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 라이프]<1>신교양인의 출현

  • 입력 2003년 12월 31일 17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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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은 한국의 인터넷 상용화 10년이 되는 해. 1994년 6월 한국인들은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에 공식적으로 '접속'했다. 한국통신(현 KT)이 일반인 대상의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당시까지 대학과 연구기관에 제한됐던 인터넷 이용의 대중화가 이뤄진것. 그 10년은 무엇을 가져왔는가.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인터넷은 이제 사회적 생존의 전제조건이 됐다. 나아가 세계에서 가장 적극적인 한국 '네티즌'들은 월드 와이드 웹(WWW)의 환경에 맞춰 최적화된 '사이버 신인류'로 진화 중이다. 문명사적 변화라는 관점에서 인터넷 10년이 가져온 한국의 삶의 변화를 짚고 미래를 전망하는 시리즈 '매트릭스 라이프'를 주간 연재한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는 L군(19)은 지난 학기 최혜실 교수(인문사회과학부·국문학)의 ‘문화기술론’을 수강하며 새로운 수업방식을 경험했다.

최 교수는 “팀별로 인터넷 커뮤니티를 구성해 최대한 많은 네티즌들을 끌어 모을 것”을 과제로 제시했다. 영화감상 커뮤니티를 만들어 네티즌들을 모은 L군의 팀은 최고점을 받았다. 학기 중간에는 게임 줄거리를 집단 창작해 PC와 프로젝터로 다른 수강생들에게 시연하는 프레젠테이션 과제로 점수를 받았다.

리포트를 낼 때는 “참고한 인터넷 사이트 주소를 가능한 한 많이 적어내는 게 유리하다”고 최 교수가 주문했다. 기말시험은 참고자료를 얼마든지 뒤져 답안지를 작성하는 이른바 ‘오픈 북’이었다.

“암기해서 시험보고 평가받아온 기성세대에게는 언제든지 남의 답을 ‘참조’할 수 있고 참조한 사실 자체를 공개하는 시험방식이 낯설겠죠. 하지만 ‘무엇이 지적 능력인가’ ‘지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 자체가 달라지고 있으니 평가방식의 변화는 당연한 것입니다.” (최혜실 교수)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지식의 대중화’라는 혁명을 겪은 이래 인류는 최대규모의 ‘지(知)의 혁명’기를 맞고 있다. 이번에는 인터넷을 통한 ‘집합지능’의 실현이다.

● 신(新)교양, 노드, 디스플레이

2002년 10월 시작된 인터넷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지식검색’ 서비스는 국내에 지식검색’ 열풍을 불러왔다. ‘지식검색’이 기존의 검색과 다른 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정보탐색을 원하는 사람이 능동적으로 교과서나 참고서에도 없는 어떤 종류의 질문이라도 ‘만들어’ 던질 수 있다는 것, 또 하나는 그에 대한 답을 권위자가 아닌 동료 네티즌이 ‘평등하게’ 제시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시대는 ‘교양’과 ‘지식’의 정의를 바꾼다. 지금껏 ‘교양’과 ‘지식’은 암기를 통해 머리 속에 축적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불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시대의 지식은 인터넷에 올려져 누구나 언제든지 찾아 쓸 수 있는 형태로 공유된다. ‘암기력’ 대신 ‘검색속도’, ‘깊이 아는 것’ 보다 ‘잘 찾는 능력’이 중시된다. 이른바 ‘신교양(新敎養)’의 출현인 것이다.

“오늘날 필요한 지적 능력은 ‘노하우’가 아니라 ‘노웨어(Know-Where·정보가 어디 있는 지 아는 것)’입니다. 기존의 지식을 잘라내 이어 붙이고 (Cut and Paste) 재구성하는 ‘조합형’ 지식으로 지식과 교양의 의미가 바뀌고 있어요.”(이재현·충남대 교수·언론정보학)

신교양 시대에 개별 인간은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두뇌’의 소자(element) 또는 단말장치(nod)처럼 움직인다. 타인, 즉 다른 ‘노드’에게 손실 없이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은 ‘집합지능’을 가능케 하는 기본능력이다. 대학이나 기업에서 ‘프리젠테이션’ 혹은 ’디스플레이’ 능력을 나날이 강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 ‘개벽’ ‘딸녀’, 인터넷 창의력의 산물

이제 개인의 창의력은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 인터넷 전문가들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진단한다. 정보를 검색해 취합하고 새로운 산물을 만드는 데는 ‘재목적화(리퍼포징·repurposing)’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재목적화란 기존의 정보를 새로운 목적에 맞게 정렬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연재된 소설을 게임으로 각색하는 것이나 여러 사진을 편집해 새로운 화상으로 제작하는 것도 ‘리퍼포징’에 해당한다. ‘개벽’(그래픽속 사진 오른쪽) ‘딸녀’(〃 왼쪽) 등 지난해 폭발적 인기를 누린 합성 디카(디지털카메라) 사진 역시 넓게 보면 리퍼포징의 산물이다.

