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선거는 이랬다…윌리엄 호가스 ‘선거의 유머’[김민의 그림이 있는 하루]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7일 14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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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의 계절이 지나갔습니다. 정당을 막론하고 모든 후보자는 ‘최후의 1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 하죠. 그 과정에서 각 후보자의 가치관이나 철학이 경쟁의 장에 오르지만, 때로는 불필요한 네거티브 선전이나 인신공격도 벌어집니다. 그럴 때면 유권자들은 환멸을 느끼게 되죠.

그런데 지금보다 훨씬 더 ‘하드코어’한 선거 경쟁의 장을 그림으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면 믿으시겠어요? 이 그림 속 선거 현장에서는 벽돌이 날아다니고, 검은 돈과 뻑적지근한 파티가 오고 가며, 거짓말도 난무합니다. 18세기 ‘막장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바로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스의 ‘선거 시리즈’입니다. 함께 감상해 볼까요?

○ 최후의 만찬 패러디한 ‘선거 엔터테인먼트’
윌리엄 호가스, ‘선거 엔터테인먼트’(An Election Entertainment), ‘선거의 유머’(The Humours of an Election) 시리즈 중에서. 1755년.
윌리엄 호가스, ‘선거 엔터테인먼트’(An Election Entertainment), ‘선거의 유머’(The Humours of an Election) 시리즈 중에서. 1755년.

우선 그림 전체의 구도를 볼까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떠오르지 않나요? 화면 가운데 식탁이 펼쳐져 있고, 그 식탁을 둘러싼 사람들과 뒤편의 창문. 이 그림은 정확히 ‘최후의 만찬’ 구도를 차용했습니다.

레오나드로 다 빈치, 최후의 만찬, 1490년대
레오나드로 다 빈치, 최후의 만찬, 1490년대

그런데 다빈치 그림 속에서는 예수와 성자들의 엄숙한 식사가 진행됐다면, 이 그림은 정말 어지럽고 복잡합니다. 하나하나 살펴보시죠.


그림의 배경은 선술집. 테이블 가장 왼쪽에 선거에 출마한 두 명의 후보자가 앉아 있습니다. 번듯하게 차려 입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것 같지만 그림 속 모습은 정 반대입니다. 젊은 후보자는 배가 나온 여인의 키스를 받고 있네요. 그런데 그 여인의 뒤로 이 후보자는 다른 여자와 손을 잡고 있습니다.


나이 든 후보자(그림2)를 볼까요? 술에 취한 두 명의 남성에게 붙잡혀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손을, 다른 사람에게는 귀를 붙잡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네요. 그렇지만 한 표라도 더 얻으려면 꾹 참고 견뎌야겠죠.


이 두 사람 맞은편에 앉은 인물은 시장입니다. 겉옷이 반쯤 벗겨져있고 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앉아있네요. 팔을 자세히 보면 천으로 묶고 피를 뽑아내는 중입니다. 시장의 앞에 굴 껍질이 잔뜩 놓여있는데, 굴을 너무 많이 먹어서 치료를 받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대접을 받아도 너무 과하게 받은 거죠.


클라이막스는 오른쪽 아래의 인물입니다. 책을 갖고 있던 붉은 의상의 인물이 의자 뒤로 넘어지고 있습니다. 미국 의회 도서관에 따르면 이 인물은 선거관리위원이라고 하네요. 창문 밖의 반대파 당원들이 던진 벽돌에 맞아 쓰러지는 중입니다. 그 왼쪽에는 취객의 머리 위로 도살업자가 진(술)을 퍼붓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거의 유일하게 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자리를 차지한 3명의 음악가들입니다. 작가는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음식은 물론 신체적 접대까지도 행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경멸을 어떠한 필터도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그림 속 풍경은 다소 과장되었지만, 18세기 영국에서 이런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투표를 할 수 있는 유권자가 상당한 자산을 가진 남성으로 한정되었다고 해요. 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후보자들이 각종 금품과 향응을 제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그림과 같은 접대 자리가 열린 것은 물론, 투표일에는 거마비와 술을 제공하며 유권자들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 죽은 사람도 동원하는 ‘투표소’
호가스의 ‘선거의 유머(Humours of an Election)’ 시리즈는 총 4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앞에서는 그 중 가장 첫 번째인 ‘선거 엔터테인먼트’를 살펴보았는데요. 이번엔 세 번째 그림, ‘투표’를 한 번 감상해볼까요.

윌리엄 호가스, 투표(The Polling), ‘선거의 유머’ 시리즈 중에서. 1755년.
윌리엄 호가스, 투표(The Polling), ‘선거의 유머’ 시리즈 중에서. 1755년.

