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김재희 동아일보 문화부 김재희 기자 공유하기 jetti@donga.com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취재하는 방송·영화 담당 기자입니다. 재미를 주는 콘텐츠를 더 재밌는 기사 안에 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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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전쟁포로가 흘린 눈물, 현대 역학의 토대가 되다[책의 향기]흑사병, 천연두, 스페인 독감 등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은 인류 역사와 함께했다. 메르스부터 에볼라, 코로나19까지 여전히 감염병 대유행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역학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한 이들은 누구일까. 의사나 학자를 떠올리기 쉽지만 미국 게티스버그 칼리지 역사학 교수인 저자는 노예제, 식민주의, 전쟁의 희생양에게 그 공을 돌린다. 노예선, 플랜테이션(대규모 상업 농장), 전쟁터라는 ‘대규모 실험실’이 조성됐고, 의사들은 그 현장에서 질병의 원인과 확산경로를 연구했다. 저자는 공공의료와 역학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지만 조명 받지 않은 흑인 노예와 식민지인, 죄수와 전쟁포로를 비춘다. 공기질이 질병의 확산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의학적 발견은 수개월간 노예선에 갇혀 이동해야 했던 흑인 노예들의 희생으로 인해 가능했다. 대표적 사례는 노예선 ‘브룩스호’다. 스코틀랜드 군의관 토머스 트로터는 1783년 서아프리카 골드코스트에서 흑인 노예 600여 명을 태운 이 배에서 40명이 죽고 300명이 감염되는 과정을 관찰함으로써 더러운 공기와 영양결핍이 괴혈병의 원인임을 찾아냈다. 그의 연구는 병원, 감옥 등에서의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한 환기 기구 개발로 이어졌다. 전쟁에 참전한 군인과 전쟁포로의 희생 역시 현대 공중보건이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크림전쟁(1853∼1856) 당시 영국 간호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터키 스쿠타리 병원에서 다친 병사들을 돌보며 군 병원의 비위생적 환경이 환자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연구할 수 있었다. 전투보다 병으로 죽는 병사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는 환기되지 않는 건물, 오물이나 동물 사체가 몇 달째 방치돼 있는 배수구 등 병원의 열악한 위생 환경을 지적했다. 그가 강조한 위생과 예방법 개발은 현대 공중보건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이 됐다. 전염병 퇴치를 위한 백신 개발에는 아이들의 희생까지 따랐다. 19세기 중반 미국 남북전쟁 당시 천연두가 퍼지자 남군은 백신 채취에 사람을 이용하는 인두법을 위해 어린 흑인 노예를 대상으로 삼았다. 인두법은 천연두 환자의 고름이나 딱지를 채취해 사람의 피부에 넣는 방식. 아이 몸에 생긴 물집이 커질수록 백신을 만드는데 필요한 천연두 림프를 더 많이 채취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천연두에 걸린 흑인 아이의 몸에는 평생 흉터가 남았다. 의사들은 사례 연구를 통해 질병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나간다. 하지만 그 사례 뒤에 존재하는 실존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역학과 공중보건이 첫발을 뗄 수 있었던 데에는 노예와 식민지인, 죄수와 전쟁포로들이 흘린 피와 눈물이 있었다. 코로나19가 엔데믹에 접어드는 지금, 이들의 고통에 현재의 우리가 얼마나 많이 빚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2022-06-25 03:00
“한국판 ‘종이의 집’은 볶음밥… 하회탈로 권력층 풍자”한국판 ‘종이의 집’은 스페인 원작 드라마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2017∼2021년 방영된 스페인 넷플릭스 드라마 ‘종이의 집’ 팬이라면 24일 공개되는 넷플릭스 한국 드라마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에 관심을 가질 만하다. 원작은 스페인 조폐국에서 24억 유로(약 3조2600억 원)를 훔치려는 무장강도 이야기로 큰 인기를 끌었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22일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배우들과 제작진은 “남북 분단 같은 한국적 요소를 넣어 원작과 차별화했다”고 말했다. 이날 발표회에는 배우 유지태 김윤진 박해수 전종서 이원종을 비롯해 김홍선 감독, 류용재 작가가 참석했다. 드라마 배경은 남북이 왕래하는 공동경제구역 내 조폐국. 이곳에서 4조 원을 훔치려는 강도들과 이들을 막으려는 남북 대응팀의 두뇌싸움을 그렸다. 유지태는 인질 강도극을 계획한 천재 교수로 나온다. 박해수가 강도단 우두머리인 베를린 역을 맡았고, 전종서 이원종 김지훈은 각기 다른 능력을 가진 강도를 연기했다. 김윤진과 김성오는 남북 협상대표로, 박명훈은 인질로 잡힌 조폐국장으로 각각 나온다. 원작과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은 남북분단 상황. 김 감독은 공동경제구역 배경에 대해 “이 정도의 대규모 범죄 상황이 벌어지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고민이 컸다. 남북분단 설정을 가져오면 근미래에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류 작가는 “남북분단을 다룬 작품은 많지만 하이스트(상점·은행 강도) 장르에서 남북 강도가 함께 돈을 훔치고 남북 경찰이 힘을 합쳐 이들을 잡는 이야기는 없었다.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한국판 종이의 집에서 강도들은 하회탈 가면을 쓴다. 원작에서는 강도들이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얼굴 가면을 썼다. 박해수는 “스페인 원작에서 달리 가면을 통해 자유를 표현했다면 한국판에서는 하회탈을 통해 권력층에 대한 풍자를 담고자 했다”고 말했다. 전종서는 “활짝 웃고 있는 하회탈이 해학적으로 느껴졌고 한편으로는 기괴했다”고 했다. 종이의 집이 넷플릭스 최대 흥행작 ‘오징어게임’에 필적할지도 관심사다. 김 감독은 “오징어게임 덕에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 것 같다. 한국 콘텐츠들이 세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덕에 좋은 작품을 만들 기회가 왔다”고 말했다. 류 작가는 “스페인 원작이 파에야라면 저희는 볶음밥이다. 스페인에서 시작된 거대한 축제가 한국에서 다시 열린다고 생각해 달라”고 덧붙였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2022-06-23 03:00
