못하는 억압적 분위기가 싫었습니다. 신체에 타투를 한다고 욕을 먹고 팬을 보고 웃지 않는다고 비난을 당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공공의 적대감이 커질수록 그는 점점 엇나가게 됩니다. SNS 라이브 방송에서 자신에게 악플을 다는 팬들에게 욕설을 하고 흡연을 했습니다. 틴탑 내에서 ‘밉상’으로 통하던 그는 결국 팀을 탈퇴하게 됩니다.아이돌 활동 시절 그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팬들과의 ‘유사연애’가 당연시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아이돌에게 연애감정을 느끼는 팬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위해 연예 기획사에서는 유사연애를 유도하는 서비스나 행사를 기획합니다. 팬이 스타에게 느끼는 연애 감정을 이용하는 건 연예 산업의 고전적인 비즈니스라고 하지만, 그중에서도 아이돌 업계에선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팬들은 아이돌과 연애하는 것 같은 환상을 구입하기 위해 기꺼이 거액을 지불합니다. 스킨십이 허용되는 아이돌 팬 사인회, 실시간 영상을 통한 아이돌의 사생활 공개, 아이돌 멤버와의 가상 온라인 채팅 등이 대표적입니다.―아이돌 산업은 ‘팬덤 비즈니스’로 유지됩니다. 팬덤 덕분에 아이돌 산업이 운영되고 아이돌 멤버들도 돈을 벌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팬덤 덕분에 아이돌이 돈을 버는 게 맞지만 아이돌은 극성 팬덤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극성 팬덤을 조장하고 이를 방조하는 회사의 태도가 제일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음반에 멤버별 포토카드를 넣어서 판매하는 게 대표적인데요. 팬 한 명에게 CD 여러 장을 팔려고 하는 수법이에요. 일부 극성 팬들은 원하는 멤버의 포토카드를 갖기 위해 음반 구입에만 수십, 수백만 원을 쓰게 됩니다. 돈을 많이 쓴 일부 팬들은 ‘나는 이만큼 소비를 했으니까 (아이돌 멤버에게 유사연애를 강요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BTS 같이 유명한 아이돌한테는 별로 해가 되진 않아요. 전체 팬덤이 많으니 극성 팬들의 영향력이 약할 수밖에 없거든요. 문제는 인기가 정점에 있는 아이돌이 아니라 하락세에 접어든 아이돌입니다.”―아이돌의 인기가 떨어질 때 ‘유사연애’ 폐해가 심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팬이 1만 명 있을 때랑 100명 남았을 때를 가정해보세요. 100명의 극성 팬들은 전체 팬덤이 1만 명이었을 때나 100명만 남았을 때나 쓰는 돈의 액수는 같거든요. 1만 명 있을 때는 소수였기에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했다면 자신들이 다수가 된 후에는 목소리를 점점 키우는 거죠. 인기가 떨어진 아이돌에게 ‘너희 나 없으면 안 되잖아. 나 너희한테 이렇게 돈 많이 썼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너희들은 나 없으면 뭐가 되겠냐’고 권리를 주장하는 거예요.”유사연애로 시작한 팬덤이 어느 순간 선을 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사생팬(연예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극성팬을 이르는 말)의 스토킹 범죄가 대표적입니다. 사생팬에게 스토킹을 당해도 가벼운 대응조차 하지 못하는 아이돌이 많습니다. 범행 강도가 웬만큼 심하지 않고서야 팬들을 고소·고발한다는 것이 아이돌에겐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사생팬에게 스토킹을 당한 적이 있으신가요? “데뷔 초반부터 사생팬들이 있었어요. 집 앞에서 새벽 3~4시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새벽이라 얼굴도 안 보이는데 불쑥 찾아와선 편지랑 선물을 건네는 거죠. 소름 끼치게 놀랐어요. 저는 처음부터 사생팬들을 보면 제발 오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욕도 하고 그랬어요. 당하는 입장에서 스토킹은 정말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에요. 휴대전화번호는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지 모르는 번호로 전화, 문자 오는 건 일상이고요.”―집 주소, 휴대전화번호는 개인정보잖아요. 어떻게 알고 접근하는 걸까요? “아이돌 개인정보를 거래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아이돌이 해외 공연 간다고 공항에 가잖아요. 스케줄을 공개하지 않으면 비행시간을 알 수가 없거든요. 근데 저희가 해외 나갈 때마다 소수의 팬들은 항상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팬들에게 아이돌 비행 정보를 돈 받고 파는 공항 관계자들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연예 기획사에는 직원이 많잖아요. 매니저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직군의 직원들. 그 사람들도 팬들한테 돈 받고 집 주소나 휴대전화번호를 넘긴다고 하더라고요. 비공개 스케줄을 통째로 판매하는 분도 있고요. 아이돌 개인정보를 사고파는 것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범죄나 다름 없죠.”14년간 아이돌로 살면서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졌다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 틴탑에서 ‘비인기멤’이었다고 합니다. 미인기 멤버를 칭하는 ‘비인기멤’은 아이돌 그룹 내에서 인기가 없는 멤버를 의미합니다. 여러 명의 다양한 멤버로 구성된 아이돌 그룹에선 멤버별로 팬덤의 차등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비인기멤이 된 아이돌은 대인기피증이 생길 정도로 상처를 받는다고 합니다. 방민수는 활동 당시 주로 선글라스를 착용했는데, 아이돌 활동에 적응하지 못한 그가 카메라 렌즈나 타인의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틴탑 활동 시절 비인기멤이셨나요? “다른 멤버들에 비해 인기가 없었어요. 다른 멤버들이 저보다 훨씬 잘 하기도 했지만 저는 처음부터 유사연애 못 하겠다면서 행동도 ‘아이돌 답지 않게’ 한 거죠. 팬이 없는 것까진 괜찮은데 다른 멤버를 좋아하는 팬들이 저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게 힘들었어요. ‘너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멤버가 잘 나가지 못한다’ ‘너 때문에 틴탑이 뜨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면서요. 팬 사인회 같은 데서는 대놓고 싫은 티를 내요.”―비인기 멤버면 어떤 게 가장 힘든가요? “팬 사인회 같이 팬들이 참여하는 행사죠. 팬 사인회에서는 원하는 멤버들을 골라서 사인을 받을 수 있거든요. 팬 사인회 때 대부분의 팬들이 저는 보통 건너뛰고 싶어했어요. 팬들 표정에서도 저를 싫어하는 게 다 보이잖아요. 그러다보니 팬 사인회 같이 팬 만나는 행사는 아예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한테 속없이 웃어주고 싶지도 않았고요. 같이 활동하던 시기 친하게 지냈던 걸그룹 멤버가 한 명 있었어요. 그 친구도 그룹에서 비인기멤이었거든요. 군부대 행사를 갔는데 사인회를 했대요. 사인 받고 싶은 멤버한테 줄 서라고 했는데 그 친구한테는 1명도 안 선 거예요. 