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포트]자민당 파벌끼리 밀실서 합의하면 끝… 설 곳 없는 민심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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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파벌 스가를 총리로 만들어내는 日 파벌정치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도쿄 총리관저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며 질문자를 지정하고 있다. 그는 14일 열리는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자민당의 7개 파벌 중 5개 파벌의 지지를 확보해 당선이 확실시된다. 자민당 총재는 16일 임시국회에서 총리로 지명받는다. 도쿄=AP 뉴시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은 이달 2일 집권 자민당의 총재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지난달 28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사임 의사를 밝힌 지 닷새 만이었다. 하지만 그는 출마 의사를 밝히기 전부터 이미 차기 총재로 사실상 결정된 상태였다. 당내 각 파벌이 내년 9월까지인 아베 총리의 잔여 임기를 책임질 사람으로 관리형 정치인인 그가 적격이라는 데 합의했기 때문이다. 의원내각제인 일본에서는 집권당 총재가 총리를 맡는다.

그 과정에서 1억2000만 국민의 뜻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아무리 의원내각제를 택한 국가라 해도 394명(중의원 283명, 참의원 111명)에 불과한 자민당 국회의원, 그중에서도 몇몇 파벌을 이끄는 극소수 정치인이 최고 권력자를 선출하는 방식이 민주주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를 가능케 한 일본 특유의 파벌정치와 밀실정치에 대한 비판도 거세지고 있다.

○ 자민당 탄생 이후 파벌정치 생겨나

일본 파벌정치의 역사는 자민당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자민당은 1955년 11월 온건 보수 성향의 민주당과 강경 보수 자유당이 ‘보수 대단결’을 기치로 탄생시킨 정당이다. 두 정당의 이름을 합쳐 새 정당은 자유민주당(약칭 자민당)이 됐다.

같은 해 총선에서 제2당으로 약진한 좌파 사회당에 밀려 제3당이 된 자유당은 존립 위기를 느꼈다. 민주당 역시 1당 자리는 유지했지만 불안하긴 마찬가지였기에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이후 65년간 1993년 8월∼1994년 5월, 2009년 9월∼2012년 12월 등 두 차례를 제외하면 여당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장기 집권에는 성공했지만 애초에 결이 다른 두 정당이 뭉쳤기에 당내에는 여러 파벌이 자연스레 생겨났다. 대체로 민주당 계열 정치인은 작은 정부, 화합 외교를 중시하는 편이고 자유당 계열은 큰 정부, 강한 일본을 추구한다.


이에 따라 일본의 정권 교체는 집권당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자민당 총재를 배출하는 파벌 사이에서 이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정 파벌이 배출한 총리의 지지율이 떨어지거나 선거 성적이 좋지 않으면 다른 파벌의 수장을 새 총리로 앉히는 식이다. 변화를 갈망하는 국민에게 ‘당내 정권 교체’란 적당한 타협점을 제시해 일당독재 비판을 비켜간 셈이다.

정계 이단아로 불렸던 자민당 비주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78)가 총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체계가 작동한 결과다. 그는 2001년 집권하자마자 전임자들이 손대지 못했던 우정 개혁 등을 공격적으로 추진했다. 바뀐 총리가 기존 자민당과 다른 노선을 취하자 유권자들은 마치 정권 교체가 이뤄진 듯한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무(無)파벌에 가까울 정도로 당내 기반이 약했던 고이즈미 전 총리가 21세기에 등장한 9명 총리의 평균 재임 기간(26개월)보다 훨씬 긴 5년을 꽉 채워 집권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 중선거구제와 세습정치


일본 파벌정치가 뿌리 깊은 이유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50년 넘게 유지됐던 중선거구제가 꼽힌다. 지역구별로 인구에 비례해 3∼5명의 의원을 동시에 뽑는 제도다.

중선거구제 아래에서 각 정당은 복수 후보를 내세웠다. 동일 선거구에 자민당 후보 3명이 나왔다고 가정할 때 모두가 똑같은 정책을 내세우면 3명 다 당선되기는 힘들다. 각 파벌은 수장 및 노선에 따라 각기 다른 정책을 내세우며 당내 경쟁을 벌였다. 겉으로 보면 우부터 좌까지 다양한 이념 스펙트럼을 만들어내 당내 민주주의를 강화한다는 순기능이 있을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세습정치만 강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일본에는 ‘국회의원에게 3개의 반’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지반(地盤·지역구), 가반(鞄·돈), 간반(看板·가문)을 일컫는 말로 세 요소의 일본어 발음이 모두 ‘반’으로 끝나는 데서 유래했다. 소선거구제라면 최다 득표를 한 후보 1명만이 당선된다. 지역별로 다르지만 최소 40% 이상의 표를 얻어야 한다. 하지만 복수 후보가 뽑히는 중선거구제에서는 15∼20% 득표만 해도 당선이 가능했다. 자금력, 인지도 등에서 일반 후보보다 훨씬 앞선 세습정치인이 절대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일본은 1996년 중의원 선거부터는 1개 선거구에서 1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로 전환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습정치인에게 유리한 정치 문화는 이어지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에 따르면 2017년 중의원 선거 당선인 중 26%가 세습정치인이었다. 자민당으로 제한하면 이 수치는 40%로 오른다. 아베 총리를 포함해 아소 다로 부총리, 고노 다로 외상 등 현 내각의 주요 각료 모두 세습정치인이다.