송강호 “‘비상선언’, 한국영화 저력 보여줄 것”“한국영화의 저력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다.”(송강호) “1000만 관객이 넘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전도연)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20일 열린 영화 ‘비상선언’ 제작보고회에서 배우들은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팬데믹 기간에 제작된 비상선언은 올해 1월 선보일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상황이 악화되면서 개봉을 연기했다. 올해 8월경 개봉하기로 하고 날짜를 조율 중이다. 항공 재난 블록버스터인 비상선언은 ‘관상’(2013년)과 ‘더 킹’(2017년)을 연출한 한재림 감독이 5년 만에 내놓는 신작. 지난해 제74회 프랑스 칸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돼 10분간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날 행사에는 한 감독을 비롯해 배우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김남길 임시완 김소진 박해준이 참석했다. 영화는 원인불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데 이어 테러범에게 장악된 비행기 승객들과 해당 비행기를 비상착륙 시키려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 ‘우아한 세계’(2007년), ‘관상’에 이어 한 감독의 작품에 세 번째로 출연하는 송강호는 항공 테러사건을 수사하는 형사팀장 인호를 연기했다. 이병헌은 비행공포증이 있음에도 미국에서 딸을 치료하기 위해 딸과 함께 비행기에 탄 아버지 재혁으로 나온다. 전도연은 국토교통부 장관 숙희를, 김남길은 부기장 현수를, 임시완은 용의자 진석을 각각 맡았다. 박해준은 청와대 위기관리센터 실장 태수를 연기했다. 한 감독은 10년 전 연출 의뢰를 받고 어떻게 극을 풀어 나갈지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지난 10년간 불행히도 한국 사회에 크고 작은 재난들이 있었고, 촬영에 들어간 직후 팬데믹이 찾아왔다. 절망 속에서도 개개인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희생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담고자 했다”고 말했다. 배우들은 영화가 사랑하는 이를 지키려는 분투를 감동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을 강조했다. 송강호는 “우리가 머리로는 알지만 평소 못 느낀 가족, 이웃, 공동체에 대한 생각을 굉장히 세련되고 어른스럽게 풀어냈다”고 말했다. 전도연은 “감독님이 ‘크고 작은 재난을 겪으면서 상처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작품이 됐으면 좋겠다’고 한 말에 공감이 가 출연을 결정했다”고 했다. 한 감독은 극 중 가족애 같은 감정선이 자칫 신파로 흐르지 않도록 신경 썼다고 밝혔다. 그는 “제게 신파란 관객이 슬픔을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됐는데 슬프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대사나 극적인 상황을 통해 관객에게 마음이 전달된다면 그건 신파가 아니라 공감이다. 관객이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2022-06-21 03:00
차별과 가난의 벽을 뚫는… 그것은 무한한 희망[책의 향기]100명 중 3명. 2020년 미국 물리학 전공자 중 흑인 비율이다. 1999년에는 이 비율이 4.8%였다. 약 20년간 전체 물리학 전공생 수는 늘었지만 흑인 비율은 도리어 줄었다.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는 올 3월 과학계의 인종차별을 지적하면서 이 수치를 공개했다. 흑인인 저자는 ‘흑인이 백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려면 두 배는 더 똑똑해야 한다’는 과학계 인종차별을 비롯해 학대, 가난으로 얼룩진 유년 시절을 딛고 천체 물리학자가 됐다. 하루 한 끼 먹기도 어려운 미국 남부 빈민가에서 자란 그에게는 맥도널드가 생일날 가는 고급 레스토랑이었고, 집에 수도 배관이 없어 펌프로 물을 퍼야 했다. 폭력과 범죄가 일상이던 빈민가에서 태어나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와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교수로, 그리고 미국항공우주국(NASA) 과학임무국에 근무하는 유일한 흑인 물리학자로 거듭난 과정이 담겼다. 저자의 삶은 ‘이보다 더 바닥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다. 지독한 가난보다 더 지옥 같았던 것은 가정폭력이었다. 아빠가 엄마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엄마는 아빠가 누워 있던 침대에 불을 지르는 장면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네 살 아이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강박적으로 숫자를 세는 버릇을 갖게 됐다. 대마초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던 엄마를 대신해 그는 대마초를 포장했다. 어렸을 때부터 접했던 마약은 성인이 된 그를 마약중독자로 이끌었다. 투갈루대 재학 시절 그는 대마초를 판 돈으로 코카인을 샀다. 36시간 동안 쉬지 않고 코카인을 흡입할 정도로 중독은 심각했다. 마약중독자 대학생으로 위태롭게 살아가던 그는 미국 스탠퍼드대 물리학과 교수 아서 워커와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소수자를 뽑는 다양성 전형을 통해 스탠퍼드대 대학원 물리학과에 입학했지만 여전히 마약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에게 워커는 “앞으로 다신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는 신뢰와 위로의 말을 건넨다. 워커와의 면담 뒤 그는 재활프로그램에 들어간다. 매일 밤 코카인을 갈망할 때마다 그는 워커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이후 아서의 연구진이 된 그는 망원경을 통해 태양 표면을 덮은 코로나 고리, 화염 등을 세밀히 담은 이미지를 얻는 방법을 함께 연구해 성공했고 논문의 공저자가 됐다. 기댈 곳 없는 외톨이였던 그를 지탱해준 또 다른 버팀목은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지식에 대한 갈증으로 유년 시절 백과사전 22권을 완독한 그에게는 ‘교수님’이란 별명이 따라다녔다. 지능지수(IQ) 162로, 백과사전에서 접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매료돼 고등학교 때 상대성이론을 시연하는 컴퓨터 게임을 제작해 과학전람회에서 대상을 타기도 했다. 스탠퍼드대 재학 시절 백인 학생들의 은근한 무시에도 굴하지 않고 매일 도서관에서 밤을 새웠다. 양자역학에는 터널링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있다. 거시 세계에서는 결코 통과할 수 없는 벽을 미시 세계에서의 입자가 뚫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자신의 삶을 터널링에 비유한다. “나의 삶은 마치 새로운 벽을 마주해서 반대 방향으로 강하게 튕겨 나가면서도 결국은 벽을 통과하는 데 성공하는 진동 패턴과도 같았다.” 자신은 운명이 결정돼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 그리고 말한다. “우주는 광활하다. 그러나 무한하지는 않다. 유한하다. 내가 관측한 것 중에 무한에 가장 가까운 것은 바로 희망이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2022-06-18 03:00
“고독사 시작하시겠습니까” 초대장 받은 12명 이야기3일 출간된 장편소설 ‘고독사 워크숍’(민음사)에서 등장인물 12명은 발신자명 ‘심야코인세탁소’로부터 “오늘부터 고독사를 시작하시겠습니까”라는 내용의 ‘고독사 워크숍’ 초대장을 받는다. 학창시절 친구의 눈을 연필로 찌른 뒤 본능을 억누르고 사는 송영달, 부모의 골칫거리가 된 공시생 강재호 등 초대장을 받은 이들은 온라인 워크숍에 참여하며 위안을 얻는다. 16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저자 박지영 씨(48·사진)는 “프리랜서라 어디에 소속돼 있지 않기에 ‘연결’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고독사 위험군인 노년층은 국가가 관리하지만 소속 없이 고립된 젊은이들은 사각지대에 있다. ‘그들이 서로 연결된 공간이 있으면 어떨까’라는 상상이 소설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워크숍은 ‘하루 세 번 시시한 일을 수행함으로써 당신은 매일 더 시시한 인간이 되는 명랑을 누릴 것’을 강조한다. 참가자들은 매일 의미 없는 일을 하고, 이를 공유한다. 도서관 책에서 밑줄이 그어진 내용을 포스트잇에 옮겨 적기, 농담 한 개 만들기…. 워크숍의 핵심은 시시한 일을 하는 행위 그 자체보다, 시시한 일을 하는 자신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박 씨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신을 돌보는 걸 잊는다. 다른 사람들의 고독에 관여함으로써 자신이 다른 생명을 돌보는 힘을 가진 존재라는 걸 인식하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가도 스스로 고독사 워크숍을 했다. 그가 한 ‘시시한 일’은 하루에 벌어진 일 중 세 개로 해시태그 만들기. 이를 연결해 글을 썼다. “인간은 모두 고독할 수밖에 없지만 고독을 잘 가꾸는 게 중요해요. 각자만의 고독사 워크숍을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요?”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2022-06-17 03:00