뒤에서 군 간부들이 군인들한테 ‘야, 저기 가서도 사인 받아, 인마’ 그랬는데 그게 더 상처였다고 했어요. 그 이야기 하면서 엄청 울더라고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상황인데도 (팬들 앞이기 때문에) 웃고 있어야 해서 너무 괴로웠다고요.”―자격지심을 느껴서 틴탑을 탈퇴했다고 개인 방송에서 고백하셨는데요. “비인기멤으로 계속 살다보면 설움의 연장선으로 자격지심이 따라와요. 사람은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아를 찾아간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무래도 저는 주변 멤버들과 저를 비교할 수밖에 없었어요. 틴탑에서 저는 항상 꼴찌였어요. 자격지심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정신적으로도 많이 취약해졌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돌은 ‘보여지는 나’와 ‘진짜 나’의 괴리를 느낄 거예요. 우울증이나 조울증에 걸리는 아이돌도 많고요. 저 같은 경우는 스스로 싫어하는 행동을 억지로 해야 했잖아요.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컸어요. 집에 혼자 있을 때 빼고는 전부 불행했어요. 내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싫어하는 행동을 ‘아이돌이기 때문에’ 억지로 해야 된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너무 컸어요. 스스로를 잘 모르는 어린 나이에, 아이돌이 돈을 벌기 위해서 어떤 일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데뷔한 제 잘못이 컸죠. 참고 또 참다가 결국 그만두게 된 거예요.”아이돌을 그만둔 그는 화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미술을 배웠던 그는 그림 그릴 때가 가장 즐겁다고 합니다. 2019년 첫 전시회를 연 그는 아이돌 활동 중에도 그림을 그려왔으며 개인 SNS를 통해 그림 판매도 하고 있습니다. 아이돌을 그만둔 후에는 일용직으로 예초 작업을 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예초 작업을 통해 그가 한 달에 벌어들이는 금액은 100만 원 남짓입니다. ―아이돌을 그만둔 지금은 행복하신가요? “돈은 훨씬 못 벌지만 행복합니다. 아이돌 때 공연 10여 분 하고 내려왔을 때 벌 수 있는 돈이 몇백만 원이었다면 예초는 2~3시간에 30만 원 벌거든요. 근데 저는 그 돈이 훨씬 가치 있고 괜찮다고 느껴질 수 정도로 아이돌 활동이 힘들었어요. 그런 상황이 왔기에 포기할 수 있었던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포기하지 못했을 거예요.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행복해요. 저는 아이돌 문화와 생활을 견디지 못해서 나왔지만, 그래도 지금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었던 건 14년 동안 열심히 일해 온 덕분이기도 하잖아요. 과거의 불행했던 일로 후회하지 말고 지금 행복에 집중하자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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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석열 대통령, BTS 멤버는 외계인이다? 36년 째 UFO ‘덕질’하는 천재 공학자[복수자들]

    윤석열 대통령과 BTS가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황당무계해 보이는 주장을 한 이는 가설과 검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과학자입니다. 그는 서울대 물리학과 학사, 카이스트 신소재공학과 석사, 영국 케임브리지대 공학박사 과정을 밟은 맹성렬 우석대 전기전자공학과 교수(59)입니다. 세계 인명사전 ‘마르퀴스 후스 후’에 2년 연속 등재된 공학자, 2006년 특허청이 수여하는 특허 부문 최고상 ‘세종대왕상’ 수상자, ‘나노물질 합성과 실리콘계 및 비실리콘계 나노 트랜지스터’ 등에 대한 연구로 38편의 SCI(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급 논문을 발표한 연구자이기도 합니다. 그의 입에서 ‘대통령과 BTS는 외계인일 것’이라는 말은 왜 나왔을까요? 맹 교수는 천재 공학자임과 동시에 36년간 UFO를 연구해온 국내 최고 권위의 UFO 연구자이기 때문입니다. 맹 교수는 세계 최대 UFO 단체 뮤폰의 한국 대표이자, 한국UFO연구협회 회장입니다. 세계적인 팝 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 미국 전 대통령 조지 부시도 외계인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었죠. UFO 연구자들 사이에서 비범한 사람들은 외계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나왔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맹 교수도 윤석열 대통령과 BTS 멤버들이 외계인일 수 있다고 주장한 겁니다. UFO는 실재한다는 증거들은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 정부가 100년 간 UFO에 대한 정황을 숨겼고, 외계인의 유해를 보유하고 있다는 주장이 의회 청문회에서 제기됐습니다. “UFO의 존재는 안보 위협 요인이기 때문에 미국이 모든 증거들을 은폐해왔다”는 맹 교수의 주장과 일맥상통합니다. 낮에는 전기전자공학을, 밤에는 UFO를 파헤치는 맹 교수를 지난달 13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사옥에서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BTS와 윤석열 대통령이 외계인인 이유를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근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미국 정부가 미확인비행현상(UAP)의 연구 결과에 대해 은폐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보셨나요? 미국은 1940년대 말부터 1960년대 말까지 적극적으로 UFO를 연구하다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연구를 중단시켜버렸어요. 최근 들어 다시 연구를 하고 있지만 그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외계인이 미국과 중국, 러시아보다 뛰어난 군사력을 갖추고 지구를 기웃거리고 있다는 게 밝혀지면 이는 세계 안보에 엄청난 위협이기 때문이겠죠. 우리나라 역시 UFO 연구에 소극적인 편인데 최근 들어 조금씩 희망이 보이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자 시절 공약 중 하나로 항공우주청 신설을 내세웠고, 당선 후에도 2023년 말 항공우주청이 출범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UAP에 대한 증거들이 밝혀지고 있는 만큼, 항공우주청 안에 UFO 관련 연구 팀을 만들어야 합니다. ―UFO의 실재와 함께 많이 대두되는 주장은 유명인들의 ‘외계인설’입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조지 부시, 루퍼트 머독 등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렙틸리언’(인간형 파충류 괴물)설에 휩싸였었는데요. 