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입시학원 내려놓고 10년간 가꾼 찍박골정원[김선미의 시크릿가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7월 13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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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한 신부와 수녀가 살던 곳이라고 한다. 한여름 수국 꽃다발 같은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해발 700m 강원 인제군 찍박골. 그들은 얼마나 사랑했으면 화전민들이 살던 외딴곳을 찾아 들어왔을까. 왜 다시 이 땅을 팔고 외진 바닷가로 떠났을까. 깊은 사연이야 골짜기 어딘가에 묻혀 있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그들의 사랑이 스쳐 간 자리를 김경희 씨(59)가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꾸어냈다는 점이다.

강원 인제군 찍박골에 10년간 정원을 가꿔온 김경희 정원주. 요즘에는 매일 오전 5시 눈을 뜨면 네 시간가량 정원일부터 한다. 인제=김선미 기자


개인 정원이라 ‘찍박골정원’이라는 푯말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산비탈을 오르는 길에 빨간색 베르가못과 아기 얼굴 크기의 애나벨 수국이 피어있는 걸 보고 정원의 환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다. 소나무숲 트리하우스 옆에 차를 세우자 흰 풍산개가 따라왔다. 탁 트인 시야로 저 멀리 연푸른색의 설악산 중청이 들어왔다.

“남편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것만 보고 가는 사람이에요. 산속에서 살겠다고 온갖 산을 찾아 다니더니 11년 전에 여기 땅을 사서는 처박혀 나오지 않는 거예요. 학원이 굴러가든 말든 내버려 두고요.”

글맥학원 원장이었던 남편 김철호 씨와 아내 김경희 씨가 찍박골정원 댄싱가든에 섰다. 그들의 뒤로는 가리봉과 멀리 설악산 중청이 보인다. 인제=김선미 기자


시골 생활에 통 관심이 없던 이 정원의 안주인 김경희 씨는 이사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따라왔다가 눌러살게 됐다. 그의 남편은 입시학원 ‘글맥학원’의 설립자이자 원장이던 김철호 씨(68). 8개 분원에 1만2000여 명의 학생이 다니던 이 학원은 2000년대 중반 한 해에 700여 명을 특목고에 진학시키며 명성을 날렸다. 이화여대를 다닌 김경희 씨는 30년 전 이 학원의 영어 강사로 입사해 일하다가 나중에는 이 학원을 함께 경영했다. 그들은 2013년 학원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고, 인제군의 찍박골 산속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흰 꽃들로 여름의 싱그러움을 담은 화이트 정원. 뒤에 보이는 건물이 김 씨 부부가 사는 집이다. 인제=김선미 기자


“염소를 키우던 곳이라 처음에는 나무 한 그루 없는 풀밭이었어요. 그래도 다 큰 저희 세 아들의 축하를 받으며 야외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어느 날, 글맥학원 사옥을 지어줬던 최시영 건축가가 ‘신혼여행 삼아 영국으로 가든 투어나 갑시다’라고 하더군요. 그 여행을 통해 제가 전혀 모르던 정원의 세계를 접하며 문화적 충격을 받은 후 지금까지 정원 가꾸는 재미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정원은 제게 제2의 인생을 열어주었습니다.”

에키나시아 블랙베리 트러플, 미역취, 숙근 제라늄 등이 어우러진 찍박골 정원. 인제=김선미 기자


찍박골이라는 지명은 직박구리가 자주 날아들어 동네 어르신들이 부르기 시작한 이름이라고 했다. 1만 평 부지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 찍박골정원은 지금 여름꽃이 만발해 있다. 벌과 나비가 날아앉는 에키나시아, 몽환적 느낌이 나는 노루오줌(아스틸베), 촛불처럼 뾰족하게 올라온 꼬리풀, 여왕처럼 화려한 빨간 헬레니움 ‘모하임 뷰티’, 영국의 정원 잡지들이 노동력을 많이 투입할 수 없는 어르신들이 가꾸는 정원에 추천하는 꽃 1순위라는 노란색 원추리….