“사내 성차별 겪은 날, 소설 주인공이 말 걸어와”9일 출간된 소설 ‘레슨 인 케미스트리’(다산책방)는 애플TV플러스 드라마로 제작돼 내년에 공개될 예정이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캡틴 마블’ 역으로 유명한 배우 브리 라슨이 원작을 보고 먼저 출연을 제안했다. 소설은 2년 전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22개국에 판권이 수출됐다. 여성 과학자가 드물던 1960년대 화학자 엘리자베스 조트가 편견을 이기고 TV 요리 프로그램 진행자로 성공하는 과정을 그렸다. 당시 여성들의 식사 준비는 허드렛일로 취급받았는데 요리를 마치 화학실험처럼 소개하는 조트의 프로그램은 큰 인기를 끈다. 레슨 인 케미스트리는 저자 보니 가머스(65)의 데뷔작이다. 오랜 세월 카피라이터로 일하다 뒤늦게 유년시절 꿈을 이뤄 소설가가 된 그를 최근 화상으로 만났다. 가머스는 “책의 첫 장을 쓴 5년 전 그날이 아직도 기억난다”며 입을 열었다. 당시 과학기술 분야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그는 남성이 대부분이던 조직에서 성차별을 겪었다고 털어놓았다. “회사에서 제가 발표를 했는데 아무도 반응이 없다가 똑같은 아이디어를 남자 상사가 발표하니 다들 좋다고 하더군요. 회의실에는 저만 여자였어요. 그런 식으로 제가 한 일이 다른 남성의 공으로 돌아간 적이 많았어요. 그날 화가 난 상태로 집에 와 책상에 앉았는데 조트가 저에게 말을 걸더군요. 노트북을 열고 첫 장을 쓰기 시작했어요.” 조트는 명석한 화학자이지만 실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조트의 실력보다 그의 외모에 관심을 보인 대학원 지도교수는 자신의 구애를 거절한 조트에게 누명을 씌워 박사 과정에서 쫓아낸다. 조트는 어렵사리 연구소에 들어가지만 남성 과학자들은 그의 성과를 가로챈다. “책을 낸 후 수백 명의 여성 과학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어요. 그들은 책에 묘사된 1960년대 실험실 풍경과 그들의 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더군요. 승진이 어렵고, 논문 아이디어를 도난당하는 상황이 많다고요. 과학계의 유리천장은 여전히 존재해요.” 책이 성공을 거둔 만큼 그가 드라마에 거는 기대도 크다. 드라마 제작팀 구성원의 면면도 화려하다.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2000년) 각본가로 유명한 수재나 그랜트가 각본을 맡았다. 주연 조트 역의 라슨은 총괄 프로듀서로도 참여한다. 그는 “책을 읽은 라슨이 ‘엘리자베스 조트를 스크린에 그대로 살려내고 싶다’고 연락해 왔다”며 “라슨은 페미니스트이자 훌륭한 배우이기에 조트를 훌륭하게 연기해낼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2022-06-16 03:00
“이런 순간 올줄 알았지만”… 세계 ‘아미’들 충격 속 응원방탄소년단의 그룹 활동 잠정 중단 선언에 팬클럽 ‘아미’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멤버들의 향후 행보를 응원했다. 한 한국인 팬은 15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런 순간이 올 줄은 알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방탄소년단이라는 이름은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아미란 이름과 함께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적었다. 이날 SNS에 영어로 글을 올린 아미는 “잠시 쉬어가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 미안해할 필요 없다. 한숨 돌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를 바란다”고 썼다. 일본 아미는 “고민이 많았을 텐데 개개인의 마음을 털어놓아줘서 고맙다”고 했다. 트위터에는 ‘#ARMY FOREVER, BANGTAN FOREVER’, ‘#방탄의_수고는_아미가_알아’ 등의 격려 해시태그가 퍼졌다. 멤버 뷔는 팬 커뮤니티 플랫폼 ‘위버스’에 “오랫동안 방탄으로 남아 있기 위한 건강한 발걸음의 시작이니 그 모습도 아미들이 좋아하실 거라 믿어요”라고 썼다. 이 글에는 “진솔한 대화로 생각을 전해줘 고맙다” 등 응원 댓글이 2만 개 넘게 달렸다. 세계적인 가수로 정상에 올랐지만 멤버 개개인의 삶을 위해 그룹 활동을 멈추기로 한 선택은 개인의 행복을 우선으로 하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 특유의 가치관을 보여준다는 분석도 나온다. 방탄소년단의 그룹 활동 중단 선언에 소속사 하이브 주가는 이날 장중 27.9%까지 폭락했고, 24.87% 하락한 채 거래를 마감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2022-06-16 03:00
상금 59억원 걸린 진짜 ‘오징어게임’ 열린다넷플릭스가 456만 달러(약 58억8700만 원)의 우승 상금을 내걸고 ‘오징어게임’ 대회를 개최한다고 14일(현지 시간) 밝혔다. 넷플릭스는 이날 트위터를 통해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이야기를 빌려 456만 달러의 상금을 놓고 참가자들이 경쟁하는 10부작 리얼리티 프로그램 ‘오징어 게임: 더 챌린지’를 제작한다고 발표했다. 드라마에 나온 각종 게임과 새로 추가한 게임으로 최종 우승자를 가린다. 넷플릭스는 “드라마 내용과 달리 대회 참가자들이 다치는 일은 없다”며 “큰 상금이 걸린 이번 대회에서 최악의 운명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어를 사용할 수 있으면 국적에 관계없이 ‘스퀴드게임캐스팅’ 사이트를 통해 참가 신청을 할 수 있다. 촬영지는 영국이다. 브랜던 리그 넷플릭스 수석부사장은 “황동혁 감독이 만든 ‘오징어게임’의 매혹적인 이야기와 상징적인 이미지는 세계를 열광시켰다”며 “우리는 이 허구의 세계를 현실로 전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긴장과 반전으로 가득 찬 역대 최대 규모의 대회에 456명의 실제 경쟁자들이 항해에 나서게 된다. 드라마 팬들도 매력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여정에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456억 원의 상금을 걸고 참가자들이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는 ‘오징어게임’은 넷플릭스 역사상 최고 흥행작이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2022-06-16 03:00
