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로 보는 세상]"반짝이는 구두 세상이 비친다"

  • 입력 2000년 10월 26일 18시 39분


이분야에선 압구정동과 더불어 전국 최고의 매상을 올리는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서 부인 김은섬씨(39)와 함께 구두를 닦은 지 4년째. 벌써 5월부터 서울 벤처밸리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하나둘 사무실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하기에 현씨는 알아봤다. 흠, 경기가 나빠지겠구먼.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절만 해도 고쳐 신는 게 유행이라 뒷굽 밑창 수선주문이나마 쏠쏠해 크게 타격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경기침체가 그대로 매상과 직결된다.

“‘전두환 시절’인 80년대 중반에서 후반까지가 매상이 최고였죠.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이었다나? 그때만 해도 다들 광내고 다녔는데, 10년 새 구두 닦는 값이 500원에서 2000으로 올랐지만 버는 건 비슷해요.”

오전 8시반에 출근해 자신의 ‘성’에서 가까운 대우자동차 산내들 국민카드사를 돌며 영업사원들의 구두를 닦는 게 첫 번째다. 반짝이는 구두는 영업사원의 얼굴이자 자신감이므로.

그 다음부터는 구두를 닦아 1시간 안에 주인을 찾아주는 일이 반복된다. 이 곳 12개 빌딩이 현씨 부부의 관할. 관할은 법보다 강한 묵계로 동업자들간 상호 존중된다.

“구두를 보면 키 몸무게 성격 인간성까지 나오죠.”

매일 100개 이상, 월요일은 130개가 넘는 구두를 닦으면서 돌려줄 땐 어떻게 그렇게 귀신같이 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현씨는 이렇게 답했다.

대충 발 크기와 키 몸무게는 비례하며, 술 좋아하는 사람들은 술 냄새가 구두에 배어 있다. 영업직과 사무직은 ‘거친’ 외부의 먼지와 ‘고운’ 내부의 먼지에서 차이가 난다. 곱게 신는 사람, 뒤축을 자주 수선해 신는 사람은 성격도 세심하고 준비성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사나흘만 지나면 얼굴과 구두가 완전히 매치될 만큼 외운다.

달에 휴일, 비 오는 날 빼고 20일을 업무일로 친다. 봄 가을에 손님이 제일 많다. 벤처인들은 또 운동화나 캐주얼화를 많이 신는 탓에 ‘구두〓닦아 신는 것’에 대한 관념이 점차 부족해져 안타깝다.

비 오는 날이면 길 물어보는 손님이 더 많다. 버스는 어디서 타느냐, 주차장은 어디냐, ○○빌딩은 어디냐….

“하루 100명은 족히 넘습니다. 우리야 근처 지리는 제일 빠삭하게 아니까 성실하게 답변해 드리죠. 그렇게 눈도장 찍어놓으면 오다가다 우리 가게 와서 구두도 닦으시고요.”

2013년까지 서울시에서는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노상의 구두수선소를 정리하기로 하고 매년 10%씩 점차 줄여나간다는 방침이다. 안 그래도 장사가 안되니까 떠나는 사람이 많다.

◇보육원에 월 10만원씩 선행도◇

현씨 부부는 둘이서 월 250만원의 수입을 올리지만 변두리에서는 월100만원도 안 되는 곳이 허다하다고 전했다. 그는 강남재활보육원의 불우아동 2명에게 월 10만원씩을 보내주는 ‘도시의 천사’ 노릇도 하고 있다.

<조인직기자>cij19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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