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미술품의 추한 뒷거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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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마전’ 국내 시장 들춰보니

인도 조각가 애니시 커푸어의 스테인리스스틸 조각 ‘블러드 미러’(2000년). 이혜경 전 동양그룹 부회장의 소장품이었다가 지난해 법원 압류 직전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가 빼돌려 판매한 작품이다. 90만 달러(약 9억8000만 원)에 거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 출처 anishkapoor.com
인도 조각가 애니시 커푸어의 스테인리스스틸 조각 ‘블러드 미러’(2000년). 이혜경 전 동양그룹 부회장의 소장품이었다가 지난해 법원 압류 직전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가 빼돌려 판매한 작품이다. 90만 달러(약 9억8000만 원)에 거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 출처 anishkapoor.com
《“차용증 없이 수시로 수억 원을 현금으로 주고받았다. 우리는 남들 생각과는 다른, 서로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속내를 알 수 있는, 친척보다도 가까운 사이다.”

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4차 공판준비기일에서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62)가 한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자신과 이혜경 전 동양그룹 부회장(63)을 뜻한다. 홍 대표는 청담동 한복판에 자리한 자신의 갤러리를 거점 삼아 부유층을 대상으로 꾸준히 미술품 거래를 대행해 왔다. 그는 이 전 부회장이 보유했던 미술 작품을 수사기관에 압류되기 직전 빼돌려 대신 판매하고 대금을 챙긴 혐의로 지난해 9월 구속됐다가 얼마 전 보석으로 풀려났다. 1심 재판을 한 주 앞둔 홍 대표의 발언은 미술시장에서 벌어지는 ‘목돈 재테크’의 생리를 잘 보여 준다. 》

2013년 11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사상 최고가인 1억4240만 달러(약 1550억 원)에 낙찰된 프랜시스 베이컨의 유채화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왼쪽 사진)와 5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4000만 달러의 사상 최고 시작가로 나올 예정인 파블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 동아일보DB
2013년 11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사상 최고가인 1억4240만 달러(약 1550억 원)에 낙찰된 프랜시스 베이컨의 유채화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왼쪽 사진)와 5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4000만 달러의 사상 최고 시작가로 나올 예정인 파블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 동아일보DB
때마침 검찰이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고 있는 동국제강에 대한 수사를 벌이고 있어 미술계 안팎에서는 이 회사가 설립한 미술관인 송원아트센터에도 불똥이 튀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지난달 만난 한 갤러리 대표는 “미술 시장의 거래 관행과 작품 가격을 드러내놓고 언급하는 건 예술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시장 활성화를 바라지만 가격 등 세부 정보는 알리고 싶지 않다는 것. 어째서일까. 큰돈의 움직임 뒤에는 미술품 거래가 왜 당연한 듯 은근슬쩍 따라붙을까. 키워드는, 세금이다.

수중에 현금 여유 자산이 50억 원쯤 있다고 가정하자. 이걸 자녀에게 주고 싶다. 하지만 금융 자산이나 부동산의 형태로 물려줄 경우 절반 가까이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최근 이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한 자영업자는 소개로 알게 된 갤러리에 부탁해 가진 돈 액수에 상당하는 스타 작가의 미술 작품을 구입했다. 이때 함께 사들인 모조품만 내놓고 진품은 따로 숨겼다. 갤러리는 자영업자의 자녀에게서 진품을 같은 가격에 되샀다.

훗날 거래 자금 출처를 추적한다 해도 처음에 진품과 모조품이 함께 거래됐음을 증명하지 못하면 아버지의 돈이 과세 없이 아들에게 넘어갔음을 밝히기 어렵다. 갤러리에 입단속을 당부하며 감사 표시로 ‘수억 원’을 떼 주면 그만이다. 홍송원 대표가 ‘수억 원’을 가볍게 언급한 바탕에는 이런 식의 견고한 공생 거래 관습이 존재한다. 해외 계좌에서 거액을 인출해 고가의 그림을 구입한 뒤 신고 없이 반입해 증여하는 방법도 종종 쓰인다.

2013년부터는 ‘6000만 원 이상, 사망한 작가의 작품’ 거래에 한해 양도금액의 80%를 경비로 인정하고 나머지 20%에 대해 20∼38%의 세금을 부과하고 있다.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한 세무사는 “이 세금은 매입자가 원천징수해 신고하고 납부하도록 돼 있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과세 제도의 유명무실함을 지적했다.

또 다른 세무사는 “기업의 미술품 구매 비용에 대한 손비처리 범위를 확대해 주고, 미국처럼 미술품을 기부했을 때 그림값의 일정 부분에 해당하는 금액만큼 소득세 경감 혜택을 주는 식으로 세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숨겨진 거래를 보이는 곳에 드러내기 위한 ‘당근’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복마전#홍송원#이혜경#목돈 재테크#송원아트센터#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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