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음식]김치 네트워크

  • 입력 2002년 12월 19일 16시 37분


김치에도 마니아 브랜드가 있다. 김치를 사 먹는 사람이 늘면서 생긴 현상이다. 서울 강남 일대에서 입소문을 통해 알려져 마니아 브랜드로 자리잡은 ‘알지 김치’.
김치에도 마니아 브랜드가 있다. 김치를 사 먹는 사람이 늘면서 생긴 현상이다. 서울 강남 일대에서 입소문을 통해 알려져 마니아 브랜드로 자리잡은 ‘알지 김치’.
이름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어도 맛에 반해 특정 김치브랜드에 열광하는 마니아들이 생겨나고 있다. ‘알지김치’가 대표적 마니아 브랜드 가운데 하나로 이 김치를 통한 ‘입맛 네트워크’까지 형성되고 있다.

‘알지’는 ‘먹어보면 맛을 알지’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 제조사인 진보식품이 적극적인 마케팅을 하지 않은 탓에 대중 브랜드는 아니다. 지난해 남성 듀엣 ‘컨츄리꼬꼬’의 멤버 탁재훈씨가 진보식품 이승준 회장(59)의 막내딸과 결혼하면서 회사 이름은 두루 매스컴을 탔지만 여전히 ‘알지김치’는 생소하다.

● 한번 맛보면 주변에 적극 권유

주부 함수진씨(46)는 5년 전 친한 언니로부터 알지김치를 소개받았다. 당시까지 함씨는 ‘어떤 음식도 사 먹는 건 말이 안된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갖고 있던 주부였다. 함씨는 “먹어보곤 솔직히 내가 담근 김치보다 맛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함씨는 사 먹는 음식에 거부감이 더 강했던 남편과 친정 부모님에게도 “직접 담근 김치”라고 속이고 알지김치를 권해 봤다. 모두들 맛에 만족하자 함씨는 사실을 털어놨고 지금은 집에서 김치를 담그지 않는다. 그 뒤로 함씨는 주변의 친지들에게 적극적으로 ‘맛’을 소개하고 다녔다.

60대의 주부 이모씨는 노인정 봉사를 갔다 알게 된 사람으로부터 알지김치를 소개받은 뒤 단골이 됐다. 출가한 다섯 자녀도 모두 알지김치 마니아다. 이씨는 “집에서 담근 것처럼 정성이 깃들어 있어 좋아한다”고 말했다.

알지김치의 단골 네트워크는 이렇게 전적으로 입소문을 타고 폭을 넓혀갔다. 회사측에서 별도로 마케팅을 하지 않기 때문. 단골로 사먹는 집이 1000가구에 조금 못미친다. 1970년대초 첫선을 보인 것치고는 적은 숫자다. 현재 알지김치의 주요 소비 가정은 서울 서초동 논현동 청담동 등 강남 일대 주택가에 집중돼 있다.

입맛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정치인 K씨는 알지김치의 얼갈이 김치가 떨어지기 무섭게 주문을 하고 원로 정치인 L씨는 현역 시절 포기김치를 대량으로 주문해 당원들과 나눠 먹곤 했다고 한다. 또 다른 고위 정치인 L씨의 부인은 명절 때면 수십 상자씩 구입해 선물하기도 한다.

진보식품의 박희만 상무(32)는 “정치인 가운데 단골이 많다”고 밝혔다. 이래저래 식객이 많아 직접 담그는 김치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해석했다.

몇 년 전 대기업 사장으로 있던 한 인사는 일본에 출장을 갈 때면 일본인 업무 파트너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알지김치 공장에 들러 김치를 세트로 구입하곤 했다. 연예계에선 유동근 전인화씨 부부가 대표적인 마니아.

소매 판매에 대한 요청이 늘면서 회사측은 2000년 초부터 일부 할인점에 포장김치를 공급하고 있다.

● 무엇이 다르기에

회사측은 단골 고객이 몇 가구나 되는지 정확하게 파악해 두고 있지 않다. 별도로 고객 관리도 하지 않는다.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 그때 주문량만큼 배달할 뿐이다. 연 100억원대인 회사 전체 매출에서 주문 판매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10%도 안 되기 때문에 일일이 ‘입맛’대로 응해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나머지 매출은 대기업 관공서 대학 등에 납품하는 데서 나온다.

이처럼 근처 가게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데다 일부 지역은 배달조차 안돼 소비자가 서울 가락동 공장으로 직접 찾아가야 할 때도 있다. 이런 수고를 하면서까지 단골들이 알지김치만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 상무는 “최고급 재료를 쓴다는 점을 소비자들의 입이 정확하게 가려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배추 고춧가루 멸치액젓, 이 세 가지 재료를 선택하는 게 남다르다는 얘기다.

최고 품질의 재료를 구하기 위해 이 회장이 들이는 공은 자식을 키우는 정성 못지 않다.

우선 배추의 경우. 이 회장은 배추를 공급받기로 계약한 밭을 수시로 찾아다니며 직접 농사를 지휘한다. 김매기는 제때 했는지, 물은 부족하지 않게 대고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것. 그 이전에 밭을 계약할 때부터 토양은 좋은지 살피고 농부가 성실한지까지 따진다.

