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동지]범 문화계 모임 '뒤죽박죽'

  • 입력 2001년 4월 2일 18시 54분


“‘난타’가 브로드웨이 가려는 건 기업으로 치면 미국 나스닥 상장과 같아요. ‘메이드 인 코리아’라면 미국에서 일주일 공연료를 6만 달러 밖에 받지 못하는데 ‘메이드 인 브로드웨이’가 되면 값을 두 배 이상 쳐 주거든요.”

지난 토요일(3월31일) 저녁,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 커피와 맥주를 앞에 놓고 문화계 인사 10여명이 둘러 앉아 연극배우이자 ‘난타’의 제작자인 송승환의 성공담을 화제로 삼아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TV드라마 연출자로 유명한 황인뢰 PD와 영화평론가 조희문 교수(상명여대), ‘국화꽃 향기’를 베스트셀러로 만든 출판인 박광성 (생각의 나무 대표), ‘그림 읽어주는 여자’인 방송인 한젬마씨가 눈에 띄인다.

또한 공연정보 사이트 ‘인포아트’ 박성호 대표, 극작가인 이병도씨, 국립극장장을 역임하고 얼마전 월드컵조직위원회로 자리를 옮긴 최진용 기획조정국장, 소설가이자 프랑스어 번역가인 조명애씨, 김동윤 건국대교수 등도 참석했다.

공통분모을 찾기 힘든 이들은 매달 마지막주 토요일 저녁이면 자리를 함께 한다. 이 정체불명의 모임은 ‘뒤죽박죽’. 아무 형식없이 자유토론을 벌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섯 번째를 맞은 이날 모임의 주제는 ‘난타 흥행과 한국공연계 현실’이었다. 안팎으로 어려운 공연계 현실을 증언하기 위해 박형식 정동극장장이 초대됐다.

“‘난타’가 성공한 후 문화를 돈으로 계산하는 경향이 강해졌어요. 하지만 국악 같은 우리 순수예술은 절대 돈을 벌 수 없어요. 그런데 정부는 극장 재정자립도를 80∼90%까지 만들라니 답답할 따름이예요.”

조희문 교수가 맞장구를 쳤다. “문화가 돈이 된다는 생각 만큼 위험한 게 없어요. 기초가 엉망인데 어떻게 좋은 상품을 만듭니까. 우리에게 사물놀이 전통이 없었다면 ‘난타’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겁니다.”

이야기는 관객을 쫓아내고 있는 공연계의 타성, 나눠주기식으로 일관하는 정부의 문화 예술 지원 문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러더니 미국 프랑스 등 외국 공연계의 실상과 교육제도의 문제점으로 계속 가지를 쳐나갔다.

“사양길에 있는 무대공연에 관심을 높이려면 초등학교 학예회부터 정책적으로 부활시켜야 해요.”(최진용)

“유럽에선 영화에 출연하려면 연극배우 경력을 필수로 쳐요. 그래서 알랭 들롱이 평생 연극 콤플렉스에 시달렸죠.”(조명애)

“각 지자체에서 공연장 시설 건설이 유행이더군요. 요즘엔 군 단위에 가도 공연시설을 훌륭하게 해놓았지만 도서관은 인기가 없는지 만들어지지 않아요.”(박광성)

각자 자기 분야의 경험담이 어어지던 토론은 커피와 맥주가 계속 비워지면서 열기를 더해갔다. 오후 6시에 시작된 ‘뒤죽박죽 토론’은 어느새 밤 9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인근 식당과 카페로 자리를 옮겨간 이야기꽃은 자정 가깝도록 시들줄 몰랐다.

범 문화계 인사들의 수다 모임인 ‘뒤죽박죽’이 꼴을 갖추게 된 것은 지난해 11월이었다. 평소 교분이 두터운 황인뢰 PD, 박광성 사장, 송승환 대표, 한젬마씨, 김동윤 교수가 술자리 토론을 양성화(?)하자는데 의기투합해 만들어졌다.

여기에 박성호 대표가 끼면서 종횡을 가로지르는 정체불명의 수다를 만천하에 공개하자는데 의견을 모았다(토론 전내용은 ‘인포아트’ 사이트에서 무삭제로 볼 수 있다).

모임 중간에 알음알음으로 자리를 함께 했던 조희문 교수, 최진용 국장, 조명애씨 등도 ‘뒤죽박죽’ 멤버로 눌러 앉았다. 생업에 바쁜 인사들이지만 매달 마지막주 토요일로 잡혀 있는 ‘뒤죽박죽’ 출석률은 100%에 가깝다.

열명 남짓한 수다 멤버들은 “살가운 문화 수다는 한 번 맛을 들이면 헤어나기 힘들만큼 중독성이 높다”면서 “다른 분야의 정보와 식견을 나누다보면 책이나 언론매체에서 얻을 수 없는 도움을 받는다”고 입을 모은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이등병의 편지' 뮤지컬제작 나서

‘뒤죽박죽’이 수다만 떠는 것은 아니다. 뜻밖에도 뮤지컬 제작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황인뢰 감독이 연출할 ‘이등병의 편지’(가제)가 그것.

몇 달전 모임 멤버 중 한 사람이 서울 세실극장에서 올릴 공연물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황인뢰 감독이 고(故) 김광석의 노래를 뮤지컬로 만들려고 자료를 수집 중인 것을 알게 됐다. 황 감독은 몇 해전 록 뮤지컬 ‘하드록 카페’를 연출해 성공을 거둔 바 있다.

그러자 박성호 인포아트 대표가 나섰다. 3∼4억원은 족히 들어갈 제작비를 책임지겠다고 제안한 것. 박광성 사장은 대본을 공연 전에 소설화해 출판하자는 의견을 냈고, 송승환 대표는 마케팅을 맡기로 했다. 공연은 올 연말로 예정하고 있다.

‘뒤죽박죽’은 내친 김에 28일 열릴 다음 모임의 주제를 ‘이등병의 편지’로 잡았다. 각자 뮤지컬의 극본을 생각한 뒤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것. 과연 어떤 스토리가 탄생할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