아미 “BTS, 진솔한 대화 고맙다” 응원…하이브 주가 24% 폭락방탄소년단의 그룹 활동 잠정중단 선언에 팬클럽 ‘아미’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멤버들의 향후 행보를 응원했다. 한 한국인 팬은 15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런 순간이 올 줄은 알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방탄소년단이라는 이름은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아미란 이름과 함께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적었다. 이날 SNS에 영어로 글을 올린 아미는 “잠시 쉬어가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 미안해할 필요 없다. 한숨 돌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를 바란다”고 썼다. 일본 아미는 “고민이 많았을 텐데 개개인의 마음을 털어놓아줘서 고맙다”고 했다. 트위터에는 ‘#ARMY FOREVER, BANGTAN FOREVER’, ‘#방탄의_수고는_아미가_알아’ 등의 격려 해시태그가 퍼졌다. 멤버 뷔는 팬 커뮤니티 플랫폼 ‘위버스’에 “오랫동안 방탄으로 남아있기 위한 건강한 발걸음의 시작이니 그 모습도 아미들이 좋아하실 거라 믿어요”라고 썼다. 이 글에는 “진솔한 대화로 생각을 전해줘 고맙다” 등 응원 댓글이 2만 개 넘게 달렸다. 세계적인 가수로 정상에 올랐지만 멤버 개개인의 삶을 위해 그룹 활동을 멈추기로 한 선택은 개인의 행복을 우선으로 하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 특유의 가치관을 보여준다는 분석도 나온다. 방탄소년단의 그룹 활동 중단 선언에 소속사 하이브 주가는 이날 장중 27.9%까지 폭락했고, 24.87% 하락한 채 거래를 마감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2022-06-15 16:29
“유리천장 겪었던 그날, 첫 장 쓰기 시작…여성과학자들 공감 얻어”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코다’와, 제작비 1000억 원을 들인 드라마 ‘파친코’로 2연타를 친 애플TV플러스의 기대작 중 하나는 곧 촬영에 들어가는 드라마 ‘레슨 인 케미스트리’(다산책방)다. 여성 과학자가 전무하던 1960년대 화학자인 엘리자베스 조트가 편견을 이기고 요리 프로그램 진행자로 성공을 거두는 과정이 그려진다. 당시 주부의 식사 준비는 허드렛일 취급을 받았지만 요리를 진지한 화학실험으로 대하는 조트의 모습에 전국 여성들이 열광한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이자 ‘캡틴 마블’ 역으로 유명한 배우 브리 라슨이 원작 소설을 보고 주연을 자처했다. 소설은 202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원고가 공개된 직후 22개국에 판권이 수출됐다. 국내에선 9일 출간됐다. 레슨 인 케미스트리는 놀랍게도 저자 보니 가머스(65)의 데뷔작이다. 평생 카피라이터로 일하다 뒤늦게 유년시절 꿈인 소설가가 된 그를 지난달 17일 화상으로 만났다. 가머스는 “책의 첫 장을 썼던 5년 전 그날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입을 열었다. 당시 과학·기술 분야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그는 남성이 대부분이었던 조직에서 성차별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회사에서 발표를 했는데 아무도 반응이 없다가 똑같은 아이디어를 남자 상사가 발표하니 다들 좋다고 하더군요. 당시 미팅룸엔 저 혼자 여자였어요. 그런 식으로 제가 한 일이 다른 남성의 공으로 돌아간 적이 많았어요. 그날 너무 화가 난 상태로 집에 와 책상에 앉았는데 엘리자베스 조트가 저에게 말을 걸더군요. 바로 노트북을 열고 첫 장을 쓰기 시작했어요.” 조트는 명석한 화학자의 자질을 갖췄지만 그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됐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박사과정에서 담당 교수는 조트의 실력보다 그의 아름다운 외모에 더 관심이 컸고, 자신의 일방적 구애를 거절한 조트에게 누명을 씌워 박사과정에서 조트를 쫓아낸다. 조트는 어렵사리 헤이스팅스 연구소에 들어가지만 남성 과학자들은 그의 성과를 가로채고, 여성 직원들은 “얼굴로 여기까지 왔다”며 그의 실력을 폄하한다. “책이 발간된 뒤 수백 명의 여성 과학자들로부터 메시지를 받았어요. 그들은 책에 묘사된 1960년대 실험실 풍경과 지금 그들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더군요. 승진이 어렵고, 논문의 아이디어를 도난당하는 상황이 많다고요. 과학계의 유리천장은 여전히 존재해요.” 5년 간 책을 쓰면서 1960년대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가늠하는데 참고한 자료는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불리는 1963년작 ‘여성성의 신화’(갈라파고스). 여성들이 사회로부터 아이를 기르고 남편을 내조하는 가정주부로서의 역할만 강요받는 당대 시대상을 비판한 책이다. “저의 어머니 세대의 시절을 생생하게 묘사한 책이었어요. 당시 여자는 수표에 서명을 하려면 남편의 공동서명이 필요했고,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을 소유할 수도 없었죠. 여자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사서, 간호사, 교사 뿐이었어요. 1960년대에 비해 상황은 나아졌지만 충분치 않아요. 유년시절 학교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에 기대되는 역할이 달랐고, 지금도 직장에서 남성과 같은 일을 해도 보수를 덜 받거나, 공을 빼앗기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되죠.” 책이 성공을 거둔 만큼 그가 드라마에 거는 기대도 크다. 드라마 제작을 위해 꾸려진 팀 구성원의 면면도 화려하다. ‘에린 브로코비치’ 각본가로 유명한 수재나 그랜트가 드라마 각본을 맡는다. 주연 조트 역을 맡은 라슨은 총괄 프로듀서로도 참여한다. 그는 “라슨의 소속사에서 책을 읽어볼 독점적 권한(exclusive read)을 달라고 먼저 요청했고, 원고를 읽은 라슨이 ‘엘리자베스 조트를 스크린에 그대로 살려내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며 “라슨은 페미니스트이자 훌륭한 배우이기 때문에 조트를 훌륭하게 연기해낼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2022-06-15 10:44
친구이자 맞수였던… 경제학의 두 이정표[책의 향기]사상에선 적, 사적으로는 친구. 20세기 위대한 경제학자로 불리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새뮤얼슨(1915∼2009)과 밀턴 프리드먼(1912∼2006)의 관계는 이렇게 요약된다. 두 사람은 1965년부터 18년간 미국 주간지 뉴스위크 칼럼을 통해 인플레이션의 원인과 해결책, 정부의 시장 개입 등의 쟁점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1932년 미국 시카고대 경제학과 학부생과 대학원생으로 만나 둘 다 각각 94세에 숨을 거둘 때까지 평생 깊은 우정을 나눈 동료이기도 했다. 15일 출간된 책은 ‘시장의 자유’를 둘러싸고 벌어진 세기의 대결과, 그 뒤에 가려졌던 두 사람의 동료애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영국 언론인인 저자는 전작 ‘케인스 하이에크’(부키)에서 20세기 전반의 경제학계 라이벌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격돌을 다뤘다.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의 대결 중심에는 인플레이션이 있었다. 1960년대 당시 세계 물가상승률이 치솟으면서 미국이 하이퍼인플레이션에 빠진 데 따른 것. 새뮤얼슨을 비롯한 케인스주의자들은 경제가 성장하면서 수요가 증가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고 봤다. 그러나 당시 미국 경제는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발생하는 스태그플레이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새뮤얼슨은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 케인스주의의 관에 대못을 박았다”고 말했다. 반면 프리드먼은 승승장구했다. 통화와 인플레이션이 직접 연관돼 있다고 보는 통화주의자인 그는 통화량이 경제성장 속도보다 빨리 늘어난 게 인플레이션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중앙은행이 화폐 공급량을 통해 경기를 조절해야 한다는 프리드먼의 해결책은 효과를 냈다. 