“농사를 지으면서 부리는 최고의 여유이자 사치가 꽃이에요. 그런데 실은 이 정원은 온갖 실패를 먹고 자란 정원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영국 정원 만들기’라는 목표를 향해 돌진했거든요. 정원에서 10년을 보낸 이제야 봄의 환희, 여름의 치열함, 가을의 느린 넉넉함을 느낍니다. 겨울에는 푹 쉬고요. 한국인이 가장 못 하는 게 참는 것이라죠?(웃음) 정원을 만들고 싶다면 1년 정도는 그저 가만히 지켜보세요. 어디에서 바람이 불어오는지, 땅은 얼마나 촉촉한지…. 실은 정원에서 가장 정성을 쏟아야 하는 대상은 흙이에요. 토양이 건강해야 식물들이 잘 살 수 있어요. 한 해 늦게 가도 됩니다. 안 그러면 저처럼 심고 파내고 또 심고 파내면서 몇 년을 신참내기 정원사로 살아야 해요.”

찍박골정원 앞마당 정원에서 김선미 기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김경희 정원주.


김 씨는 앞마당 정원, 텃밭 정원, 댄싱 가든, 화이트 가든, 암석정원, 자작나무숲, 개울 정원, 사과공원, 숲자락 정원 등 10년에 걸쳐 9개의 정원을 만들었다. 앞마당 정원이 보이는 야외 테이블을 안내받아 앉자 그가 ‘애플카인드’ 사과 주스를 내왔다. 애플카인드는 김 씨 부부와 세 아들이 강원 양구군에서 7년 전부터 운영하는 농업회사법인이다. 이 법인의 회장이 남편 김철호 씨, 이사가 아내 김경희 씨다. 애플카인드 회사 홈페이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자연의 순리 속에서 사람도 사회도 사과 농사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젊은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행복한 농촌 생활, 풍요와 여유가 있는 농촌 생활, 바쁜 도시 생활에 지친 현대인에게 산소 같은 대안이 될 수 있는 농촌 생활의 모범이 되겠습니다.’

김 씨 부부가 강원 양구군에서 운영하고 있는 농업회사법인 ‘애플카인드’ 임직원들. 김철호 씨(붉은 상의 위에 조끼) 옆이 둘째 아들 김두원 본부장(재무), 김경희 씨 (노란 상의 위에 조끼) 옆이 첫째 아들 김대현  부사장(농장 총괄), 김 씨 부부 뒤가 막내아들 김중원 부사장(유통  총괄).  애플카인드 제공
김 씨 부부가 강원 양구군에서 운영하고 있는 농업회사법인 ‘애플카인드’ 임직원들. 김철호 씨(붉은 상의 위에 조끼) 옆이 둘째 아들 김두원 본부장(재무), 김경희 씨 (노란 상의 위에 조끼) 옆이 첫째 아들 김대현 부사장(농장 총괄), 김 씨 부부 뒤가 막내아들 김중원 부사장(유통 총괄). 애플카인드 제공


정원 일을 하던 남편 김철호 씨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햇빛을 받아 탔지만 윤기 흐르는 얼굴에는 주름살이 보이지 않았다. 칠순 가까운 나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원 일이 나뭇가지 잘라주는 일처럼 힘쓰는 일이 많아 여자 혼자 다 할 수가 없어요(웃음).” 남편과 아내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노래하는 작은 새라면, 남편은 듬직하게 서 있어 주는 나무의 느낌이었다.

아내 김경희 씨는 오랫동안 학원을 경영했던 경험을 살려 정원에서의 생활을 꼼꼼하게 기록해 파일로 정리해 두었다. 지난해부터는 가드닝 잡지의 객원기자를 지원해 활동하고, 블로그에 꾸준히 글을 썼다. 그 모든 것들이 쌓여 지난달 ‘찍박골정원’(목수책방)이라는 책도 펴냈다. 식물과 정원에 ‘진심’인 사람들에게 온몸으로 배운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싶었다고 한다.

4년 전 정원에 심은 어린 자작나무 100그루가 그새 숲을 이뤘다. 김 씨 부부는 이 자작나무 숲에서 막내아들과 손주들을 결혼시키고 싶다고 한다. 인제=김선미 기자


10년 전 나무 한 포기 없던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렸던 부부는 4년 전에는 손가락 굵기의 한 살짜리 자작나무 100그루를 심었다. 둘째 아들이 직전 해에 앞마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피로연을 연 장소였다. 6월 초인데도 파라솔로 가려지지 않는 열기 때문에 무더워서 막내아들에게는 작은 숲을 만들어 숲속 결혼식을 해주고 싶었단다. 자작나무 껍질을 의미하는 ‘화촉’(樺燭)이라는 단어도 좋았다고 했다. 그 나무들이 자라 정말로 숲을 이뤘다. “우리가 떠나고 없을 때에도, 이 자작나무 숲에서 우리 아이들은 모임을 하고, 더운 여름날 그늘 아래에서 꾸벅꾸벅 졸음을 즐기고, 우리 손주들은 결혼식을 올리는 스토리를 쌓아가기를 바랍니다. 저는 겸손과 지혜를 가진 할머니로 나이들고 싶습니다.”

