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짜요리사 임지호씨, 풀잎좇아 떠도는 「맛의 구도자」

  • 입력 1997년 5월 10일 08시 27분


《열여섯개의 백자 종지. 종지마다 연녹색 솔잎가루, 쥐색 흑임자(검은깨)가루, 주황색 홍화가루 등 색색의 분말들이 팔레트 위의 물감처럼 소복이 담겨 있다. 임지호씨(43)는 조심스레 가루들을 공기 하나에 덜어낸 뒤 식용유와 식초 등을 붓고 빠르게 젓는다. 산에서 뜯어온 피나물과 야생박하, 찔레순이 담긴 그릇에 이렇게 만든 드레싱을 부어 샐러드를 만들어낸다.》 『자! 들어보시지요』 상쾌한 솔잎 향과 찔레의 쌉싸름한 맛이 어우러진 맛. 평소 먹던 음식에서는 느껴본 적이 없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향취. 입안에서 살아 숨쉬는 탈속(脫俗)의 체험이다. 산풀을 뜯느라 거칠어진 손마디가 쉴새없이 움직인다. 잽싼 칼놀림으로 다져낸 돼지고기를 떼어내 파릇한 산동백잎으로 싸서 끓는 기름에 넣는다. 미리 준비해 놓은 새빨간 장미꽃잎을 하나하나 뜯어내 접시위에 늘어놓는다. 음식이 너무 고와 맛을 보지 않고도 마음부터 즐거워진다. 경기 광주군 퇴촌면 산골의 음식점 담원에서 임씨를 만났을 때 그는 개량한복 바지저고리 차림이었다. 친지들은 그를 「맛의 구도자」 또는 「나그네 요리사」라고 부른다. 그의 행적에 걸맞은 별명이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그는 8세에 가출, 전국의 한식 양식 중국식 등 음식점을 전전하며 어깨너머로 온갖 요리법을 익혔다. 80년대 중반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현장에서 2천명의 식사를 책임진 적도 있고 호텔 식당에서 주방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음식을 만드는 일이 더이상 즐겁지 않았다. 훌훌 자리를 털고 방랑길에 올랐다. 『무당과 마찬가지지요. 신이 들려 만든 음식만이 사람의 몸과 마음을 맑게 할 수 있는 법입니다』 사람의 생기를 북돋워주는 음식재료를 찾아 일년중 4,5개월은 전국의 산과 들을 헤맸다. 이때부터 세상의 온갖 풀과 꽃, 매미껍질 구더기 닭똥까지 그에게는 훌륭한 음식재료가 됐다. 처음 보는 풀을 뜯어 맛보다가 중독돼 혼수상태에 빠진 적도 여러번. 불자인 그는 몇년전 계룡산 동학사와 속리산 법주사에서 고기와 마늘 등 불가에서 금기시하는 재료를 뺀 자장면을 만들어 수백그릇을 공양했다. 무욕에 정진해야 할 스님들이 『너무 맛있다』며 식탐을 했다고. 그의 음식솜씨에 매료된 예술인도 많다. 경기 용인군 백암면 박공리 임씨의 음식연구실에 이웃해 사는 괴짜 피아니스트 임동창씨가 대표적인 예. 두 임씨가 만나면 한바탕 「음식과 음악의 퍼포먼스」가 벌어지곤 한다. 『그의 연주에서 영감을 얻어 음식을 만들고 그는 내 음식을 먹어가며 피아노를 치죠. 정신세계의 하모니 같은 겁니다』 임씨는 『지난 십수년간 한번도 같은 음식을 만들어 본 적이 없다』고 공언한다. 그때그때 구할 수 있는 재료와 먹는 사람의 성격, 기분에 따라 모양과 맛이 전혀 다른 음식을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음식을 「이미지 음식」이라고 부른다. 돈을 댈테니 음식점을 동업하자는 제의도 많다. 하지만 임씨는 『돈을 좇으면 맛이 달아나고 맛을 좇으면 돈이 멀어지니 어쩔 수 없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궁극의 맛」을 찾는 그의 구도(求道)는 언제쯤이나 끝이 날까. 〈박중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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