그는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다”라고 단언했다. 정부의 시장 개입을 둘러싼 두 사람의 논쟁도 생생하게 펼쳐진다. 새뮤얼슨은 정부가 시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강력한 재정정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프리드먼은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자유 시장의 힘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는 일은 비록 의도가 좋더라도 자유 시장을 방해해 경제성장을 저해한다는 것. 1930년대 대공황과 1960년대 하이퍼인플레이션 이후 글로벌 경제위기는 두 차례 더 찾아왔다. 2008년 금융위기와, 2020년 세계를 강타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경제위기다. 저자는 이후 두 차례의 경제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은 케인스와 새뮤얼슨의 손을 들어줬다고 평가한다. 2008년 발생한 금융위기를 진화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수조 달러의 지출을 통해 직접 경기를 부양하는 케인스식 정책을 택했다. 코로나19로 대공황 이래 경제성장률이 최저 수준으로 곤두박질하자 미국 영국 등 각국 정부는 록다운(봉쇄)을 선언하고 시민들에게 지원금을 지급하며 큰 정부를 자처했다. 저자는 각국의 코로나19에 따른 경제위기 해결 방식에 대해 ‘시장에서 정부 입김을 지우고자 했던 프리드먼의 바람을 완전히 무너뜨렸다’고 평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2022-06-11 03:00
난징대학살-문화대혁명 폭력의 역사속 인간선과 악. 소설가 정찬(69·왼쪽 사진)은 둘의 분리를 경계한다. 악 속에 선이 있고 선 속에 악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3일 출간된 그의 열세 번째 장편소설 ‘발 없는 새’(창비·오른쪽 사진)에도 그 주제의식이 담겼다. 중국 전통악기 ‘얼후’ 연주가이자 역사학자인 주인공 워이커씽에게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피가 함께 흐른다. 워이커씽의 어머니는 난징(南京)대학살 당시 일본군에게 성폭행 당해 워이커씽을 낳았다. ‘어머니가 강간당하는 꿈을 간헐적으로 꿨다. 그 광경을 꿈의 어디선가 보고 있던 나는 강간하는 자가 아버지임을 알고 있었다’고 워이커씽은 고백한다. 7일 전화로 만난 정 작가는 “워이커씽에게 가해자와 피해자의 영혼이 모두 담긴 것처럼 우리 모두 가해자임과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대화하려는 태도가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허구의 인물인 워이커씽을 중심으로 소설에는 홍콩 영화배우 장궈룽(張國榮), 베스트셀러 논픽션 ‘난징의 강간’을 쓴 중국계 미국인 역사가 아이리스 장, 중국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한 영화 ‘패왕별희’의 감독 천카이거 등 실존 인물들이 등장한다. 워이커씽은 장궈룽이 ‘패왕별희’의 데이 역은 삶의 고통이 너무 큰 캐릭터여서 이입하기 어려워하자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 아이리스 장과는 난징대학살의 진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활동한다. 실존 인물과 허구 인물을 통해 난징대학살, 일본군 성노예제, 문화대혁명 등 20세기 전반에 걸친 폭력의 역사를 짚는다. 그가 소설 집필 중 가장 많이 본 책은 천카이거 감독의 논픽션 ‘나의 홍위병 시절’(1991년). 홍위병은 마오쩌둥을 지지하며 문화대혁명에 나선 학생들로, 천카이거는 중학교 때 홍위병이 돼 국민당 활동을 한 자신의 아버지를 비판했다. 정 작가는 “천카이거를 통해 역사적 상황으로 인한 소년의 번민, 고통을 생생히 느꼈다. 정치와 권력이라는 외부 상황 자체보다 그 상황에 던져진 인간의 존재 양식이 중요하다는 내용을 담은 이 책은 ‘발 없는 새’의 주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고 했다. 5·18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그의 1992년 소설집 ‘완전한 영혼’부터 이번 신작까지 정 작가는 권력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 폭력에 희생되는 개인의 문제에 천착해 왔다. “권력은 우리 생활 도처에 있어요. 남성과 여성, 빈자와 부자, 부모와 자녀 등 모든 인간관계는 권력에 의한 상하관계가 만들어집니다. 권력을 가진 이는 상대를 자신보다 낮은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공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2022-06-08 03:00
“이중섭 ‘황소’엔 어머니와의 분리불안이 그려져 있다”《“그림 속에는 그것을 그린 사람, 즉 작가가 커튼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습니다.”박수근(1914∼1965), 이중섭(1916∼1956) 등 한국 근대미술 거장들의 작품엔 작가의 어떠한 내면과 무의식이 녹아 있을까. 지난달 출간된 ‘그림, 그 사람’(아트북스)의 저자인 김동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겸 미술평론가(53)는 박수근 이중섭 진환 황용엽 양달석 김영덕 신학철 서용선 등 한국 근현대 화가 8명의 작품을 바탕으로 이들의 내면을 분석했다.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6일 만난 김 씨는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다양한 엽서화로 그린 이중섭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냈다. 김 씨는 그의 작품에서 ‘이중섭과 어머니의 강력한 영유아기 애착관계’를 엿볼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이중섭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랍니다. 보통학교 3, 4학년 때까지 어머니의 젖을 먹을 정도로 과도한 애착관계를 보이죠. 이는 역으로 분리불안을 낳았고, 그게 아내와의 이별을 극도로 괴로워하는 모습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이중섭의 대표작 ‘황소’에도 어머니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작가의 욕구가 담겼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희생과 헌신이라는 모성적 원형을 간직한 소에 힘차고 강인한 남성적 이미지를 덧씌운 것이 이중섭의 황소”라며 “어머니와 자신의 모습을 동시에 담아 하나가 되고자 하는 공생적 욕망이 반영됐다”고 분석했다. 물감을 덧칠하는 기법으로 유명한 박수근에 대해선 억압을 작품 활동의 원천으로 꼽았다. “박수근은 가세가 기울어 양구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지만 좌절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내재된 억압과 인내가 많게는 20번가량 물감을 덧칠해 그림을 완성하는 ‘겹’으로 표현됐다고 봅니다.” 다양한 인간상을 그려 온 황용엽(91)은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김 씨는 “황용엽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인간의 모습은 괴기스럽다”며 “작가가 인민군 징집을 피하기 위해 월남하고 6·25전쟁에 참전해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며 겪은 상처가 어둡고 기괴한 인간상으로 구현된 것”이라고 했다. 도시의 소외된 인간군상을 다룬 서용선(71)에 대해선 뚜렷한 직업이 없던 그의 아버지가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서용선의 아버지는 꽃을 키우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즐겼지만 가장으로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은 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삶을 통해 시대상과 문제점을 비판하려는 무의식적 의도가 작품에 담겼습니다.” 의사인 그가 미술에 빠져든 건 신촌 세브란스병원 레지던트였던 20년 전 우연히 박수근 화집을 접하면서다. “종로서적에서 박수근의 그림을 접했을 때 어린 시절의 향수를 느꼈어요. 강렬한 느낌에 매료됐죠.” 이후 박수근의 드로잉 ‘초가’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300여 점의 드로잉을 수집했고, 2019년엔 전시회도 열었다. 그는 신간을 준비하며 박수근 진환 양달석 작가의 경우 유가족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림은 화가들의 내면이 담긴 일종의 정신적 증상입니다. 작가의 삶과 행동 전반을 통해 그 심리까지 파고들면 작가와 작품에 대해 좀 더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2022-06-08 03:00