교수님도 이를 믿으시나요? ‘주변에 외계인이 있다면 누가 외계인인 것 같으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유명인들은 외계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외계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세요. 지구를 점령하고 싶다면 외계인을 어느 자리에 둘까요?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심어 놓겠죠. 그래서 한 나라를 통치하는 대통령이 가장 외계인일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큰 BTS도 마찬가지고요. ―유명인의 렙틸리언 설을 두고 ‘음모론’이라고 보는 시각도 많은데요, 외계인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나요?외계인에게 납치된 경험이 있는 ‘피랍자’들의 진술이 꾸준히 나오고 있는데요, 진술 증거는 힘이 약합니다. 보통 역행 최면 기술을 써서 피랍자들의 납치 경험을 듣는데, 최면 상태의 진술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어요. 그 내용이 얼마든 왜곡될 수 있다는 거죠. 진술보다 더 신빙성이 있는 증거는 북미에서 발생해 온 가축 도살 사례입니다. 1960~1970년대 미국 뉴멕시코주를 중심으로 남미, 캐나다 등지에서 소들이 예리한 칼에 사지, 귀, 생식기 등이 잘린 채 발견됐고, 더 놀라운 건 사체에 피가 한 방울도 없이 다 빠져나간 상태였다는 겁니다. 2009년에도 미국 콜로라도주 한 목장에서도 4마리의 소가 이 같은 상태로 발견됐습니다. 눈, 귀, 혀, 생식기 등이 사라졌고, 피와 상처도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야생동물에 물린 흔적도 없었고, 절단 도구도 밝혀내지 못했어요. 이런 정황들 때문에 가축 도살의 범인이 외계인일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외계인에게 납치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외계인 피랍 경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 납치된 순간엔 공포스러웠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즐거워진다고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공포를 잠재우기 위한 방어기재가 작동해 즐거움을 가짜로 느낀다는 주장도 있고, 외계인이 텔레파시를 통해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사실 뚜렷한 방법은 없습니다. 그냥 즐겨야죠. 별수 있나요. UFO와 외계인 이야기를 할 때 맹 교수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납니다. UFO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서울대 물리학과 3학년 재학 시절 ‘과학과 종교’라는 수업을 들은 후부터였습니다. 이후 UFO를 주제로 레포트를 썼고, 서울대 최초로 UFO 탐구 동아리를 만들었지만 가입자가 없어서 외부 인원을 영입해 한국UFO연구협회를 열었습니다. 28살이었던 1995년에는 UFO에 대해 탐구한 자료를 모아 600쪽에 달하는 책 ‘UFO 신드롬’을 발간해 과학 부문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유사 과학 아니냐”는 동료 학자들의 무시도 받았지만, 그는 주변에서 뭐라 하던 자신이 진심으로 하고 싶은 걸 좇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습니다. 그 고집으로 36년을 공학자이자 외계인 연구자로 살았습니다. ―외계인 연구는 언제부터 하시게 된 건가요? 대학 시절 수업을 들었다가 UFO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 후 제 전공과는 별개로 UFO를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는 성격이에요. 원래 의대도 갈 수 있는 성적이었지만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물리학과에 진학했어요. 돈 벌기 힘들 때 ‘의대에 가고 물리학, UFO 연구는 취미로 할 걸’이라 후회가 찾아오기도 하는데, 잠깐 그러고 말아요. 의대를 갔다면 제 젊은 시절이 굉장히 힘들었을 것 같거든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대신 물질적인 부분에서의 손해는 감내해야죠. ―‘검증되지 않았다고 해서 무조건 과학이 아니라고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검증돼야 과학 아닌가요? UFO를 ‘유사과학’(주창자와 연구자가 과학이라 주장하지만, 과학의 요건으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과 맞지 않는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많습니다. 입증 방법론이 비과학적이라면 과학이 아닙니다. 하지만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검증해낸다면 그건 과학이죠. UFO 목격담이나 외계인 피랍에 대한 주장을 과학적 방법으로 입증하고 규명해낸다면 UFO와 외계인의 실재도 과학적인 것이 되는 거예요. 일반인들이 올리는 UFO 사진을 갖고 ‘UFO는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비과학적인 것이죠. ―UFO가 존재한다는 과학적인 증거는 무엇이 있나요? 가장 결정적인 UFO 증거로 언급되는 건 항공모함 니미츠호 조종사들이 UFO를 목격했고, 그 물체가 실제 레이더에도 감지됐던 사례입니다. 2004년 니미츠호 항공모함 훈련 도중 2대의 조종기에 탑승해있던 4명의 조종사들이 일제히 UFO를 목격했다고 증언했고, 그 모습이 조종기의 레이더와 잠수함의 소나(음파에 의해 수중목표의 방위 및 거리를 알아내는 장비)에도 잡혔습니다. UFO 추정 물체가 우주에서 대기로 진입하는 모습, 대기를 비정상적으로 빠른 속도로 진입하는 모습, 진입 후 해수면 위에서 머물러 있는 모습이 레이더에 잡혔죠. 당시 레이더로 이 물체를 감지한 조종사들이 해당 위치로 가서 이 물체와 추격전을 벌였다는 증언도 나왔습니다. 추격전을 벌이던 물체가 바다 밑으로 사라졌는데, 바닷속에서의 움직임은 소나로도 감지됐습니다. 구체적인 증거들을 미국 정부가 갖고 있지만 민간에 공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해당 자료가 민간 과학자들에게 넘어가서 모든 퍼즐이 맞춰지면 지구상의 기술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쉬쉬하는 것이죠. ―UFO와 외계인이 있다고 주장했던 존 맥 하버드대 의대 교수는 미국 주류학계에서 외면받기도 했는데, 교수님도 비슷한 경험이 있으신가요?학자들 앞에서 UFO 얘기를 하면 저를 이상하게 보곤 했어요. “먹고 살기 힘들구나”라며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죠. 저를 공학자이기 전에 UFO를 파헤치는 사람으로만 바라보고, 속된 말로 ‘또라이’로 치부하는 시선도 있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그런 시선이 불편했지만 요즘엔 UFO 이야기를 방송에 나와 사람들에게 공유할 수 있어서 즐거워요. 이제는 자신 있게 ‘UFO는 과학이다’라고 말하고 다닙니다. 미국 주류 과학자들 중 UFO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진지하게 접근하려는 이들이 많아졌어요. 전문 잡지에 UFO와 외계인을 다루는 추세도 이어지고 있고요. UFO가 비주류에서 주류로 편입되는 것 같아 행복합니다. 김재희기자 jetti@donga.com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

