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살아보니/앤서니 리]‘디카’로 마음도 찍는다면…

  • 입력 2005년 1월 13일 18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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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월드컵의 열기가 막 달아오르던 2002년 봄. 월드컵 축구 4강 신화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붉은 악마’ 열풍을 지켜보면서 한국이 얼마나 생동감 있는 나라인지 실감했다.

요즘 나는 한국의 역동성을 새삼 느끼고 있다.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는 한국의 디지털카메라(디카) 열풍 때문이다. 한국의 디카 열풍은 가히 폭발적이다.

유행에 민감하고 강한 추진력을 지닌 한국인들은 모두가 ‘얼리 어댑터(조기 수용자)’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 디카 시장만 봐도 그렇다. 최근 수년 사이 한국의 디카 시장은 연평균 200% 이상 성장했다. 20년 이상 영상산업에 몸담고 있는 나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가파른 성장세이다.

서울의 한 음식점 화장실에서 잘생긴 젊은 남성이 거울 앞에서 카메라폰을 이용해 ‘셀프 카메라(셀카)’를 찍는 데 열중하는 것을 봤다. 다른 사람의 시선은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그를 보면서 한국인, 특히 젊은이의 디카 열풍이 이제 생활의 일부가 됐음을 깨달았다.

얼마 전 제주에 갔을 때 명소 곳곳마다 카메라 셔터 누르기에 여념이 없는 신혼부부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혼여행이라기보다 ‘사진여행’을 왔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신혼부부 10쌍 중 9쌍이 들고 있는 것은 디카. 약속이나 한 듯 정해진 장소에서 다양한 포즈로 사진을 찍고, 마음에 안 들면 곧바로 사진을 지워버리는 그들을 보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디카 열풍이 한국의 외모 중심적 사고를 더욱 부추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한국의 얼짱, 몸짱 문화는 디카와 인터넷의 결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젊은이들은 얼굴과 몸매가 잘 나오는 앵글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디카로 찍은 자신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는 문화가 보편화됐다.

기다릴 것 없이 곧바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마음에 안 들면 그 자리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디카 문화는 깊이 숨어 있는 내면의 아름다움보다는 찰나의 외적인 아름다움을 투영하는 데 적절하다.

사진이란 무엇인가. 지난날을 떠올리고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기 위한 도구다. 한국의 인터넷 포털 사이트들에 넘쳐나는 수많은 천편일률적인 얼굴 사진들은 나중에 다시 봤을 때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를 추억하기보다는 단순한 증명사진 같은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진이라도 추억이 깃들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좀 더 의미 있고 아름다운 사진을 남겨보자. 얼굴과 몸매가 비록 이상적으로 나오지 않았을지라도 과거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는 그런 사진 말이다. 그러면 외모가 아닌 마음을 볼 수 있는 사진을 간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약력▼

홍콩 출신으로 홍콩 차이니즈대에서 화학을 전공한 후 코닥 미국 본사와 홍콩, 중국 지사 등에서 일했다.

앤서니 리 한국 코닥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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