목조 건물의 좌우에 걸린 푸른색, 붉은색 깃발이 보입니다. 그 뒤로는 각 당 후보자들이 의자에 앉아 있고요. 투표날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인데, 21세기의 투표와는 완전히 다르죠? 계단 위로 올라가, 후보자가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의 표를 행사하게 됩니다. 비밀투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구조입니다. 투표하러 오는 유권자들을 당원들이 마치 호객행위 하듯이 붙들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더욱 가관인 장면들이 펼쳐집니다. 중앙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의 눈을 볼까요. 초점이 흐린 모습입니다. 이 작품의 판화를 소장하고 있는 브루클린 뮤지엄 설명에 따르면 사리분별을 할 수 없는 사람을 데려다가 억지로 투표를 시키고 있는 모습이라네요. 그 뒤의 사람은 얼굴에 핏기가 전혀 없고 창백합니다. 죽기 직전의, 혹은 죽은 사람을 끌고 와 투표를 시키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오른쪽 붉은 옷을 입은 남성도 한 번 보세요. 한 쪽 다리에 의족을 차고 있고, 손도 자세히 보면 갈고리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전쟁에서 다친 상이군인으로 추측이 되는데요. 이 사람이 성경 위에 갈고리를 올리자 선거 위원들이 뭔가 문제가 있는 듯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진짜 손이 아닌데 선서를 할 수 있느냐”고 논의하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유권자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사람이든 누구든, 이 사람이 던진 표가 우리 편에 유리하냐 아니냐 만 따지려 드는 모습을 풍자했습니다.


호가스는 이 그림의 왼쪽에 자신의 의중을 넣어 두었습니다. 마부 두 명이 카드놀이에 흠뻑 심취해 있는 가운데, 영국 국기가 걸린 마차가 부서지고 있습니다. 정책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은 선거 과정 때문에 국가가 무너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 판화로 박리다매…중산층도 즐겼던 그림
호가스는 이런 신랄한 그림들을 어떻게 그리게 된 것일까요?

우선 이 시기 그려진 대다수의 그림은 주문자가 있다는 걸 먼저 짚어 봐야겠습니다. 섬나라인 영국은 유럽 다른 국가에 비해 그림을 늦게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자국 화가보다는 안토니 반 다이크 같은 플랜더스 출신의 화가들이 건너와 왕이나 귀족의 초상을 그려주면서 조금씩 그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윌리엄 호가스, 화가와 그의 반려동물(자화상), 1745년
윌리엄 호가스, 화가와 그의 반려동물(자화상), 1745년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나타난 호가스는 회화사에서 보면 굉장히 열려있는 마인드를 가졌던 인물입니다. 사실 이런 그림을 개인이 주문하기는 쉽지 않았겠죠. 그림 한 장을 그리는데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드는데, 이런 풍자적인 내용을 담은 그림이라면 배포가 큰 주문자가 아닌 이상 흔한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호가스는 한 명의 의뢰인에게 커미션을 받는 대신, 판화를 찍어서 그림을 상대적 ‘박리다매’로 판매했습니다. 거기다 내용도 한 사람이 아닌 불특정 다수가 좋아할 시사성이 있거나 유머러스한 주제를 선정했죠. 때로는 아주 지독하다고 느껴지는 ‘영국식 유머’가 바로 호가스의 그림에 담겨 있습니다.

호가스의 유명한 그림 ‘현대식 결혼’을 비롯해 유사한 스타일의 그림들은 유럽으로까지 전해져 후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추었습니다. 영국 테이트미술관은 호가스가 “만평과 저널리즘적 비주얼의 창시자”라고 설명합니다.

더 놀라운 건 그림이 날이 갈수록 인기가 많아져 ‘짝퉁’이 생기자, ‘저작권’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도 바로 호가스라는 점입니다. 어쩌면 19세기 이전 영국 밖으로 영향력을 미친 거 의 유일한 화가가 호가스일지도 모릅니다.

호가스가 남긴 ‘선거’ 시리즈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치라는 인위적인 시스템에서 수많은 다양한 개인이 느끼는 허탈함과 약간의 분노를 그 중심에 담고 있죠. 그래서 지금의 사람들도 재밌게 감상할 수 있는 것이고요.

이번 그림으로 ‘호가스’를 선정한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술’이 정말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다는 걸 이야기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학교 교양수업이나, 곰브리치 미술사 같은 책에서 배우는 미술은 정말 오래된, 드넓은 예술의 세계에서 지극히 일부만 담은 이야기랍니다.

18세기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하고 그것을 자랑도 했지만, 때로는 이렇게 즐겁고 유머러스한 그림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값에 구매하고 즐기기도 했다는 걸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지금 웹툰을 즐기는 것처럼 말이죠. 초상화는 그림이 귀한 시절 극소수만 가질 수 있었던 ‘셀피’라고도 할 수 있죠.

앞으로 이렇게 재밌고 쉬운 예술 작품 감상 이야기를 연재해보려고 합니다. 궁금한 그림이나 알고 싶은 예술가가 있다면 아래 이메일로 연락 주세요. 기사에 대한 의견도 환영합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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