    • 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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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네 지키는 평범한 소방관이 꿈”… 넷플릭스 ‘사이렌’의 정민선[복수자들]

    “‘여자 치고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출연자들은 여성경찰, 여성군인, 여성소방관이 아니라 직업군을 대표해서 나온 겁니다.”올 상반기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예능 을 연출한 이은경PD는 제작발표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선 경찰, 소방관, 군인, 스턴트맨, 운동선수, 경호원 등 6개 직업군의 여성들이 각자 직업의 명예를 걸고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입니다. 진흙을 뒤집어쓰고 땀범벅 되고 부상을 입어도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편견을 먹고 사는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지독한 승부를 벌이는 모습에 대리 쾌감을 느꼈다는 시청자의 응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속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강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센 놈이랑 붙자, 그게 멋있지” “나보다 센 놈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서 왔다”고 선전포고한 용감한 소방관입니다. 짧은 시간에 혼자 장작 30개를 패서 팀을 승리로 이끌고, 불 끄는 경기에선 전문성을 발휘해 활활 타오르는 불을 신속하게 제압했습니다. 경북 상주소방서 소속 정민선 소방사(30)가 그 주인공입니다. 최근 이 만난 그는 지난해 제1호 여성 소방차량 운전요원으로 임명된 소방관이기도 합니다. 소방차 운전은 오랫동안 금녀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분야입니다. 정민선 소방사 인터뷰는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기개 넘치는 선전포고가 매력적이었습니다. “ 1화 나오는 날, 소방학교 훈련 중이었어요. 텔레비전 큰 화면으로 보고 싶었는데 훈련 중이라 그럴 수 없었어요. 너무 궁금해서 휴식시간에 근처 카페로 가서 휴대전화로 봤는데 첫 화에서 제가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웃음) ‘내가 저런 말을 했었나’ 하면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말만 그런 게 아니라 경기에서 ‘센 놈’ 역할을 톡톡히 하셨습니다. 특히 장작 패기의 달인이 되셨어요. 다른 팀은 나눠서 했는데 정 소방사님 혼자 장작 30개를 팼어요. “그때 소방팀 리더였던 김현아 언니가 부상을 입으면서 저희팀 분위기가 안 좋았어요. 누구 하나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이 툭 흐를 정도로 암울했어요. 팀별 아레나전을 하러 현장에 도착했는데 운동장에 장작이 수북이 쌓여 있는 거예요. 진행자가 ‘의리 게임입니다. 순서를 정하십시오’라고 했을 때 떠오른 생각이 ‘최대한 혼자 해봐야 겠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순서를 정하는 게 저한테는 의미가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책임지고 다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다른 팀원들도 있는데 왜 혼자 장작 30개를 다 패야 한다고 생각했나요? “암울해진 팀 분위기를 다시 띄우고 싶었어요. 저도 언니들도 다시 힘을 내려면 상황을 반전시켜야 하잖아요. 소방관들이 매일 겪는 화재, 재난 현장이랑 똑같아요. 팀원이 부상을 입고 뒤처지고 있으면 자발적으로 나서서 도와주는 것이 팀워크라고 생각해요. 아마 장작이 2배 더 많았어도 할 수 있었을 거예요. 체력보다 정신력으로 해내는 거니까요.”부상 입은 동료를 대신해 한계에 도전하고, 긴박한 상황에서도 타인을 해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려는 모습을 보여준 소방팀. 자기를 희생하고 타인을 구하는 ‘소방관’이라는 직업적 특성이 잘 드러났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을 통해 소방관이라는 직업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졌습니다. “저희 4명이 소방관을 대표해서 출연했을 뿐입니다. 현장에 있는 모든 소방관의 평소 모습이에요. 아주 오래 전부터 대한민국 소방관들이 땀으로, 피로 일궈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출연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근무 중에 소방청에서 연락이 왔어요. 넷플릭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보겠냐고요. 처음엔 방송 출연 엄두가 나지 않아 거절했어요. 근데 일주일 뒤에 또 연락이 와서 죄송한 마음에 제작진 미팅을 하게 됐어요. 대화를 한참 나눈 후에 프로그램 취지에 대해 여쭤봤죠. PD, 작가님들이 정말 오랫동안 의 기획의도를 설명해주셨어요.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귀담아 들었어요. 제작진 말씀이 끝나자마자 ‘출연하겠다’고 말씀드렸죠.” 연출을 맡은 이은경PD는 프로그램 기획 의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적 있습니다.‘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포츠 만화의 세 가지 키워드는 우정, 노력, 승리다. 이 키워드들은 가슴을 뛰게 한다. 자기 분야에 진심이고, 조금 모자라도 뛰어들고, 무언가를 욕망하고, 그것을 쟁취하는 데에 거리낌 없는 이야기 속에서 늘 가슴이 웅장해졌다. 그런데 여성이 주인공인 스포츠 만화가 많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정, 노력, 승리가 담긴 진한 여성 서사물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우정과 노력, 승리. 소방팀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세 가지 키워드는 유독 빛이 났습니다. 소방팀은 반칙보다 정공법으로 경기에 임하며, 피 튀는 싸움보단 땀 흘리는 경쟁을 택했습니다. 생사를 함께 한 소방팀뿐 아니라 결승전에 오르기까지 ‘원팀’으로 협력했던 운동팀과도 끈끈한 우정을 과시했습니다. ―촬영이 끝난 후에도 출연자들과 우정을 나누고 계시다고요. “소방팀 언니들과는 단체카톡방에서 하루 종일 떠들고요. 사이렌에 대한 좋은 기사, 댓글 나오면 꼭 공유해요. 결승전에서 맞붙은 운동팀과는 촬영 끝나고 회식도 했어요. 운동팀 김성연 선수와는 여행도 다녀오기로 했고요.”―소방팀 리더 김현아 소방장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현아 언니의 말이 소방팀의 방향이었어요. 현아 언니는 힘도 세고 성격도 불같아요. 누구보다 의리 있고 리더로서 희생 정신도 강해요. 언니는 자기가 독재자처럼 굴었다고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해왔어요. ‘행복한 독재’ ‘멋있는 독재’였다고요. 그래서 결승전 때 소방팀 리더인 현아 언니가 ‘우리답게 공격하고 멋지게 전사하자’고 이야기했잖아요. 저희 모두 질 거라 예감했지만 마지막이니까 우리다운 것을 하자는 언니 말에 다들 설득됐던 것 같아요. 너무 허망하게 운동팀에 패배하긴 했지만요.