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법정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

  • 입력 1998년 6월 11일 19시 54분


‘눈이 많이 쌓이면 짐승들이 먹이를 찾아서 내려온다. 그래서 콩이나 빵부스러기 같은 먹을 걸 놓아준다. 박새가 더러 오는데, 박새한테는 좁쌀이 필요하니까 장에서 사다가 주고 있다.

고구마도 짐승들과 같이 먹는다. 나도 먹고 그 놈들도 먹는다. 밤에 잘 때는 이 아이들이 물 찾아 개울로 내려온다. 눈 쌓인 데 보면 개울가에 발자국이 여럿 나있다. 토끼 발자국도 있고, 노루 발자국도 있고, 멧돼지 발자국도 있다.

그 아이들을 위해 해질녁에 도끼로 얼음을 깨고 물구멍을 만들어 둔다. 물구멍을 하나만 두면 그냥 얼어 버리기 때문에 숨구멍을 서너 군데 만들어 놓으면 공기가 통해 잘 얼지 않는다….’

여러 해 동안 법정스님이 법문하고 말한 내용을 모은 ‘산에는 꽃이 피네’(동쪽나라). 시인 류시화씨가 스님의 ‘육성 그대로’ 옮겼다. ‘명상시인’이 들려주는 법정스님의 이런 저런 일화를 곁들여서.

봄에 산을 내려오다가 오솔길 복판에 솟아난 대나무 싹을 손으로 뽑으며 “미안하지만 여기는 너의 길이 아니구나…”라고 속삭이는 스님의 모습이 눈에 잡히는 듯 하다.

어떤 때는 비온 뒤 개울가를 씻어내리는 힘찬 물줄기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대숲에 내리는 겸허한 싸리눈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슬그머니 발등에 올라앉는 풀여치의 감촉 같기도 한, 따스한 글들. 책 갈피 갈피마다 스님의 빈한한 살림살이 만큼이나 간소하고, 후박나무 잎사귀 만큼이나 넉넉한 삶의 지혜가 여울진다.

‘산에서 살다 보면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들이 많이 꺾이고 만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꺾이게 된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꺾이는 메아리가 울려올 때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에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겨울이 지나고 나면 앓고난 얼굴처럼 수척하다….’

류시화씨가 불일암을 찾았을 때 일이다. 스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혹시 낮잠을 주무시는게 아닌가 해서 오두막 가까이서 스님을 부르자, 먼 뒤꼍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스님, 이 무더운 날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졸음에 빠지지 않으려고 칼로 대나무를 깎고 있었습니다….”

이 대나무 깎는 일화를 두고두고 삶의 경책(警策)으로 삼고 있다는 류씨. 그는 묻는다. 스님은 홀로 사는 즐거움을 말하지만 그것은 또한 얼마만큼이나 스스로 자신의 매서운 스승 노릇을 해야 하는 일인가.

스님을 가까이서 지켜본 류씨는 그에게서 무소유(無所有)의 부유함과 안빈(安貧)의 풍요를 본다. 그 조촐한 삶에 깃든 드높은 영혼을 느낀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본래 무일물(本來無一物)이니, 마음을 비워 두어야만 그 안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려 나온다….”

스님은 여러 해 전부터 ‘맑고 향기롭게’란 모임을 꾸려가고 있다. ‘중도 밥값을 해야한다’는 생각에서다. 소란스럽고 떠들썩한 게 싫어 모임을 작고 소중한 만남과 시간들로 일구어 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맑고 향기롭게’ 맺어져 산에도 가고, 수선화 원추리 할미꽃 두메부추 같은 꽃들도 심어보고, 오염된 강물을 찾아가서 거기에 비친 자신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한 송이 꽃이 피어나면 수천수만 송이의 꽃이 피어난다고 하던가. 한 존재의 맑음과 향기로움이 갖는 울림이 우주 전체의 메아리가 된다는 믿음이 모임을 떠받들고 있다.

대부분의 시간을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보내는 스님. 어찌 외로움이 없을까. 하지만 인간은 외로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가끔은 옆구리에서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껴야 자신의 존재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명상(瞑想)은 존재의 고요와 향기를 맡는 수행정진인지 모른다.

‘연꽃은 아침 일찍 봐야 한다. 오후가 되면 벌써 혼이 나가 버린다. 연꽃이 피어날 때의 향기는 다른 꽃에선 맡을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 연꽃에 맺힌 이슬방울, 그것은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답다. 비오는 날 우산을 받고 연못가를 거닐고 있으면 후둑후둑 연잎에 비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명상은 마음을 열고 연잎에 비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일과 같다….’

보리달마가 말한 ‘관심일법(關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마음을 살피는 그 한가지 일이 모든 현상을 거둬 들인다는 뜻이다. ‘지식은 밖에서 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움튼다….’

스님의 한 마디는, ‘안으로 살펴라…’.

그가 즐겨 인용하는 인도 시인 까비르의 시.

‘꽃을 보러 정원으로 가지 말라/그대 몸안에 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다/거기 연꽃 한 송이가 수천 개의 꽃잎을 안고 있다/그 수천 개의 꽃잎 위에 앉으라/수천 개의 그 꽃잎 위에 앉아서/정원 안팎으로 가득 피어 있는 아름다움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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