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가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화분 속 작은 자연’의 위로[김선미의 시크릿가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7월 20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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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내린 어느 목요일 오전, 서울 북촌의 아담한 한옥 앞에 다다랐다. 처마 아래에는 ‘oita’라고 쓰인 흰색의 작은 간판이 있었다. 그녀가 투명한 비닐우산을 쓰고 한옥의 나무 대문을 열었다. 비도, 우산도, 그녀의 앳된 인상도 청량한 느낌. 그녀의 공간을 채운 나무들도 그랬다. 만병초, 진백나무, 꽃창포, 표단목, 봄백일홍…. 생김새만큼 이름도 다정한 식물들이 가득한 ‘비밀의 정원’이었다.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계동 오이타스튜디오에서 최문정 씨가 자신이 키우는 식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김선미 기자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계동 오이타스튜디오에서 최문정 씨가 자신이 키우는 식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김선미 기자
“대문 앞에는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식물을 둬요. 이 둥글둥글한 식물(화백나무)이 요즘 제 마음에 들어와요. 이끼 같기도 한 푸른 덩어리 형태가 시원한 느낌을 주거든요. 그런데 이런 분재는 가만히 아래에서 바라보면 잔가지들이 빼곡해서 세월을 느낄 수 있어요.”

한옥의 대문을 열면 최문정 씨가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배치하는 식물들이 보인다. 둥글한 형태의 식물이 요즘 최 씨가 각별히 마음을 두는 화백나무다.  김선미 기자
한옥의 대문을 열면 최문정 씨가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배치하는 식물들이 보인다. 둥글한 형태의 식물이 요즘 최 씨가 각별히 마음을 두는 화백나무다. 김선미 기자
오이타(oita)는 30대 초반인 최문정 대표가 5년 전 문을 연 식물 스튜디오다. 그녀가 스무 살 되던 해 하늘나라로 간 아버지 이름의 영어 이니셜에서 따왔다고 한다. 식물을 각별하게 좋아했던 아버지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식물을 심고 돌본다.

북촌의 한옥으로 이사하기 전, 서울 종로에 있던 여섯 평 규모의 오이타를 기억한다. 꽃집이라기보다는 작은 나무들을 파는 가게였다. 그런데 식물들이 남달랐다. 키 낮은 화분에 심어진 식물들은 옆으로 눕기도 하고, 부드럽게 구부러져 있기도 했다. 그날 이후 서울 용산 스틸북스와 챕터원 등 트렌디한 문화공간들의 팝업 이벤트에서 ‘오이타표’ 식물들과 우연히 마주칠 때가 많았다. 정갈한 화분에 담긴 그 식물들의 선(線)을 보면서 고요함 같은 말들을 떠올렸던 것 같다.

서울 종로구 계동의 작은 골목길에 위치한 오이타.  김선미 기자
서울 종로구 계동의 작은 골목길에 위치한 오이타. 김선미 기자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하면서 식물을 소개하는 그녀는 오랫동안 중장년층의 취미로 여겨졌던 분재 가꾸기를 MZ세대의 마음챙김 라이프스타일로 탈바꿈시켰다. 정원을 갖는 건 꿈같은 얘기로 느껴지는 평범한 도시 소시민도 작은 화분쯤은 집 안에 들일 수 있으니까. 산세베리아 같은 공기정화식물을 찾던 대중에게 그녀의 ‘화분 속 작은 자연’(분재)은 신선함으로 다가갔다. 코로나19로 인해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가만히 식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늘어난 시대적 흐름도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식물의 세계로 발을 들인 걸까.

줄기가 옆으로 뻗으면서 유려한 곡선미를 보여주는 최 씨의 팥꽃나무.  오이타 제공
줄기가 옆으로 뻗으면서 유려한 곡선미를 보여주는 최 씨의 팥꽃나무. 오이타 제공
-내자동에서 계동의 한옥으로 이사했네요.
“오이타를 시작하기 전에 서울 강남에서 꽃가게를 했어요. 돈이 없어 강북의 월세 싼 곳을 찾아왔는데 내부에 수도가 없어 밖에서 물을 길어와야 했어요.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가 가장 재밌었어요. 조금씩 상황이 나아진 것 같아요.”

최 씨의 주방에는 가는잎천선과처럼 잎이 가는 식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김선미 기자
최 씨의 주방에는 가는잎천선과처럼 잎이 가는 식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김선미 기자
-대학에서 식물 관련 전공을 했나요.
“아니에요. 원하지 않던 컴퓨터 관련 학과에 들어갔기 때문에 일찌감치 ‘나만의 분야’를 애쓰며 찾았어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일이면서 사람들이 특별하게 보는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뭔가 손으로 하되 미적 감각이 있는 장인 같은 일을 꿈꿨어요. 그래서 대학을 다니며 처음 배운 게 식물의 잎을 따서 물을 들이는 천연 염색이었어요. 어려서부터 할머니 시골집에서 식물을 가까이했던 게 영향을 준 것 같아요.”

-그런데 왜 식물로.
“염색해서 지인들에게 선물해 보니 물도 빠지고 반응이 별로였어요. 그러면 또 뭘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식물을 좀 재밌게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돌과 조화롭게 심은 꽃창포는 비 오는 날 공간에 활기를 준다. 김선미 기자
돌과 조화롭게 심은 꽃창포는 비 오는 날 공간에 활기를 준다. 김선미 기자
-식물을 어디에서 배웠나요.
“일단 좋아하는 야생화를 인터넷에서 많이 샀어요. 시행착오를 거치며 키우는 과정을 블로그에 기록했어요. 10년 전쯤부터 ‘가드닝’이란 말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서울 청담동의 작은 가드닝 매장에 무작정 찾아가 ‘한번 배워보고 싶다’고 했어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어요. 대학 다니면서 가드닝 매장에서 아르바이트해 번 돈으로 서울에서 가장 비싸다는 곳을 일부러 찾아가 가드닝을 배웠어요. 졸업 후에는 매장 정직원으로 취직해 일하면서 또 배웠어요.”