(웃음)”―‘사이렌’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소방관이란 존재를 더욱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화재, 재난 현장은 남녀 소방관을 가리지 않아요. 똑같은 압력의 호스를 들고 똑같은 무게의 장비를 차고 요구조자(구조가 필요한 사람)를 구해야 해요. 저희가 성별을 떠나 해야 하는 일을 할 뿐이에요. 현아 언니 인터뷰를 봤는데 이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우리는 항상 증명하고 입증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여자 소방관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시선 끝에 무시, 짜증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선입견을 갖고 보시는 거예요.”―그럴 땐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저는 그런 시선에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긴 해요. 머리가 짧고 덩치가 크니까 제가 여잔지 남잔지 모르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인생 모토 중 하나가 ‘진짜는 모두가 알아본다’는 거예요.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성장하고 배우려는 거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저는 그냥 웃고 말아요. 날마다 출동해야 하는 사고, 재난 현장이 있는데, 그런 편견들에 속상해할 시간이 없는 거죠.” ―재난이나 사고가 발생하면 보통 사람들은 대피하지만 소방관은 안전한 데 있다가도 위험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일단 출동벨이 울리고 나서부터는 위험하지 않은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어요. 뉴스에는 큰 사고, 큰 사건만 나오잖아요. 소방관 고립, 사망 이런 큰 뉴스만 나오죠. 근데 현장에서는 작은 사건, 사고도 정말 많이 일어나요. 예를 들면 저희가 타는 소방차는 되게 높거든요. 착용 장비가 굉장히 무겁기 때문에 차에서 내리다가 넘어지기도 해요. 공기호흡기 착용하면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에 옆에 장애물을 보지 못하고 넘어지는 바람에 방화복이 찢어질 때도 있어요. 화재 현장에서는 불덩이들이 제 머리 위에서 굴러다니고요. 개방된 창문 틈으로 화염이 용암처럼 분출되는 경우도 많고요.”―화재 현장에서 방화복을 입어도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나요? “저희가 입는 방화복은 만능이 아닙니다. 순간의 열기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요. 방화복의 소재가 밖에서 오는 열기, 수분을 막아주는 역할도 하지만 제 몸에서 나오는 열을 밖으로 나가는 걸 막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화복 안에 있는 열기를 고스란히 다 견뎌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열기를 식히기 위해 소방관들이 교대로 현장에 진입하는 거예요.”―화재 현장에서 가장 두려운 순간이 있다면요? “화재 현장은 농연(濃煙·짙은 연기) 때문에 시야 확보가 안 되거든요. ‘중성대’라고 해서 시야 확보가 되는 공간으로 진입, 대피해야 해요. 여기에 놓인 물이 가득 찬 수건을 잡고 이동하는데 그 수건이 소방관들에겐 목숨 줄 같은 거거든요. 이걸 놓치면 정말 무서워요. 소방관도 사람이지 않습니까? 소방관들이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 건 두려움과 무서움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인 것 같아요. 원래부터 소방관인 사람은 없는 것처럼, 익숙해지기 위해 훈련을 많이 받아야 해요.”―모든 소방관들은 트라우마를 겪는다고 하더라고요. 트라우마가 심했던 사고가 있었나요? “몇 년 전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어요. 산사태, 낙석 방지 구조물에 들이받았는데 차량 정면, 오른쪽 유리가 다 깨져서 파편이 얼굴로 튀었어요. 잠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뒷목 부분이 되게 뜨거운 거예요. 머리에서 피가 콸콸 나오고 있더라고요. 그때의 뜨거운 느낌이 아직도 완전 선명해요. 찢어진 부위에 아홉 바늘 정도 꿰매고 후유증으로 이석증도 생겼어요. 정말 큰 사고였어요.”―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실 것 같아요. “사고 났을 때 응급실에서 급한 조치를 받고 붕대를 감고 집에 돌아오니 오후 11시 정도 됐더라고요. 타지에서 근무를 하고 있으니까 고향에 계신 엄마한테 전화를 드렸죠. 사고 났다고 말씀드리니 엄마가 덤덤하게 ‘내일 갈게’ 하시고는 바로 오셨어요. 생각보다 엄마 목소리가 차분해서 괜찮으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며칠 전에 엄마가 보고 싶어서 저녁 늦게 전화를 했는데 엄마가 엄청 긴장하는 목소리로 받으시는 거예요. 늦은 시간 딸에게 전화가 오니까 저번 사고 때처럼 또 다친 게 아닐까 염려하신 거죠. 그때 마음이 정말 아팠어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민선 소방사는 소방관이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방송 출연으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그가 스스로에게 붙인 별칭은 ‘동네를 지키는 평범한 소방관’입니다. ―‘동네를 지키는 평범한 소방관’이 되고 싶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구조가 간절한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특이하게도, 제가 직접 119 신고하는 일이 많았어요. 제 눈앞에서 누가 다치거나 교통사고가 난다거나, 산불이 난다거나…. 한 번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날씨가 어떤가 보고 있는데 공사장에서 불이 나는 거예요. 다른 누가 먼저 신고를 할 법도 한데, 어쩐 일인지 제가 최초 신고자였어요. 아무도 손대지 않았고, 아무도 손 댈 수 없는 날것의 현장에 소방관들이 사람들을 구하고 조치하는 모습을 봤어요. 그걸 보면서 막연하게 ‘타인을 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근데 정말 신기한 게 뭔지 아세요? 제가 소방관이 된 후부터는 사건, 사고를 목격한 적이 없어요. 이젠 제가 현장에 가장 먼저 출동하는 사람이 됐기 때문인 것 같아요.(웃음)”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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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랙퀸은 죄다 트랜스젠더냐고? 어쩌라구~” 18년차 드랙 아티스트 나나영롱킴[복수자들]