“어떤 웹사이트든지 기존에 이미 나와 있는 문자와 그림, 동영상 정보들을 재편집해 구성합니다.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 ‘새로운 배열’이 가치를 생성하는 것이죠. 없던 것을 창안한다는 기존의 ‘창의성’ 개념과 달리, 기존에 연결되지 않았던 것을 새로 연결해 가치를 낳는 리퍼포징 능력은 앞으로 ‘창의성’의 새로운 속성으로 인식될 겁니다.”(이재현 교수)

전통적인 개념의 교양은 정보홍수 속에서 진정한 정보를 가려내는 ‘게이트키퍼(Gatekeeper)’로서 일정 부분 가치를 인정받으며 잔존할 전망이다.

“보편적 교양의 역할이 축소되는 대신 전문가들이 가진 ‘특화된 지식’의 심도는 더 깊어질 겁니다. 깊이가 없으면 집단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네티즌들의 공격을 받게 될 테니까요.” (라도삼·사이버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 하이브리드형 유목인

지식의 축적과 전승을 위한 기존의 사회적 기구나 도구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용할까. 하드웨어로서의 도서관은 컴퓨터 서버로 대체될 것으로 예견된다. 대학에서는 기존의 인문교양 대신 지식검색과 전달능력을 가르치는 ‘커뮤니케이션학’이 기초교양 과목이 될 전망이다.

특히 ‘신교양인’적인 특성은 기업의인재 모델이 되어가는 추세다. 직업평론가 김농주씨(연세대 취업담당관)는 “정보검색을 통해 재빨리 새로운 기능을 익혀 다양한 업무를 넘나들거나 기존의 여러 업무들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형’ 조직원과 직업군이 각광받고 있다”고 말했다. 일례로 최근 호텔업계에서 고객과 접촉하는 ‘호텔리어’의 경우, 고객이 요청하면 사무서식을 작성해 제공하기까지 하는 포괄적인 업무능력을 요구한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매트릭스 라이프’는 다음주부터 월요 일에 싣습니다.

▼용어해설 ▼

● 리퍼포징(Repurposing)

정보를 재조합하는데 그치지 않고 선택된 정보에 새로운 기능 또는 목적을 부여하는 것. 또는 기존의 정보를 선택 또는 재조합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새로운 목적부여가 전제되는 것도 뜻한다.

● 사이버리터러시(Cyber-Literacy)

문자정보의 해독력을 뛰어넘는 사이버 시대의 정보 해독력으로, 정보를 검색 선택 재조합하는 능력까지를 포괄하는 개념.

● 누스페어(Noosphere)

정신(Noo)과 시공간계(Sphere)의 합성어. 현재까지 인류가 겪어온 문명화 과정의 완성단계를 뜻하는 개념으로 캐나다의 사회커뮤니케이션 학자 피에르 레비가 창안한 개념이다. 집합지능 개념과도 유사하다. 레비는 ‘누스페어’에 대해 인간의 잠재력이 사이버 공간에서 현재화하는 과정이자 인간의 정신과 의식이 한층 더 고양 발현되는 장(場)이라고 설명. 집합지능에 영성(靈性)적 의미를 더 부여한다.

▼집합지능이란 ▼

‘집합지능’ 또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란 개별 인간들이 만나 정보와 인식을 공유하고, 나아가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 내는 것을 뜻한다. 집합지능의 개념은 원래 미디어학자인 마셜 맥루한의 ‘지구촌’, 하이퍼텍스트 개발자인 더그 엥겔바트의 ‘지능 확장(Augment Intellect)’ 개념에서 유래한다.

언어생활이 시작됐을 때와 문자가 창조됐을 때, 인간의 집합지능은 새로운 단계의 비약을 이루었다. 20세기 말 인터넷 공간의 창조는 유기체적 차원을 뛰어넘는 새로운 단계의 집합지능을 낳았다. 이제 지식은 인터넷에 올려지는(upload) 순간 전 인류적 차원에서 공유된다.

사이버 공간에서 개개의 인간은 집합지능으로서 하나의 회로 또는 입출력 단위처럼 기능한다. 마치 개미 한 마리 한 마리가 낮은 차원의 지능을 갖지만, 더듬이를 병렬로 연결해 집단별로 최적의 행위를 찾아내는 것처럼 집합지능으로서의 인류는 이전보다 강력해진 문제 해결능력을 갖는다. 개별 네티즌들이 참여해 ‘완성시켜 가고 있는’ 컴퓨터 오퍼레이팅시스템(OS)인 ‘리눅스’는 오늘날 집합지능이 이룬 대표적 지적 산물로 꼽힌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집합지능은 ‘포스트휴먼(Post-Human)’을 지향하는 ‘초인간주의’와 관련된다. 초인간주의는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 인간이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 철학 또는 이념’을 뜻한다. 인터넷과 같은 컴퓨터 네트워크에 의해 가능해진 집합지능이 새로운 단계로 진화한 인간의 모습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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