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3년 佛 레몽 아룽 사망

  • 입력 2003년 10월 16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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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반 미국에서 대니얼 벨이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고했을 때, 유럽 사회주의 전통의 심장부인 프랑스에서 ‘마르크시즘은 지식인의 아편’이라고 외쳤던 레몽 아롱.

1983년 10월 17일. 아롱이 타계했다.

그는 사르트르와 함께 프랑스 지성계를 대표한 좌우익의 양쪽 날개였다. 그러나 그는 학문적 명성과 영향력에서 사르트르에 현저히 미치지 못했다.

특히 1960년대 후반 유럽이 신좌파의 물결에 휩싸이면서 그는 완전히 따돌림을 받았다. 소르본 대학에 교수로 임용됐을 때는 우익신문인 르 피가로에 글을 쓴다는 이유로 반대데모에 부닥치는 수모를 겪었다.

아마도 그가 일생에 걸쳐 사르트르를 앞질렀던 것은 ‘그곳에서 프랑스 지성계의 인명사전이 만들어졌다’는 파리 고등사범학교 시절, 철학교사 자격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게 유일했다. 사르트르는 이 시험에서 낙방했다.

사르트르가 혁명적 유토피아주의자였다면 그는 비판적 현실주의자였다. 사르트르에게는 마르크스가 있었고 그에게는 막스 베버가 있었다.

자유와 평등은 동시에 실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토크빌의 비관론에 그는 동의했으며, 근대적 합리성이 자본주의의 내부 독소를 꾸준히 정화시킨다는 베버의 낙관론 또한 받아들였다. 그리고 진보주의적 사관(史觀)에 대해 역사는 ‘진보의 환멸’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관점을 취했다.

미소의 냉전은 ‘불가능한 평화와, 불가능해 보이는 전쟁의 공존상태’라는 명언을 남긴 그는 국제정치학자로서도 탁월한 식견을 보였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었을 때 소련이 한국에서 휴전에 동의할 것이라고 내다본 것은 그였다.

그는 또 우익을 대변하는 거침없는 논객이었다. 유럽의 지식인들이 환호했던 1968년 5월 학생봉기에 대해 “철없는 젊은이들의 광기가 문명을 어둠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질타했다. 그리고 드골의 포퓰리즘을 대놓고 공격했다. 그도 사르트르와 다른 의미에서 ‘행동하는 양심’이었던 것이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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