    ‘드랙퀸은 전부 트랜스젠더’라는 혐오의 시선도, 여성들의 ‘탈코르셋’ 움직임에 역행한다는 편견도 옛말입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이태원 지하의 클럽에서 비밀스럽게 향유되던 ‘드랙’은 젠더의 구분을 넘어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예술 장르로 자리 잡았습니다.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서 인기 댄스 크루 프라우드먼은 드랙 아티스트 ‘캼’과 협동 무대를 선보이며 드랙에 대한 편견을 깼다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인기 유튜버 랄랄의 ‘드랙퀸 분장실 기싸움’ 콘텐츠로 드랙 아티스트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드랙이 양지로 올라오는데 기여한 아티스트 중 하나는 현시점 드랙신(Scene)의 슈퍼스타, 나나영롱킴(본명 김영롱·36)입니다. 브라운아이드걸스와 마마무의 뮤직비디오, 박효신 콘서트 티저영상에 출연하는 등 K팝 아티스트와 협업하며 ‘드랙은 성소수자들만의 문화’라는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화장품 브랜드 ‘헤라’ 캠페인 모델로도 활약했습니다. 캠페인 광고 끝 무렵 금색 가발을 벗어던지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유튜브 영상에는 ‘백화점 브랜드 광고에서 드랙을 볼 날이 오다니, 감격을 넘어 존경스럽다’는 댓글이 달렸습니다.커밍아웃을 한 동성애자이자 드랙퀸. 소수자 중 소수자인 그는 손쉽게 혐오와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편견의 끝에는 도리어 자신의 삶에 대한 끝없는 긍정이 있었습니다. 헤라 캠페인 광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삶을 살잖아요. 자기가 주인공이라면 화려해도 되지 않을까. 새드보다는 해피엔딩.’ 해피엔딩을 향해 매순간 나아가는 나나영롱킴을 지난달 10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사옥에서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국민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던 그가 드랙에 빠져 자퇴한 사연부터, ‘드랙퀸은 잠재적 트랜스젠더’라는 편견에 대한 일침까지 동아일보 유튜브 ()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드랙이 좋아서 대학교를 그만 두셨다고요. 배우가 되고 싶어서 국민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어요. 그런데 제가 LGBTQ+(성소수자)에 속한 사람이다 보니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서정적인 로맨스 연기를 못하겠더라고요. 남녀의 획일적인 성역할과 사랑 연기를 풀어낼 수가 없었어요. ‘연기는 내 길이 아니구나’ 싶었죠. 자퇴를 하고 5, 6년 동안은 연극이나 뮤지컬을 하나도 안 봤어요. 무대를 보면 제가 연기를 다시 하고 싶어질 것 같았어요. 드랙퀸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밥벌이를 하면서 마음이 편해졌어요. 이젠 동기들 연극도 보러가도 아무렇지 않아요. ―‘드랙’의 어원은 무엇인가요?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여성들이 연극과 오페라 무대에 올라갈 수 없어서 여성의 역할을 남성이 했어요. 남성이 여성 분장을 했을 때 드레스가 무대 바닥에 질질 끌리는 모습에서 ‘드래그’(Drag)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요. 어원에 대한 가설은 워낙 많아서 뭐가 정확한 건진 저도 몰라요. 각자 받아들이고 싶은 대로 받아들이면 돼요. 예전엔 드랙이 무엇인지 이해시키려고 했거든요. 살다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아무리 설명해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받아들이더라고요. ―드랙은 여성성을 강조하는 ‘여장남자’라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무당벌레, 겨털(?)을 연상케 하는 특이한 분장도 많이 하셨더라고요. 빨간색 바탕에 흰색 점박이 수트를 입은 드랙 분장을 보고 무당벌레라고 하는 분도 있고 일본 설치미술가 구사마 야요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어떻게 봐도 좋아요. 해석은 자유죠. 드랙 아티스트가 반드시 여장만 하는 게 아니에요. 무당벌레 같은 곤충이나, TV, 거품 등 사물이 되기도 해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제3의 캐릭터를 만드는 친구들도 있어요.―드랙퀸은 여성이 되고 싶어 하는 남성들, 즉 잠재적 트랜스젠더라는 일부 시각도 있습니다. 사실인가요?아닙니다. 드랙을 단순히 진한 화장, 화려한 드레스를 입는 ‘여장’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오해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성애자인 여성 드랙퀸도 있고, 남성성을 강조하는 ‘드랙킹’도 있어요. 드랙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걸 마구마구 표현하는 예술 장르예요. 요즘엔 ‘드랙퀸’ 대신 ‘드랙 아티스트’ ‘드랙 퍼포머’라는 용어가 더 많이 쓰여요. ‘드랙퀸=여장’이라는 틀이 깨졌으면 좋겠어요.―드랙이 대중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매니악한 장르예요. ‘풀타임 드랙’으로 생계유지를 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는지도 궁금해요. 프리랜서다 보니 수입이 고정적이진 않아요. 지난해 10월까지는 투잡을 뛰었어요. 낮에는 욕실용품 브랜드 ‘러쉬’를 다녔고, 저녁에는 촬영이나 드랙 공연을 했죠. 러쉬는 LGBTQ+를 응원하는 브랜드 중 하나죠. 입사 면접에서 “우리 브랜드는 LGBTQ+를 지지하는데 성소수자에 대한 불쾌감이나 혐오감이 있느냐”고 직접적으로 질문해요. 그래서 러쉬는 LGBTQ+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사람들로 구성이 돼 있죠. 그 덕에 러쉬에서 7년 동안 재밌게 일했어요.―최근 들어 드랙이 급격히 대중화돼가고 있는 분위기예요. 킹키부츠, 헤드윅, 프리실라 등 드랙 아티스트를 소재로 한 뮤지컬이 인기이고, 최근엔 드랙 아티스트와 K팝 가수들과의 협업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고요.해외에선 드랙 문화가 자리 잡은 지 오래 됐는데, 한국에서는 드랙이 TV 프로그램이나 유튜브 콘텐츠 소재가 된지 5, 6년 밖에 안 됐어요. 드랙이 마니아층만 즐기는 음지의 문화였다면, 요즘엔 한층 더 밖으로 나온 건 확실하죠. 남녀 커플이 데이트 코스로 드랙쇼를 보러 오기도 하고, 얼마 전엔 제 공연에 단골 고객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오기도 했어요. ‘드랙 아티스트’라는 화려한 외피를 벗은, 사람 ‘김영롱’은 불특정 다수의 혐오 섞인 손가락질로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이 한창이던 2020년 집단감염이 발발한 곳이 성소수자들이 즐겨 찾는 이태원 클럽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확산되면서 커밍아웃한 게이인 나나영롱킴에게도 하루에 100개 이상의 혐오 메시지가 왔습니다. 당시 그는 강박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렸습니다. “성격이 어두웠으면 자살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고 회고했을 정도로 혐오의 강도는 심각했습니다. 퀴어 퍼레이드에서는 그에게 설사약을 탄 생수병을 건넨 행인도 있었습니다. ―숱한 악플에 시달려 오셨다고요. 입에 담기에도 어려운 인신공격적인 악플이 너무나 많았어요. 변호사가 악플을 추리니 101개더라고요. 한 사람이 여러 악플을 단 경우도 있어서 사람 수로 따지면 69명이었고, 그들에 대한 고소를 진행했죠. LGBTQ+ 친구들이 악플에 시달리면서 “전부 고소할거야. 