“이중섭 ‘황소’엔 어머니와의 분리불안이 담겨있다”화가 이중섭(1916~1956)의 지극한 아내 사랑은 유명하다 6·25전쟁 당시 월남한 후 경제적 문제로 1952년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 처가로 돌려보낸 이중섭은 아내와 아이들을 다시 만나는 것에만 골몰했다. 그는 1955년 4월 대전에서 개인전을 마친 뒤 자학, 거식증, 피해망상 등 정신질환 증세를 보인다. 개인전이 실패로 돌아가 돈을 벌지 못하면서 아내를 만날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이중섭은 왜 그토록 아내와의 이별을 두려워했을까? 지난달 26일 출간된 ‘그림, 그 사람’(아트북스)을 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겸 미술평론가 김동화 씨(53)는 6일 서울 종로구 카페에서 “사랑하는 대상의 원형인 어머니와의 관계 문제가 먼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화가가 3~5세 사이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의 애정은 막내였던 화가에게 집중됐다. 화가는 보통학교 3~4학년 때까지 어머니의 젖을 먹었고 좋아하는 이성상에 대해 “어머니처럼 편한 여자가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강력한 영유아기 애착관계가 분리불안을 낳았고, 그게 아내와의 관계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했다. 책은 이중섭을 비롯해 박수근 진환 양달석 황용엽 등 한국 근현대화가 8인의 그림을 통해 그들의 내면을 진단했다. 책은 화가의 정신역동(인간 행동의 밑바닥에 잠재해 있는 무의식적인 힘)이 그림에 어떻게 반영됐는지 분석한다. 김 씨는 이중섭의 ‘황소’에 어머니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욕구가 담겼다고 본다. 그는 “희생과 헌신이라는 모성적 원형을 간직한 소에 불알이 강조된 수소의 이미지를 덧씌운 것이 이중섭의 황소다. 황소에 어머니와 자신의 모습을 동시에 담은 것”이라며 “어머니와 자신이 하나가 되고자 하는 공생적 욕망이 반영됐다”고 말했다. ‘세 사람’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등 그의 작품에서 꾸준히 드러나는 원환구도 역시 어머니와 하나의 덩어리가 되고자 하는 욕구의 발현이라는 게 그의 분석이다. ‘국민화가’로 불리는 박수근(1914~1965)의 경우 ‘억압’이라는 방어기제를 그의 주된 정신역동으로 봤다. 보통학교 진학 후 가세가 기울어 상급학교 진학에 실패하고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해야 했지만 내향적 성격과 감내의 기질을 타고난 그는 좌절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고. 그러한 억압의 정신역동이 여러 번 물감을 덧칠해 그림을 완성하는 ‘겹’으로 드러났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그는 “참고 또 참는 것의 반복이었던 박수근의 인생궤적처럼 그의 그림도 물감을 많게는 20번 가량 올리고 또 올리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계속해서 쌓고 견디며 또 올리는 ‘겹’은 내적 소망을 억압하는, 욕망의 죽음과도 같다”고 설명했다. 살아있는 황용엽, 2020년 별세한 김영덕의 경우 저자가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그들의 실제 구술이 들어가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첫 인터뷰를 5시간 동안 했다는 황용엽은 어머니의 유방절제술로 친모와 유모 두 양육자를 둬야 했던 유년기, 인민군 징집을 피하기 위한 도피와 월남, 생사의 기로를 넘나든 참전의 경험을 생생하게 털어놓는다. 김 작가는 “황용엽이 수도 없이 그린 ‘인간’은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그가 겪은 정신적 외상이 그로테스크하고 감정표현불능(자신 또는 타인의 감정상태를 인식 또는 언어화하지 못하는 증상)적 양상으로 화폭에 드러났다”고 했다. 화가들의 내밀한 심리를 정교하게 분석할 수 있었던 건 20여 년 간 그림에 천착해 온 덕이다. 신촌 세브란스병원 레지던트 시절 종로서적에서 박수근 화집을 보고 그림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매료된 그는 지도에 화랑을 표시해 1주일 동안 전국 화랑을 다 돌았다. 이후 그로리치 화랑에서 산 박수근의 드로잉 ‘초가’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300여 점의 드로잉을 수집해 2019년 전시회도 열었다. 그는 “시중에 나와 있는 미술서적 중 안 본 게 거의 없다. 화가들과 관련된 모든 기록들에서 시작해 박수근 진환 양달석 선생님의 경우 유가족들을 직접 만났고, 생존한 화가는 직접 진술을 듣는 방식으로 치밀하게 분석했다”고 말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2022-06-07 11:15
이리저리 내몰려도 무너져선 안되는 삶모피방. 기본 골조 외에 아무것도 없는 방을 말한다. 창문도, 전등도, 문턱도, 심지어 초인종도 없다. 모피방은 기본 자재를 뜯어내고 고급스럽게 인테리어를 하려는 부자들에게 인기를 끌다가 점차 가난한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 아무 옵션도 안 들어가 싸게 매매되기 때문이다. 단편소설집 ‘모피방’(민음사)의 저자 전석순 작가(39·사진)는 1일 전화 인터뷰에서 “모피방은 원래 모든 것이 다 될 수 있는 방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가능성이 다 닫혀있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이 됐다”고 말했다. 지난달 20일 출간된 ‘모피방’의 주인공들 역시 선택권이 없어 열악한 공간으로 밀려난 빈곤층이다. 단칸방에서 월세, 전세로 가기 위해 수십 년간 위험한 건물 철거 현장에서 일한 가장을 다룬 ‘수납의 기초’부터, 임종을 앞둔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인근 호텔방에서 생활하는 부부를 다룬 ‘때 아닌 꽃’까지. “방이라고 볼 수 없는 곳으로까지 내몰리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그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싶었어요.” 표제작인 ‘모피방’은 아버지가 평생 일해온 세탁소가 시청의 부지 확장으로 철거되는 상황을 겪은 저자의 경험이 녹아 있다. 주인공은 세탁소 철거를 원치 않는 아버지와,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싸고 넓은 모피방으로 이사 가자는 아내 사이에서 신음한다. “주인공은 아버지와 아내 사이에서 혼란스럽지만 무너져서는 안 돼요. 간신히 균형을 맞추려는 감정을 세탁소와 모피방을 통해 표현했죠. 그 아슬아슬한 균형을 우리 모두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경제적 문제로 좁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하거나, 삶의 터전이 재개발로 철거되는 상황을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으니까요.”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2022-06-07 03:00
