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선생 밀사로 평양서 조만식선생 만난 손치웅씨의 증언

  • 입력 2005년 7월 30일 0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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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평양에 가서 자신이 직접 찍었던 고당 조만식 선생의 대형 사진 앞에 선 손치웅 씨의 최근 모습. 사진 제공 손치웅 씨
1945년 9월 평양에 가서 자신이 직접 찍었던 고당 조만식 선생의 대형 사진 앞에 선 손치웅 씨의 최근 모습. 사진 제공 손치웅 씨
소년은 기계를 다루는 데 재주가 많은 고교생이었다. 사진사였던 아버지로부터 사진술을 익혔고, 전국발명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솜씨로 단파라디오를 만들어 영어방송을 들었다. 일본으로 유학 가서 항공기술자가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때는 광복 전야. 소년의 재능은 전혀 다른 곳에서 빛을 발하면서 그의 인생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올해 79세의 호주 교포 손치웅(孫致雄·뉴사우스웨일스 주 라이델미어 시 거주) 씨. 60여 년 전 경기고보(경기고의 전신) 학생이었던 그는 1944년 서울에 있던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선생에게 광복의 서광을 알렸고 1945년 9월 몽양의 밀사로 평양에 있던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선생을 만나 오늘날 고당의 대표 사진이 된 그의 모습을 필름에 담은 주인공이다.

손 씨는 29일 기자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당시 나는 독립운동이 뭔지도 몰랐고 몽양이 누구인지, 고당이 누구인지도 몰랐다”며 “다만 그분들의 눈빛을 거부할 수 없어 목숨을 걸고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손 씨는 1943년부터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청취했다. 단파방송의 전황은 일제의 선전내용과 달리 일본에 불리한 것이었다. 그는 이를 발명반 2년 후배에게 이야기했는데 그가 마침 몽양의 조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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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몽양 선생이 여름휴가를 같이 가자고 해서 경기 양주 봉안으로 놀러가 열흘 있었어요. 그때 단파방송의 내용을 이야기해 드렸는데 그냥 묵묵히 듣기만 하셨지요.”

몽양은 평생 동지였던 유정 조동호(榴亭 趙東祜), 한의사 현우현, 화가 김진우 등과 비밀독립운동조직 결성을 모의해 1944년 8월 10일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 앞에 있던 현우현의 삼광한의원에서 조선건국동맹을 창건했다.

손 씨는 1945년 평양공업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그해 5월 몽양의 연락을 받고 서울로 왔다. 몽양은 그에게 매일 밤 방송하는 ‘미국의 소리’를 청취해 보고해 달라고 부탁했다. 손 씨는 학업을 중단하고 100여 일간 단파방송의 내용을 몽양에게 알려줬다.

몽양 여운형과 손치웅씨
손치웅 씨(당시 18세·오른쪽)가 몽양 여운형 선생과 함께 1944년 8월 초 경기 양주의 봉안이상촌으로 여름휴가를 가서 찍은 사진. 사진 제공 손치웅 씨

그처럼 정확한 정보를 통해 준비한 덕분일까, 몽양은 일제가 패망한 다음 날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할 수 있었다.

이어 8월 하순 몽양은 손 씨에게 평양에 가서 고당을 데려오라는 밀명을 내렸다. 소련군의 감시를 피해 만난 고당은 종기가 나서 머리에 흰 붕대를 감고 있었다. 손 씨는 고당이 몽양의 편지를 읽는 동안 가져간 카메라로 12장 필름에 그의 모습을 담았다.

“고당 선생은 ‘내가 여기를 떠나면 이곳 백성은 누가 돌본단 말인가’라면서 ‘형님에게 몸은 여기 있지만 뜻은 함께라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몽양의 전기에 단파방송을 전달한 손웅이라는 학생으로 잠깐 등장하는 손 씨는 이후 사진사의 길을 걷다가 1970년대 호주로 이민 갔다. 일본 NHK 위성방송은 다음 달 15일 ‘8·15, 그날 세계는 무엇을 향하고 있었나’라는 특집 다큐멘터리에서 그의 증언을 방영할 예정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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