가만 안 둘 거야”라고 말은 하지만 실천한 사람은 거의 없어요. 다 착하고 여리다보니 그 과정을 견딜 자신이 없었던 거죠. 그들을 대신해서라도 매운맛을 제대로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다인원을 고소한거고, 아직 진행 중에 있습니다. ―2021년 대부업체 광고모델이 되신 뒤 인지도가 높아졌어요. 세상의 편견에 “어쩌라구!”라고 반격하는 앙칼진 멘트가 통쾌했는데요. 일각에선 비난도 있었다고요. ‘대부업체 광고를 왜 하느냐. 제 정신이냐’는 욕을 엄청 먹었어요. ‘트랜지션(성전환)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당신(나나영롱킴)을 보고 성전환 수술을 하기 위해 돈을 빌렸다가 못 갚고 자살하면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는 극단적인 비판까지 들었어요. 저를 트랜스젠더로 보셨던 거죠. 주변에 트랜지션을 준비하는 친구들한테 “광고를 보고 돈 빌려서 수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라고 물어보니 “언니는 트랜스젠더도 아니고 드랙퀸인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느냐”고 의아해하더라고요. ―퀴어 퍼레이드에서 행인으로부터 설사약을 탄 생수통을 받으신 적도 있다고요. 맞아요. 퀴어 퍼레이드를 응원하는 척 하면서 물병을 건넸는데 알고 보니 설사약이 타져 있었던 거죠. 혐오의 감정에 빠진 사람들은 죄책감이 없어요. 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해야 한다는 목적 하나에만 빠져있어서 자신이 하는 행위가 얼마나 심각하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지 생각하지 못하죠. 단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만이 아니에요.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혐오의 공통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어떤 아티스트가 되고 싶나요?얼마 전 제 드랙쇼에 대만 남녀 관광객들이 오셨어요. K팝, K드라마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해 한국의 LGBTQ+ 문화에도 흥미를 갖게 되셨대요. 제 공연을 보기 위해 휴가를 내 한국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정말 감동을 받았어요. 원래 ‘나나’라는 이름으로만 활동하다가 ‘영롱킴’을 붙이게 된 이유도 해외에 한국의 드랙을 더 알리고 싶기 때문이에요. 아직은 생소한 한국의 드랙이, 제 한국 이름 ‘영롱킴’을 타고 더 날개를 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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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짜 돌아이’ 들을 때까지 계속 할 거예요” 무한도전 콘테스트 출신 1세대 크리에이터 채희선[복수자들]

    “크리에이터? 네가 무슨 창조주냐?” 2015년 ‘크리에이터’가 적힌 명함을 건네자 친구들이 던진 말입니다. 2009년 무한도전 ‘코리안 돌+아이’에 참가해 얼굴을 알리고 2014년 유튜브를 시작해 인기를 끈 1세대 크리에이터 ‘채채’, 채희선 씨(31)의 이야깁니다. 지금은 초등학생 장래 희망 1순위 직업이 됐지만 9년 전만 해도 크리에이터는 생소한 직업이었습니다.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겠다는 채 씨에게 친구들은 “창조주냐”며 웃었고, 부모님은 “탤런트와 다른 거냐”고 물었습니다. 지난달 16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에서 만난 채 씨는 “유튜브를 시작한 2014년에는 페이스북의 시대가 영원할 줄 알았다”고 회상했습니다. 꿈틀거리는 끼를 발산할 통로를 찾던 중 유튜브를 알게 됐습니다. 지상파 개그맨 공채 시험 최종 단계에서 고배를 마셨던 그는 2014년 구독자 47만 명 채널 ‘쉐어하우스’의 연기자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구독자 79만 명을 보유한 코미디 채널 ‘쿠쿠크루’의 객원멤버로 활동을 넓히면서 인지도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데이트할 때 몰래 방귀 뀌는 방법’, ‘도를 아십니까 만났을 때 대처법’ 등 콩트 콘텐츠 조회수는 수백만 회에 달합니다. 이후 본인의 유튜브 채널 ‘채채’에서 ‘가슴 작으면 좋은 점’ ‘마르면 나쁜 점’ 등 고정관념을 뒤집는 ‘채고점’ 콘텐츠, 121만 구독자를 보유한 ‘딕헌터’(본명 신동훈)와 커플로 분한 ‘신채커플’ 콘텐츠를 선보이며 50만여 명의 구독자를 모았습니다. 아이돌 그룹에게 ‘마의 7년’이 있듯 크리에이터에게도 전성기가 영원하진 않습니다. 2015년부터 5년 넘게 인기를 누렸지만 2021년 자율신경실조증, 기립성 빈맥을 앓아 유튜브 제작을 쉬어야 했습니다. 53만 명이었던 구독자는 43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섣불리 주저앉지는 않습니다. 지난해부터 결혼 후 일상을 담는 유튜브 채널 ‘채새댁’을 개설했고,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순간을 극복한 과정을 적은 에세이 ‘오히려 좋아’도 발간했습니다. 사람들을 웃길 때의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는 그를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한물간 유튜버가 살아남는 방법’()을 <복수자들>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3일 오후 4시 공개되는 2부에서는 ‘결혼전도사’가 된 그가 말하는 ‘배우자 고르는 방법’도 공개됩니다. ―무한도전의 코리안 돌+아이 특집에서 최종 선발된 24명의 돌아이 중 한 분이셨어요. 당시 고등학생이셨는데, 프로그램 출연 계기가 궁금해요. 어렸을 때 꿈이 코미디언, 리포터, 연극배우, 쇼호스트, 레크리에이션 강사였어요. 1순위인 코미디언이 안 됐을 경우 이후 직업들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정도로 저를 표현하고 사람들을 웃기는 직업을 갖고 싶었어요. 대학에서 예체능을 전공하려면 돈이 많이 들잖아요. 무한도전 코리안 돌+아이 콘테스트는 부모님께 저를 증명할 방법이었어요. ‘우리 애한테 말도 안 되는 똘끼가 있구나’를 보여드리면 제가 예체능 전공을 하는 걸 지원해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돌+아이 콘테스트에 나가기 위해 ‘이 사람은 돌아이가 맞습니다’라고 적힌 서류를 만들어서 교감선생님을 비롯해 100명의 선생님, 친구들 사인을 받아 제출했어요. ―유튜브는 어떻게 처음 시작하게 됐나요? 코미디언이 꿈이었기 때문에 지상파 공채 개그맨 시험을 봤어요. SBS는 최종까지 가서 떨어졌어요. 계속 불합격의 고배를 마시고 있던 중에 코미디 유튜브 채널 ‘쉐어하우스’에서 연기자 아르바이트를 해보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당시 2014년은 대부분 페이스북만 하던 시대였어요. 시급 4500원을 받고 연기자 알바를 시작했죠. 이후 돌+아이 콘테스트에 함께 출연했던 딕헌터 님의 제안으로 유튜브 채널 ‘쿠쿠크루’ 객원멤버로 들어가게 됐어요. 2015년엔 제 채널 ‘채채’를 개설하면서 본격적으로 크리에이터 활동을 시작했죠. ―본격적으로 크리에이터 활동을 시작한 2015년만 해도 유튜브라는 플랫폼은 생소했어요.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겠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다이아TV와 계약을 맺은 뒤에 지인들 모임에 나가서 ‘크리에이터’가 적힌 명함을 줬더니 다들 의아한 표정이었어요. 