부부는 ‘자연의 순리’라는 말을 자주 했다. 30여 년 학원을 경영하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수면제를 늘 달고 살던 부부는 이제 정원에서 즐거운 노동을 마치고 푹 잔다. 낮잠도, 밤잠도 다 잘 잔다.

“서울에 살 때는 사람이 일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기 찍박골에 와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아, 사람이 일하는 게 아니라 자연이 하는 거구나.’ 아무리 기를 써서 물과 양분을 준다고 해도 사과는 여름에 절대로 열리지 않잖아요. 모든 게 채워져야 맛있는 열매가 되고, 아름다운 꽃이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건 내가 아직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여름을 대표하는 에키나시아. 김경희 씨는 이 꽃에 대해 “너무 밤 늦게까지 야근하는 것 같아서 강제로 퇴근시켰더니 다음날 제일 먼저 출근하는 직원 같다. 초여름에 꽃이 피기 시작해 늦여름까지도 꽃을 피우기에 그만 쉬라고 꽃대를 모두 잘라주었는데, 또 꽃대를 올리더니 초가을까지 피어 있다. 사랑스러운 미련곰탱이 식물이다”라고 했다. 인제=김선미 기자

몽환적인 느낌의 꽃을 피우고, 시든 후에는 깔끔하게 마르는 노루오줌. 김경희 씨는 “노루오줌은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진중한 현자 같다”고 한다. 인제=김선미 기자


김경희 씨의 얘기를 듣다 보면 정원에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인생 철학자가 따로 없다.

“정원에서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배워요. 식물에게 문제가 생기면 ‘얘는 뭐가 마음에 안 들었을까?’ 식물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해결될 때가 많아요. 식물이 말을 안 해주니 제가 알아채는 수밖에 없어요.”

“떠날 때를 알고 얌전하게 사라져주는 아이, 추레함의 끝판왕처럼 시들어가는 아이, 욕심껏 씨앗을 뿌리고 사라지는 아이, 시들고 난 이후의 모습이 꽃 필 때보다 더 아름다운 아이가 정원에는 다 있습니다.”

“묵은 꽃송이를 잘라줘야 새로운 꽃송이가 잘 올라옵니다. 어른 세대는 젊은 세대에게 적당한 때에 자리를 비켜주는 지혜를 배웁니다. ”

‘찍박골정원’ 책에 사인해 달라고 부탁하자 김경희 씨는 ‘정원이 우리 모두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길요’라는 글귀를 적고 그 옆에 에키나시아 꽃을 그려 넣었다. 그날로부터 정말로 정원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았다.

노란색 스텔라 원추리가 생기를 돋우는 찍박골 정원의 전경. 인제=김선미 기자


●찍박골정원 김경희 정원주의 가드닝 팁
1. 정원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은퇴 후에 조용히 쉴 정원인지, 손주들이 뛰어놀 공간이 필요한 가족 모임을 위한 정원인지, 사무 공간에 딸린 정원인지 등에 따라 정원의 형태, 식재 공간, 식물의 종류가 달라진다.

2. 실행보다 기획을 먼저 해야 한다.
일주일에 몇 시간이나 투자할 수 있는지가 고려돼야 정원 일에 치이지 않고 힐링이 되는 가드닝을 즐길 수 있다.

3. 모든 식물은 자기 자리가 있다.
알맞은 장소에 알맞은 식물을 심어야 한다. 비옥한 땅을 좋아하는 아스트란티아는 건조한 땅에서는 거의 자라지 않는다. 반대로 우단동자는 바위틈에서도 씩씩하게 자란다.

4. 뿌리로 번식하거나 성장이 너무 왕성한 식물은 정원 안에 들이지 않는다.
샤스타데이지, 꽃범의꼬리, 둥글레, 초롱꽃, 리시마키아, 민트, 비비추 등이다.

5. 관찰하고 기록해라.
정원마다 토양이 다르기 때문에 내 정원에서 잘 자라는 식물을 골라야 한다. 식물은 꽃이 없어도 건강하게 자라면 모두 아름답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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