고춧가루는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 있는 공장 한 쪽의 방앗간에서 직접 빻는다. 경북 안동, 충북 음성, 충남 청양, 전북 임실 등의 최상품 고추를 골라 씨를 모두 발라낸 뒤 빻는 게 특징. 박 상무는 “씨를 빼내면 수율에서 20%가량 손실이 생기지만 김치 장사를 시작한 뒤 변함없이 지켜오고 있는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젓갈을 만드는 데도 장인 정신이 발휘된다. 이 회장은 기름기가 적당히 오른 멸치가 잡히는 5, 6월이 되면 남해 바닷가로 직접 내려간다. 막 잡혀 선착장에 부려지는 멸치를 현장에서 구입, 인부를 고용해 즉석에서 소금을 뿌린 뒤 근처 보관 탱크를 빌려 곧바로 밀봉한다.

박 상무는 “그 상태로 2, 3년 삭힌 뒤 완전한 맛이 난다고 여겨질 때 서울로 가져온다”고 설명했다. 멸치를 주로 구입하는 곳은 전남의 목포 여수와 경남의 고성 남해 등이다.

엄선된 재료에 맛을 불어넣는 것은 이 회장의 부인인 최현분 사장(56)의 몫이다. 30여년 전 김치 공장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최 사장은 현장을 떠나지 않고 50여명의 직원을 지휘해가며 직접 김치를 담그고 있다.

김치는 고장마다 넣는 재료가 각기 다른데도 불구하고 알지김치가 다양한 지역 출신 사람들의 입맛을 한꺼번에 사로잡은 것은 최 사장만의 노하우 덕분. 바로 멸치젓과 새우젓의 배합 비율이다. ‘기업 비밀’이라는 이 배합 비율로 최 사장은 지역에 편중되지 않은 맛을 찾아냈다.

최 사장은 김치 양념에 사골 국물을 넣어보기도 하고, 돼지고기를 날 것으로 첨가해 함께 삭혀보기도 하는 등 보다 나은 맛을 찾기 위해 아직도 연구에 여념이 없다.

알지김치가 만드는 김치는 모두 20여가지. 포기김치 깍두기 등 일반적인 김치 외에 주문이 많은 김치로는 갓김치, 오이소박이, 얼갈이, 동치미 등을 꼽을 수 있다. 가격은 김치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큰 차이는 없다.

주문 판매를 통해 가정으로 배달되는 김치는 ‘별미 김치’로 포기김치는 ㎏당 5000원, 깍두기 동치미 등은 4000원 안팎이다. ‘별미 김치’는 엄선한 재료 중에서도 특별히 고급 재료만을 쓰며 굴 실고추 잣 등 고명이 추가된다. 매일 일정량을 별도로 만든다.

할인점에는 ‘별미 김치’와 고명을 넣지 않은 ‘일반 김치’를 함께 내놓고 있다. 일반 김치는 3000원 안팎.

하루 생산량은 40t 정도. 충남 천안에 하루 100∼150t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갖췄지만 아직 가동하지 않고 있다. 인기가 높은데도 대규모로 ‘판’을 벌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박 상무는 “회장 부부가 ‘돈 벌 욕심에 사업을 확장하면 제품의 질을 유지하지 못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업계의 추산에 따르면 가정에서 구입하는 소매용 김치 시장은 1999년 700억원 규모에서 매년 30% 안팎으로 성장해 올해는 1700억원 가량으로 커졌다. 소비자들이 입맛에 따라 특정 지역 김치나 특정 상표를 선호하는 경향이 나날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진보식품(02-406-7226)

●명품 김치들

중소 규모의 김치 브랜드는 대형업체의 마케팅파워와 유통업체 장악력에 맞서기 위해 차별화된 맛을 전략으로 내놓는다. 홈쇼핑 인터넷쇼핑 등의 발달로 특색 있는 김치를 찾는 소비자층이 서서히 형성되고 있다.

○여수 돌산갓김치〓전남 여수 돌산 지역에서 재배되는 갓으로 만든 김치. 돌산의 갓은 해풍을 맞고 강하게 자라 김치를 담근 뒤에도 오랫동안 물러지지 않는다. 병충해가 심하지 않으면 농약을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재배하는 것도 특징. CJ홈쇼핑, 우리홈쇼핑에서 판매. 여수농협가공사업소. 080-644-2185

○한복선김치〓조선 궁중 요리 기능 보유자인 황혜성씨의 딸 한복선씨가 궁중 비법을 이어 받아 만든 김치. 조기젓을 넣어 만든 포기김치, 다시마와 마른 새우로 국물을 내 맛이 시원한 깍두기, 배 고추 유자 등을 넣은 동치미 등을 판매한다. 우리홈쇼핑. 한복선푸드시스템. 02-599-4727,8

○송이김치〓일본 시장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김치에 송이버섯을 고명으로 넣은 게 특징. 발효가 되면 버섯이 물러지는 단점을 최소화한 기술을 개발해 일본 특허를 받았다. 롯데백화점, 갤러리아백화점. 깊은산. 02-546-6090∼2

○마이산김치〓전북 진안군에 있는 부귀농협이 만든다. 해발 340m의 고랭지에서 재배되는 배추 무 고추 도라지 등을 주원료로 전라도 고유의 맛을 살렸다. 천연 암반수를 사용하는 게 특징. 하나로마트. 부귀농협. 063-433-5356

○봉희김치〓봉희설렁탕으로 유명한 봉선식품이 만드는 김치. 설렁탕 육수에 갖은 양념을 넣어 만든 소스를 사용하는 게 특징. 설렁탕과 잘 어울리는 무김치를 비롯해 백김치 생김치 등을 판매한다. 인터넷(www.bonghee.co.kr) 판매. 02-302-2525

금동근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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