-건실한 청년이었네요.
“굉장히 치열하게 살았죠. 식물을 심다가 쓰러져 응급실에도 가봤어요. 남들은 제가 여장부 같다고 하는데 모든 원동력은 저의 20대 때 형성된 것 같아요. 하지만 그때의 저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괴로웠어요. 가드닝 배우는 코스가 비싸요. 저는 아침부터 일하면서 배우는데 제 또래 ‘부잣집 따님’들은 몇 달 배우고 턱턱 자기 숍을 차리는 거에요. 당시 제 자존감은 바닥이었어요.”

최 씨가 키우는 표단목. 크기는 작아도 오래된 나무의 연륜이 화분 안에 서 자태를 뽐낸다.  김선미 기자
최 씨가 키우는 표단목. 크기는 작아도 오래된 나무의 연륜이 화분 안에 서 자태를 뽐낸다. 김선미 기자
한옥의 유리 천장 위로 빗방울이 투두둑 떨어져 동글동글 퍼졌다. 식물도 시간도 천천히 흐르는 듯한 공간. 그녀가 틀어둔 피아노 음악이 빗소리와 섞였다. “이곳 한옥으로 이사 오면서 몇몇 여린 식물은 마당의 강한 빛으로 인해 잎이 말라버렸어요. 한옥은 계절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는 공간이라서 그래요. 몸살을 앓는 식물들 틈에서 생생한 모습으로 제게 위로를 건넨 식물은 야생화였어요. 한옥에는 한국적인 식물이 어울릴 수밖에 없어요. 사람에게도 식물에게도 각자 빛날 수 있는 자리가 따로 있어요. 적재적소(適材適所)라고 하잖아요.”

그녀와 마주 앉은 나무 테이블 곁에는 줄기가 구부러진 작은 진달래 분재가 놓여 있었다. “유연해 보이지만 사실은 뿌리가 굵고 단단한 식물을 좋아해요. 잎들을 보면서 식구들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하고요. 누워있어도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 이 아이를 보면서 ‘나도 차근차근 단단하게 성장해야지’라는 마음을 갖게 돼요.”

최 씨가 좋아하는 화분에 심은 진달래 분재. 그는 단단하게 뻗어나가며 새로운 잎을 피우는 이 식물을 보면서 종종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린다고 한다. 김선미 기자
최 씨가 좋아하는 화분에 심은 진달래 분재. 그는 단단하게 뻗어나가며 새로운 잎을 피우는 이 식물을 보면서 종종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린다고 한다. 김선미 기자
-바닥 친 자존감은 어떻게 회복했나요.
“서울 강남에서 꽃가게를 할 때 제가 좋아하는 야생화가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원하는 화려한 꽃과 잎이 풍성한 나무를 주문받아 팔았어요. 매출이 올라도 전혀 기쁘지 않았어요.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불편하게 걷는 꼴이었어요. 외관만 번지르르한 삶은 마음을 설레게 하지 않아요. 좋아하는 식물을 내 방식대로 하자고 마음먹자 편안해졌어요. 삶의 많은 부분이 마음가짐과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더라고요.”

최문정 씨가 자신이 키우는 식물들의 줄기와 잎을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다.  김선미 기자
최문정 씨가 자신이 키우는 식물들의 줄기와 잎을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다. 김선미 기자
-분재는 나무를 학대하는 행위라는 비난도 있습니다만.
“어린 시절 저도 같은 마음이었어요. 줄기를 감싸는 철사 때문에 나무가 얼마나 아플까 하고요. 그런데 나무에 철사를 거는 중요한 이유가 있어요. 상부의 나뭇잎에 가려져 빛을 제대로 못 받는 가지가 빛과 바람을 잘 받을 수 있게 해야 하거든요.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부족한 점은 인정하고 잘할 수 있는 부분을 강화하면 더 나은 내가 되겠죠. 작은 나무와 돌, 이끼와 모래로 풍경을 표현하는 분경(盆景) 작업을 하다 보면 자연도 사람도 완벽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러니 그저 자주 바라보고 싶은 풍경을 담으면 돼요.”

-식물과 교감하며 어떤 걸 느끼나요.
“천천히 가도 괜찮다는 거요. 어떤 식물을 들일까 조언을 구하는 분들에게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곰곰이 들여다보라고 말씀드려요. 마음이 너무 지쳤다면 줄기나 가지가 옆으로 뻗는 식물을 키워보세요. 옆으로 흐른다고 멈춘 게 아니거든요. 성장하지 않는 듯 보여도 자라고 있어요. 때때로 한 템포 쉼이 필요한 삶의 단계에는 자유로운 흐름의 식물을 들여 위로를 받아보세요. ‘나도 너도 노력하고 있다’고. 삶이 천천히 흐르면 작은 변화도 알아챌 수 있어요. 화분에 물을 주면 식물이 물을 먹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소리가 그렇게 매력적인 속삭임이라니까요.”

세월을 담은 분재는 빛과 그림자와 어우러질 때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힘을 가진다. 오이타 제공

●최문정 오이타 대표가 분재를 하면서 자주 읽는 책
1. Music For Inner Peace (박정용)
2. 코르뷔지에 넌 오늘도 행복하니 (에이리가족, 네임리스 건축)
3. 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4. 앤티크 수집 미학(박영택)
5. 평온한 날 (김보희)
6.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최순우)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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