“다음 팬데믹 대응위해 세계적 조직 마련하자”“문제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67)는 10일 출간되는 ‘빌 게이츠 넥스트 팬데믹을 대비하는 법’(비즈니스북스)에서 2014년 서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퍼진 에볼라바이러스에 대한 세계의 대응을 이렇게 진단했다. 게이츠는 팬데믹 대응 시스템의 부재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까지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번 책에서 질병의 ‘아웃브레이크’(특정 지역에서 작은 규모로 질병이 급증하는 현상)가 팬데믹이 되는 것을 막는 시스템을 정부, 과학자, 기업, 개인이 구축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세계가 시작해야 할 액션 플랜의 출발점은 팬데믹에 대응하는 세계적 조직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는 “세계보건기구(WHO)조차 자금이 넉넉하지 않고, 팬데믹 전담 인력이 거의 없다”고 지적한다. 팬데믹 대응 조직에 전염병학, 유전학, 약물 및 백신 개발, 외교 등 전 분야의 인재를 두고, 세계은행과의 협력을 통해 자금을 빠르게 조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병원체가 확인된 후 6개월 내에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백신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가 기대를 거는 기술은 ‘메신저리보핵산(mRNA)’이다. 이 기술은 코로나19가 터진 후 모더나와 화이자가 1년여 만에 도입한 기술로, 지속적으로 변이를 일으키는 바이러스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게이츠는 “미래의 아웃브레이크에서는 최초 확진과 최초 백신 후보가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몇 주 혹은 며칠 단위로 측정하게 될 것이고, mRNA가 이를 가능케 할 기술로 자리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며 mRNA 기술에 대한 충분한 투자와 연구를 권고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제안하는 건 팬데믹 전담 조직 주도하에 ‘현장 종합 훈련’을 진행하자는 것. 아웃브레이크를 경험하는 도시를 지정하고, 병원체에 대한 진단 검사가 얼마나 빨리 개발되는지, 공급망이 단절될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등을 시뮬레이션하자는 것이다. 훈련에서 발견한 사실 중 의미 있는 내용을 세계 지도자들에게 꾸준히 알리고 필요한 사항을 요청해야 한다고 강조한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2022-06-06 03:00
[책의 향기]현대 의학기술의 ‘진짜 목표’를 묻습니다“의료제도가 건강에 주요한 위협이 되고 있다.” 오스트리아 사제이자 사회비평가 이반 일리치가 1975년 출간된 ‘의료의 한계’에서 던진 경고다. 의학이 오히려 건강에 위협이 된다는 그의 주장은 너무 파격적이어서 당시 의료계는 그를 ‘아픈 사람’이라고 치부했다. 철저히 무시됐던 일리치의 주장은 소화기내과 전문의인 저자에게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아일랜드에서 의사 자격을 얻고 영국 의료계에서 일하던 저자는 경력의 정점에서 그동안 누구를 위해 일해 왔는지 되돌아본다. 그리고 의학기술의 발전과 연구가 환자가 아닌 의학계만을 위한 행위였다고 고발한다. 저자는 현대의학이 병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한다. ‘비셀리악 글루텐 과민증’이 대표적이다. 셀리악병 환자들은 글루텐 성분에 민감해 과민성대장염을 앓는다. 하지만 셀리악병이 없어도 과민성대장염 증상을 겪는 환자들도 있다. 몇몇 연구자는 이들 증상의 원인 역시 글루텐이라 주장하며 ‘비셀리악 글루텐 과민증’이라는 신종 질병을 만들어 낸다. 저자는 이러한 질병의 창조가 ‘수백만 명의 환자가 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에게 이익이 되고, 글루텐 무함유 식품의 폭발적 판매 증대로 식품산업에 이익을 안겨주며, 증상이 있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기 쉬운 진단명을 내세우기 위함’이었다고 지적한다. 현대의학이 암을 다루는 방식도 비판한다. 1971년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국가 암퇴치법’에 서명한 것을 시작으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6년 “미국을 암 완전정복 국가로 만들자”고 밝혔다. 이런 구호가 무색한 건 항암제 개발에서 잘못된 지표가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의 지표는 질병은 남아있으나 더 악화되지 않는 기간인 ‘무진행 생존기간’. 저자는 전체 생존기간은 비슷하지만 무진행 생존기간만 늘어나는 신약 임상시험 결과가 많이 나오고 있다는 점을 든다. 신약을 사용하면 암이 더 커지지 않게 할 뿐 생명 자체를 의미 있게 연장시키는 건 아니라는 것. 2002년부터 2014년까지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한 신규 항암제 48개로 생명이 연장된 기간은 평균 2.1개월에 불과했다. 그는 새 치료법이 나오면 두 가지 질문을 던져보라고 조언한다. ‘누구에게 이익인가’ ‘그것 때문에 삶이 더 행복해질 것인가’. 호스피스 의료, 통증 완화와 치유에 주목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삶의 상업화, 거대 다국적 기업의 욕망에 가려 간과됐던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2022-06-04 03:00
“자신의 분신과 대면한 8명의 반응 쓰고 싶었다”2021년 3월 파리에서 출발한 뉴욕행 비행기는 난기류를 만나 위기를 겪은 뒤 착륙한다. 석 달 뒤 똑같은 기장과 승무원, 승객이 탑승한 파리발 비행기 역시 난기류를 뚫고 뉴욕에 도착한다. 석 달이라는 시간차가 있을 뿐 3월의 승객과 6월의 승객은 DNA까지 정확히 일치하는 동일인이다. 지난달 26일 출간된 장편소설 ‘아노말리’(민음사)는 분신과 마주한 8명의 이야기다. 전대미문의 사건을 인지한 미국 정부는 과학자를 소집해 사태의 실체를 파헤친다. 이 책은 2020년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프랑스 공쿠르상을 수상했고, 프랑스에서만 110만 부 이상 팔렸다. 서울 종로구에서 2일 열린 간담회에서 저자 에르베 르 텔리에(65·사진)는 “오늘 오전 7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세 달 뒤 제 분신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농담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나 자신과의 대면’에 대한 고민이 책의 시작이었다. 8명의 인물이 자신의 분신과 대면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해 이야기를 썼다”고 했다. 아노말리는 ‘변칙’, ‘이상’이란 뜻. 르 텔리에는 “코로나19로 미쳐 돌아가는 세상과 공명하는 제목이 됐다. 무미건조했던 제목이 이 시기를 만나 멋지게 재해석됐다”고 했다. 등장인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분신에 대응한다. 청부살인업자 블레이크는 ‘두 명의 나’는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분신을 납치해 죽인다. 석 달 사이 임신을 한 분신과 마주한 변호사 조애나는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자신의 집과 경력, 연인까지 포기하고 도망친다. 대응 방식은 각양각색이지만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행동한다. 르 텔리에는 “살면서 여러 갈림길이 나타나고, 인생이 급류를 타고 변화하거나 두 번째 기회를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며 “그 속에서 본질적으로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은 무엇인지 고민하길 바랐다”고 말했다. 수학자이기도 한 저자는 분신이 등장하게 된 가설로 ‘보스트롬의 모의실험’을 제시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슈퍼컴퓨터에 의한 시뮬레이션이라는 이론이다. “우리가 시뮬레이션에 의한 가상세계에 살고 있다는 가정이 문학적으로 멋진 은유라 생각했습니다. 소설은 우리 세계에 대한 은유이고, 독자들이 그 세계로 들어가 실제와 같은 경험을 하니까요. 시뮬레이션이 가능한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고 싶습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2022-06-03 03:00