지금은 유명한 PD가 된 한 오빠는 “크리에이터? 너 직업이 창조주야?”라며 웃었어요. 그 정도로 생소한 직업이었던 거죠. 부모님도 처음엔 제 직업을 잘 이해하지 못하셨어요. 제가 크리에이터를 한다고 하니 “탤런트 비슷한 거냐”고 물으셨어요. 부모님이 친구들에게 제 직업을 설명하려고 해도 휴대폰에 유튜브가 안 깔려 있어서 소개 못 하신 적도 많았대요. ―인기를 끌었던 ‘채고점’ 콘텐츠에서는 ‘가슴 작으면 좋은 법’ ‘키 작으면 좋은 법’처럼 콤플렉스일 수도 있는 점을 유쾌하게 콘텐츠화했고, 치질수술 과정까지 자세하게 공개했어요. 본인을 내려놔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나요? 전 제가 웃길 때가 가장 예쁜 것 같아요. 스스로 매력적이고 사랑스럽게 느껴질 때가 망가지고 웃기는 순간이라 ‘현타’가 온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올리는 족족 100만 조회수는 거뜬하게 넘기는 인기 유튜버가 됐지만 그는 2021년 돌연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갑작스레 찾아온 건강 악화 때문이었습니다. 온종일 어지럼증이 지속되는 기립성 빈맥증후군과 자율신경실조증을 함께 앓으면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대학원을 다니던 중이었지만 책의 문장 한 줄도 제대로 읽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몰입과 집요함의 힘으로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이겨낸 그는 지난해부터 새로운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에세이집도 냈습니다. 인기가 예전만 하지 않지만 그는 단 한 번도 크리에이터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웃음을 줄 때 가장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구독자가 53만 명까지 늘면서 가장 인기 있는 1세대 유튜버로 활발하게 활동하셨는데, 2021년부터 활동이 뜸해졌어요. 작년에는 영상이 10개밖에 안 올라왔더라고요.2021년부터 건강이 악화됐어요. 기립성 빈맥증후군, 자율신경실조증 두 가지가 한 번에 왔어요. 병명을 몰라서 병원도 많이 다녔고요. 그 병의 증상은 어지럽고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하루 종일 지속되는 거예요. 그 증상이 1년 반 동안 지속돼서 일상생활이 안 될 정도였어요. 그때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논문 한 줄을 읽고 쉰 뒤에 다시 한 줄을 읽어야 했어요. 라이브 커머스 쇼호스트 활동도 하고 있었는데 멘트를 외울 수가 없어서 진행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두 가지 병이 동시에 찾아온 건가요?살다 보면 감당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감당을 할 수 없는 일이 있잖아요. 예를 들어 내가 토익점수를 400점에서 750점으로 올리겠다거나, 구독자 수를 40만 명에서 50만 명으로 올리겠다는 건 제가 감당할 수 있고, 노력으로 극복이 가능한 문제예요. 당시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일이 닥쳤어요. 내 노력으로 해결이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하니 몸이 아프더라고요. 그때 받았던 스트레스가 병의 원인이 된 것 같아요. ―감당할 수 없는 일과 맞닥뜨린 순간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내 능력 밖의 문제라면 그와 관련된 걱정과 생각을 바로 끊어내세요. 스트레스를 최대한 안 받으려고 하는 거죠. 저는 다른 일에 집중을 정말 많이 하려고 노력해요. 잡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루를 진이 빠지게 사는 거죠. 예를 들어 방송을 할 때 ‘오늘 하루 진짜 이 악물고 이 사람들 다 웃겨주겠다’는 마음으로 임해요. 대학원 공부를 할 때는 타이머를 재요. ‘오늘 하루 13시간 앉아있는다’ 라고 스스로와 약속을 하고요. 남들 눈에는 스스로를 혹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제게는 그게 집중의 방법입니다. 제가 어떤 일에 몰입하고 집중을 하면 제 뒤에 있는 그림자들이 안 보이더라고요. ―지난해 출간한 에세이 ‘오히려 좋아’에서 ‘나는 슬픔을 갈고 닦아 웃음을 만드는 감정연금술사’라고 묘사하셨어요. 힘든 순간을 이겨내는 긍정의 힘을 어떻게 기른 것인지 궁금해요.혼잣말을 많이 해요. 매일 어떤 생각들을 하는데 그 생각을 10번 이상 스스로한테 외쳐요. 예를 들어 오늘은 길을 걸어가면서 ‘도태되지 말자’를 열 번 반복해서 스스로에게 말했어요. 제가 블로그에도 쓴 말인데요, ‘결국 끝까지 남아 성공한 사람들은 오래 버틴 사람이다’라는 말을 요즘 계속 새기려 해요. 현실이 버거울 때마다 생각해요. ―작년부터 유튜브 채널 ‘채새댁’을 시작하셨고, 여전히 43만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채채’에도 본격적으로 영상을 올리시고 있어요. 반응이 예전만 하진 못한데 크리에이터로서의 고민은 없으신가요? 트렌드를 만들 수 없다면 트렌드를 따라가기라도 해야 해요. 요즘 ‘렉카’ 콘텐츠가 인기잖아요. 그래서 2개월 전 ‘채채, 당신이 몰랐던 10가지 사실’이라는 렉카 컨셉의 영상을 올렸던 거예요. 트렌드를 따라가야 조금이라도 대중의 취향을 파악할 수 있겠죠. 근데 전 저만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욕구가 커요. 남들과 똑같은 걸 만들고 싶진 않아요. 남들이 안 했는데 진짜 웃긴 걸 만들고 싶어요. ‘진짜 미쳤다’, ‘진짜 또라이다’ 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분들 정말 많잖아요. 요즘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1순위가 유튜버일 정도예요. 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한 방에 훅 갈 수 있다’, 이 말을 꼭 기억해야 돼요. 새로운 캐릭터와 콘셉트의 유튜버들은 계속해서 생겨나고, 유튜브가 밀어주는 특정 알고리즘에서 벗어나면 뜻하지 않게 인기가 식을 수도 있어요. 결국 개인의 브랜드를 탄탄히 다져놔야 합니다. 그래야 유튜브의 트렌드에서 좀 뒤처지게 되더라도 개인 브랜드를 지지하는 팬들의 힘으로 계속 콘텐츠를 만들 수 있어요.―크리에이터는 인기와 수익이 불안정한 직업이잖아요. 2015년으로 돌아가더라도 크리에이터라는 직업을 택하실 건가요? 수익과 인기는 필연적으로 등락이 있어요. 월수입 격차가 크게는 10배까지 나요. 수익이 적은 달에는 의기소침해지고, 많이 번 달에는 ‘장난 아닌데?’ 싶을 때도 있죠.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제가 이 일에 갖는 애정이에요. 사람들마다 가장 잘하는 일들이 있잖아요. 고등학교 때부터 느꼈는데 저는 수학이나 과학을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거든요. 근데 말하는 것이나, 친구들 웃기는 건 전교 1등이었어요. 저는 이 일을 선택한 걸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전 제가 웃길 때보다 남들이 절 보고 웃을 때 훨씬 더 행복한 사람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그 행복을 추구해 나갈 겁니다. 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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