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詩와 철학의 입맞춤… 짧은 만남 긴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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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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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푸코, 강은교→알튀세르 등
서양철학과 연결해 한국현대시 감상

핵심적인 철학개념 짧게 간추려 소개
날카로운 사유로 다양한 詩해석 펼쳐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강신주 지음/432쪽·1만 6000원·동녘

최근 시인이나 문학평론가들이 해설을 곁들인 시선집을 많이 내놓고 있다. 문학사적 맥락, 작가론적 입장, 일상적 경험에서 시를 더욱 쉽게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풀어 쓴 책들이다. 이 책은 그런 시선집과 다르다. 철학 전공자로 대중 인문서를 써 온 저자는 이 책에서 서양철학이란 프리즘을 통해 21편의 한국 현대시들을 읽어낸다. 난해하게만 느껴졌던 현대시도 저자가 철학적 시선과 만나며 숨겨뒀던 제 모습을 드러낸다. 저자의 안내에 따라 ‘철학적’으로 시를 감상해 보면 이렇다.

최두석 시인의 시 ‘성에꽃’은 엄동 혹한의 새벽 시내버스 창에 어린 성에에서 영감을 받아 쓴 시다.

“새벽 시내버스는/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엄동 혹한일수록/선연히 피는 성에꽃…어제 이 버스를 탔던/처녀 총각 아이 어른/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최영미 시인은 ‘차와 동정’이라는 시에서 “내 마음은 허겁지겁/미지근한 동정에도 입술을 데었고/너덜너덜해진 자존심을 붙들고/오늘도 거울 앞에 섰다”고 슬프게 노래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해주면 좋으련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이 삶이다. 그래서일까.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사랑에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사랑의 역설, 사랑의 철학이다. 그림 제공 동녘
최영미 시인은 ‘차와 동정’이라는 시에서 “내 마음은 허겁지겁/미지근한 동정에도 입술을 데었고/너덜너덜해진 자존심을 붙들고/오늘도 거울 앞에 섰다”고 슬프게 노래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해주면 좋으련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이 삶이다. 그래서일까.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사랑에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사랑의 역설, 사랑의 철학이다. 그림 제공 동녘
시인은 이 시에서 성에꽃의 의미를 동시대인들의 삶과 열정이 뒤섞인 공동체적 애환으로 확장했다. 저자는 여기에서 질 들뢰즈의 ‘다중체’란 철학적 사유와 같은 맥락을 발견한다.

아장스망(agencement)으로도 불리는 다중체는 들뢰즈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다중체란 “차이 나는 본성들을 가로질러서 그것들 사이에 연결이나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란 뜻이다. 즉, 서로 다르지만 연동되어 있으며 서로를 역동적으로 변화시키는 결연관계를 뜻한다. 들뢰즈는 이것을 뿌리와 줄기의 체계구분이 명확한 ‘수목’에 대비해 ‘리좀’(뿌리줄기)적인 것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리좀은 수목과 달리 탈중심적이고 수평적이며 개방적인 체계를 지닌 다중체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끈으로 묶인 우리들의 삶을 시인은 ‘성에꽃’이란 시로, 들뢰즈는 ‘리좀’이란 개념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저자는 풀이한다.

삶에 편재한 권력의 논리를 ‘하……그림자가 없다’에서 노래한 김수영 시인의 시는 푸코적 통찰과 맥이 닿는다. 김수영 시인은 이 시에서 사나운 악한도 아니며 심지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우리의 적’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우리들의 적은 카크 다글라스나 리챠드 위다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이윽고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이 시가 어떻게 푸코의 사유와 연관될 수 있는 것일까. 푸코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이 사실은 복잡한 권력관계에 의해 인위적으로 생성된 역사적 결과물임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한 철학자다. 인위적으로 ‘구성된 주체’가 자발적으로 ‘구성하는 주체’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김 시인이 시에서 말하듯이 쉼 없이 싸우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보이지 않는 적과의 쉼 없는 싸움이란 결국 권위주의에 익숙해진 스스로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런 방식으로 한 편의 시에 어울리는 한 철학자의 주요 개념을 연결시킨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가 말년에 새롭게 내세웠던 ‘우발성의 유물론’ ‘마주침의 유물론’은 ‘물의 시인’으로 불리는 강은교 시인의 시 ‘물길소리’와 결합되며 새로운 공명을 빚어낸다. 부부를 각각 자기 자리에 놓인 가구에 비유한 도종환 시인의 ‘가구’에서는 가라타니 고진의 ‘공동체’ 개념을 끌어온다. 그의 철학에서 ‘공동체’란 동일한 언어게임과 규율을 가진 닫힌 개념이다. 서로에 대한 ‘맹목적 비약’을 통해 사랑에 빠졌던 연인은 서로 익숙해질수록 동일한 규율에 묶인 ‘공동체’에 속하게 된다. 도 시인이 말한 ‘가구’ 같은 부부란 곧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공동체’적 규율이 내면화된 부부인 것이다.

이 책은 철학과 문학을 개괄적인 수준에서 알기 쉽게 다루고 있다.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유혹을 어선의 화려한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오징어떼에 비유했던 유하 시인의 ‘오징어’를 베냐민의 철학과 연관시키는 등 비교적 평이한 접근도 있다. 하지만 짧게 간추린 철학적 사유들은 시를 해석하는 키워드로 작용한다. 골칫덩어리였던 ‘시와 철학’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방법을 가늠하게 해준다. 해당 철학자나 시인에 대해 깊이 알고 싶을 때 읽을 만한 추천도서도 수록돼 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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