“사회의 어두운 면 매일 목격하지만 인간의 선함 믿어”검정색 반팔에 운동복 반바지, UFC가 적힌 백팩. 다부진 체격에 언뜻 보면 운동선수 같은 곽경훈 작가(44)는 11년 차 응급의학과 전문의다. 최근 서울 종로구 카페에서 만난 그는 “오늘 새벽까지 병원에서 당직을 서고 와서 옷을 못 갈아입었다”며 웃었다. 달리기 5km, 로잉머신 1만 km, 주짓수 중 하나를 매일 1시간씩 해 운동복 차림일 때가 많다고 했다. “응급실에서는 긴장된 상황에서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해야 해 체력이 중요해요. 피곤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귀찮아지거든요.” 운동에 진심인 그는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 8일 펴내는 ‘응급실의 소크라테스’(포르체)는 그의 여섯 번째 책. 그가 응급실에서 만난 환자와 보호자들을 통해 느낀 점을 담았다. “응급실은 사회의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모든 사람이 옵니다. 인간의 욕망과 약점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곳이죠. 응급실에서 본 인간 군상을 통해 한국 사회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책에는 “피곤해서 쉬러 왔다”며 병상을 요구하며 갑질하는 국회의원부터 종교적 신념으로 수혈을 거부하는 환자 가족까지 각종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그가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환자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의료보험이 없어 당뇨병 치료 시기를 놓친 탓에 중증질환으로 악화한 불법 체류자나,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패혈증으로 사망할 수 있는 담관염 진단을 받았음에도 돈이 없어 자식을 퇴원시키기로 한 아버지도 있었다. “몇 년 전 한 트랜스젠더가 도착 시 사망(DOA)으로 실려 왔어요. 혼자 집에서 쓰러졌는데 그날 일하던 바에 출근하지 않아 동료가 와서 발견한 거죠. 연락이 닿는 가족이 없어 동료 혼자 응급실에서 서럽게 울더군요. ‘평생 차별받다 죽을 때도 혼자 가는구나’라는 생각에 씁쓸했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의 가난에 무뎌진 사람들, 학대받는 아이들…. 사회의 어두운 면을 매일 목격하지만 그는 인간의 선함을 믿는다고 했다. “‘불법체류자니까, 성소수자니까 어떨 것이다’라는 식의 선입견이 깨졌어요. 교육 수준, 빈부, 국적을 떠나 진심을 갖고 선의로 다가가면 상대방도 선의로 대해 주더라고요.” 어릴 때 소설가를 꿈꿨지만 의사가 된 그는 응급의로 마주하는 예측 불가능성과 현장성을 사랑하기에 작가와 의사, 두 길을 모두 걸어갈 거라고 했다. “생텍쥐페리는 성공한 작가가 된 후에도 여권 직업란에 늘 조종사라고 쓸 만큼 비행을 사랑했어요. 저도 ‘해리포터’ 같은 책을 써서 억만장자가 되더라도 응급의학과 의사를 계속 할 겁니다. 하하.”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2022-06-02 03:00
쉬러왔다며 ‘베드’ 요구하는 의원님…영화냐구요? 응급실 현장입니다검정색 반팔, 반바지의 운동복, ‘UFC’가 적힌 커다란 백팩. 그을린 피부에 다부진 체격 의 곽경훈 작가(44)는 언뜻 보면 운동선수 같지만 경기 성남시 분당제생병원에서 일하는 11년차 응급의학과 전문의다.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카페에서 만난 그는 “오늘 새벽까지 당직을 서고 병원에서 자다 와서 옷을 못 갈아입었다”며 웃었다. 러닝 5km, 로잉머신 1만km, 주짓수 세 가지 중 하나를 매일 1시간씩 하기에 운동복 차림일 때가 많다. “응급실에서는 긴장된 상황에서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을 내려야 하기에 체력이 굉장히 중요해요. 피곤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귀찮아 지거든요. 그 때 사고가 발생해요.” 그는 운동선수만큼 체력단련에 열심인 의사이면서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 8일 나오는 ‘응급실의 소크라테스’(포르체)는 그의 6번째 책이다. 책은 그가 응급실에서 만난 환자와 보호자, 선후배 의사 등을 통해 느낀 점을 담았다. “응급실은 사회의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모든 사람이 옵니다. 사람의 욕망과 약점이 가감없이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죠. 응급실에서 본 인간군상을 통해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인간의 ‘욕망과 약점’을 담고 싶었다는 설명에 맞게 책에는 ‘피곤해서 쉬러 왔다’며 응급실 ‘베드’(침대)를 요구하는 국회의원부터 종교적 신념으로 환자의 수혈을 거부하는 가족까지 영화에서 볼 법한 장면들이 펼쳐진다. 곽 작가가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환자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다. 의료보험이 없어 당뇨병을 제때 치료받지 못해 케톤산증이라는 중증질환으로 악화한 불법체류자, 자식이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패혈증으로 사망할 수 있는 담관염을 진단받았음에도 “병원비가 없다”며 집으로 가겠다는 아버지…. “몇 년 전 한 트랜스젠더가 DOA(도착 당시 사망)로 실려왔어요. 혼자 집에서 쓰러졌는데, 그날 일하던 바에 출근하지 않아서 동료가 그 집에 갔다가 죽은 걸 알게 됐죠. 가족도 아무도 없이 동료 혼자 응급실에서 서럽게 울더라고요. ‘살아서 차별받다가 죽을 때도 혼자 가는구나’라는 생각에 씁쓸했죠.” 갑질하는 권력자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가난에 무뎌진 자들, 학대받는 아이들…. 사회의 어두운 면을 매일 목격하지만 그는 ‘인간의 선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불법체류자니까, 성소수자니까 어떠할 것이다’라는 식의 인간을 향한 선입견이 많이 깨졌어요. 교육수준이나 빈부, 국적을 떠나 내가 진심을 갖고 선의로 대하면 상대방도 나에게 선의를 갖고 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유년시절 소설가와 인류학자를 꿈꿨지만 부모님의 권유와 현실적 판단으로 의사가 된 그는 작가의 꿈도 놓지 않고 있다. 지난해에만 4권의 책을 출판사들과 계약했다. 주로 응급실에서의 경험담을 다룬 에세이를 썼지만 최근에는 다크 판타지 장르의 소설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응급의학과 의사의 예측불가능성과 현장성을 사랑하기에 작가와 의사, 둘 다를 이어나갈 것이라고. “‘어린왕자’를 쓴 생 텍쥐페리도 성공한 작가가 됐지만 여권의 직업란에 늘 조종사라고 썼을 만큼 비행을 사랑했어요. 저도 ‘해리포터’같은 책을 써서 억만장자가 되더라도 응급의학과 의사 일은 계속 하면서 글을 쓸 겁니다.”인천=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2022-06-01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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