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 라이프]<2>'영리한 군중'이 몰려온다

  • 입력 2004년 1월 4일 18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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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정문 앞의 동백꽃을 제발 뽑아가세요.” 최근 경기 용인시 공무원들은 일제히 이런 내용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받고 깜짝 놀랐다. 메시지는 시민단체인 ‘수지시민연대’ 회원들이 보낸 것. 이어 용인시 홈페이지의 각종 게시판도 ‘동백꽃을 없애달라’는 내용으로 가득 찼다. 용인시의 동백지구 개발계획으로 교통난이 심각해질 것을 염려한 수지지역 주민들의 ‘사이버 시위’였다. “수지시민연대 웹사이트(http://www.sujicity.net/)에 행동계획을 공개하고 중요 회원들에게 e메일을 발송했죠. 예전처럼 시청으로 쳐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여론을 형성하고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수지시민연대 정주성 공동대표(43·회사원·경기 용인시 풍덕천1동)의 설명.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이용한 사이버 여론 형성을 통해 수지시민연대는 지난해 9월 이미 지하철 분당선의 수지지역 연장운행 결정 등의 성과를 얻어냈다.》

●인터넷과 휴대전화로 무장

‘영리한 군중(Smart Mobs)’이 오고 있다. 과거의 군중과 달리 인터넷과 휴대전화로 무장한 새로운 시대의 군중이다. 2002년 책 ‘Smart Mobs’(한국어판 제목 ‘참여군중’·황금가지)를 펴낸 미국의 컴퓨터문화 전문연구가 하워드 라인골드는 이들의 특징을 ‘연대’와 ‘신속성’으로 규정한다. 공통의 관심사를 신속히 읽어내고 서로간에 의견을 발신 수신하며 공통분모를 찾아내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

“최근 몇 년 동안 시애틀, 다보스, 퀘벡 등으로 이어지는 반세계화 운동도 전형적인 ‘영리한 군중’의 행동양식입니다. 여성, 유색인종, 농민 등 소수자들이 자신들의 다양한 의견을 웹상에서 서로 ‘링크’하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온·오프라인을 통틀어 목소리를 내고 있는 거죠.”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네트워커’ 편집위원)

정재승 고려대 연구교수(물리학)는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다가 어느 순간 한 방향으로 몰리는 반딧불이의 운동처럼, ‘영리한 군중’은 특정사안에 대해 e메일이나 휴대전화를 이용해 한꺼번에 행동을 수렴하고 발 빠르게 움직인다”고 운동방식의 특성을 설명했다.

2001년 필리핀 조지프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실각은 휴대전화로 정보를 나눈 수백만명의 ‘영리한 군중’이 실제 공간으로 나왔을 때의 위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2003년 9월 멕시코 칸쿤에서 세계화 반대를 외치는 시위대와 맞닥뜨렸던 경찰은 시위대의 신속한 대응에 당혹했다. 경비망에 약간의 틈이라도 생기면 사정없이 시위대의 공격이 쏟아졌기 때문. 리더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정보를 먼저 찾은 사람이 휴대전화로 정보를 발신한 것으로 추측됐다.

●쌍방향성 문화생산자

‘영리한 군중’이 가진 가능성은 정치적 행동에 국한되지 않는다. 라인골드 등은 오히려 ‘영리한 군중’이 인간관계와 여가문화를 변화시키고 기존 제도권의 문화생산방식까지 바꿀 가능성에 더 주목한다.

지난해 9월 중반, MBC 사극 ‘대장금’ 방송과 함께 이 프로그램 홈페이지에는 주인공 ‘장금’의 스승인 한 상궁이 극 중반에 누명을 쓰고 죽음에 이른다는 줄거리가 공개됐다. 10월경 한 상궁의 자애로운 캐릭터가 시청자들에게 인기를 얻자 ‘행동’이 시작됐다.

‘숨은 주인공 한 상궁을 살려주세요.’(trueguest) 등 ‘대장금’ 홈페이지의 시청자 게시판에는 ‘한 상궁을 살려달라’는 네티즌들의 호소가 잇따랐고 ‘LOVE 한 상궁’(cafe.daum.net/hansanggung) 등 인터넷 팬 카페가 속속 생겨났다.

급기야 11월 말 담당PD가 “줄거리 진행상 한 상궁을 살릴 수 없다”고 밝히자 12월 초 ‘한 상궁 살리기 운동본부’라는 이름의 사이트가 개설됐다. 사이트 운영자는 “한 상궁을 살려달라는 요청이 거절된다면 경쟁사의 사극을 보거나 시청거부운동을 할 수 있다”는 글을 게시했다.

결국 한 상궁의 죽음은 당초 예정보다 8회 연기됐고 죽음의 방법도 ‘덜 잔혹한’ 것으로 바뀌었다. ‘영리한 군중’이 제도화된 문화의 생산과 유통에 영향을 미쳐 ‘쌍방향성’을 획득한 사례다.

●영리한 군중의 착각

‘영리한 군중’의 여론수렴방식은 즉각적이며 수평적이라는 특성과 더불어 ‘소극성’ ‘익명성’의 한계도 지적된다. 수지시민연대 정주성 공동대표는 “온라인상에서 회원들이 ‘눈팅’(게시물을 읽어보는 것)만 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거나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며 “사이버 조직의 한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연세대 황상민 교수(심리학)는 “이른바 인터넷의 ‘P(참여·정열)세대’로 불리는 한국의 10대, 20대가 실제 ‘영리한 군중’ ‘참여군중’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정밀하게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아직 우리 사회의 ‘영리한 군중’ 상당수가 현실 정치에 대해 사이버공간에서 ‘발언’하는 것만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오해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서로 정보를 주고받다 보면 자칫 각자가 주도적 역량을 발휘하는 것처럼 인식할 수 있으며 이런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리더’로 착각하는 네티즌의 ‘대리만족’이 형성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용어설명 ▼

● MO(Mobile Originate) 서비스

지금까지의 단문메시지서비스(SMS·Short Message Service)는 휴대전화에서 휴대전화로, 웹에서 휴대전화로만 전송이 가능하지만 MO서비스를 도입하면 휴대전화에서 웹으로도 단문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웹과 휴대전화의 소통성을 획기적으로 높여 양자간의 질적인 통합을 강화한 것. MO서비스는 현재 ARS를 이용한 성금모금이나 행정관청의 민원접수 업무 등을 휴대전화 SMS로 대체할 수 있게 해준다.

● 플래시 몹(Flash Mob)

e메일을 통해 특정한 날과 시간, 장소에 모여 10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약속된 행동을 한 뒤 뿔뿔이 흩어지는 모임을 뜻하는 신조어. 특정 사이트의 접속자가 급격히 증가하는 ‘플래시 크라우드(Flash Crowd)’와 ‘영리한 군중(Smart Mob)’의 합성어. 지난해 6월 미국 뉴욕에서 처음 시작된 이 새로운 집단행동(사진)은 국내에서는 8월 31일 서울 강남역에서 ‘행인들에게 인사하기’, 10월18일 서울 코엑스에서의 ‘붉은악마 응원’ 등으로 나타났다.

● 엄지족(Thumb Tribes)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버스나 길거리 등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온종일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 사람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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