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658년 스페인 철학자 그라시안 사망

  • 입력 2005년 12월 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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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철학자 겸 작가인 발타사르 그라시안(1601∼1658)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그의 저서 ‘수신규범’이 1991년 ‘세상을 보는 지혜’로 번역돼 수백만 부 팔렸을 때였다. 이 책은 간결하면서도 날카로운 형태로 지혜를 압축해 놓은 아포리즘의 매력이 빛나는 작품이다.

그라시안은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중소도시인 칼라타유트 출신의 예수회 신부였다. 그러나 그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사회에 대해 불신과 회의를 갖고 있었고, 고집스럽고 오만한 성격 탓에 예수회 지도자들과 끊임없이 마찰을 빚었다. 1658년 초 예수회를 탈퇴하겠다고 청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같은 해 12월 6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 세상과 인간이 불완전하고 악하지만 지식과 덕행으로 자기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수신규범’(1647년)에서 완전한 인간성에 도달하기 위한 지침으로 300개의 경구(警句)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자신의 이전 작품인 ‘영웅’(1637년), ‘신중한 사람’(1646년) 등과 옛 성현들의 말에서 발췌한 내용을 담고 있어 그의 저작 중 결정판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작가의 임무는 독자들에게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혜와 지식을 갖춤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았다. ‘수신규범’의 제15항에서 “지식을 갖추지 못한 삶이란 진정한 의미의 삶이 아니다.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지식을 축적하고, 많은 사람들을 이용해 지식을 얻으며, 그 사람들을 통해 스스로 지혜로워지는 사람은 대단히 영리하다”고 밝히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수신규범’이 훌륭한 미덕만 가르친 것은 아니다. “남을 비꼬는 말을 많이 마련해 두고 그것을 이용할 줄 알라”(제37항), “당신의 진짜 속셈은 남들이 모르도록 감추어라”(제99항), “윗사람의 비밀을 그와 함께 공유하지 말라”(제238항) 등의 가르침은 척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처세술로도 탁월하다.

이는 예수회 성직자이면서도 세속과 이성에 치우쳤던 작가의 개인적 고뇌가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스페인 제국의 몰락과 함께 인간적 유대에 의한 전통 사회가 붕괴되고 익명성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사회가 등장하던 시대적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윤정국 문화전문기자 jky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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