또 일본은 대부분의 선거에서 유권자가 투표용지에 직접 지지 후보의 이름을 써내는 ‘자필 기술’ 방식을 채택한다. 부정 선거를 막고 용지를 준비하기 쉬운 장점은 있으나 무효표를 양산하는 원인이 되는 데다 익숙한 성을 지닌 세습정치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세습 의원들이 자식의 이름을 ‘이치로’ ‘다로’ ‘신지로’ 등 기억하기 쉬운 이름으로 짓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예로 2000년 5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당시 총리가 뇌경색으로 사망하자 오부치 가문은 가족회의를 열었다. 1남 2녀 중 성격이 활달한 차녀 유코(優子·당시 26세)가 부친의 지역구를 물려받기로 했다. 유권자들은 사회 경험이 거의 없는 20대 여성이 출마했음에도 ‘오부치’라는 이름 하나만 보고 그에게 표를 몰아줬다. 당도 ‘장래 유망주’를 찾기보다 ‘당선의 보증 수표’라는 쉬운 길을 택하는 편이다. 세습정치인들은 대부분 계파 수장을 맡은 경험이 있다. 이 수장 자리 역시 자연스레 대물림된다.

일반 국민의 거부감도 낮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일본은 도쿄대를 나온 엘리트가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조상의 라면 가게를 물려받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다. 정치 또한 요식업과 마찬가지로 특별할 것 없는 가업(家業)이라 여긴다”고 분석했다. 과거 한 여론조사에서는 ‘세습을 제한해야 한다’는 응답이 51%, ‘제한할 필요가 없다’는 응답이 49%로 비슷하게 나타났다.

○ 금권정치의 폐해


파벌정치는 금권정치와 불가분의 관계다. 1970년대 두 차례 총리를 지낸 ‘금권정치의 대부’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는 ‘정치는 머릿수, 머릿수는 힘, 힘은 돈이다’란 말을 남겼다.

그는 돈을 건넬 때 상대가 뇌물로 인식하지 않도록 ‘당신이 이 정도 돈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더 잘 안다. 성의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당내 반대파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계파의 의원이 돈을 부탁해도 요구한 돈보다 많은 금액을 선뜻 내줬다. ‘돈은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다. 그 대신 내가 곤란할 때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파벌정치의 전성기로 평가받는 1980년대 자민당의 각 계파 수장들은 소속 의원에게 여름과 겨울에 각각 ‘얼음값’ ‘떡값’ 명목으로 최소 2차례씩 돈을 건넸다. 각 200만∼400만 엔(약 2200만∼4500만 원) 정도였다. 선거 때도 당과 별도로 최소 1000만 엔을 지원했다.

이러다 보니 각 계파 수장은 물론이고 현직 총리조차 비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다나카 전 총리는 현직에 있던 1976년 미국 방산업체 록히드로부터 당시로선 천문학적 금액인 5억 엔(약 55억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1983년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같은 해 총선에 출마했고 니가타 지역구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아 의원직을 유지했다.

1988년 리쿠르트그룹이 주식을 공개하기 전에 정관재계 인사들에게 싼값으로 주식을 팔았다. 수뢰죄로 12명이 기소됐고 연루된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전 총리 역시 퇴진했다. 가네마루 신(金丸信) 전 자민당 부총재 또한 1992년 유통기업 사가와규빈으로부터 5억 엔을 받아 기소됐다.

21세기 들어 거액의 현금이 오가는 노골적 뇌물수수 사건은 상당 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힌 비리는 끊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계에서는 아베 총리가 몰락한 시발점을 2017년 초 불거진 오사카 소재 모리토모(森友) 학교법인 비리로 본다.

극우단체 ‘일본회의’ 임원인 가고이케 야스노리(籠池泰典) 당시 이사장이 아베 총리 부부에게 로비를 벌여 헐값에 국유지를 학교 부지로 매입했고, 아베 정권이 조직적으로 이를 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때부터 아베 정권의 지지율 하락이 본격화했고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도쿄 올림픽 연기 등까지 겹치자 버틸 수 없었다는 의미다.

아베 총리는 왜 일개 학교 이사장에게 이렇듯 쩔쩔매야 했을까. 바로 일본회의가 그가 정치 인생의 궁극적 목표로 삼은 ‘평화헌법 개정’, 즉 전쟁 가능한 일본으로의 개헌을 뒷받침한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연립여당 공명당은 물론이고 자민당 내 다른 파벌들도 개헌에 소극적이자 외곽 조직에 지나치게 의존했고, 그것이 본인의 몰락을 자초했다는 분석이다.

○ 스가 옹립 과정에서 파벌정치 득세


아베 퇴진 후 스가 장관이 새 총재로 내정되는 과정에서도 파벌정치의 폐해가 드러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스가 장관은 아베 총리가 퇴진 의사를 밝히기 전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5위 안에 든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총리로 사실상 내정된 후인 2, 3일 치러진 아사히신문의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38%)로 올라섰다. 파벌정치가 대세론을 견인하고 있는 것이다.

스가 장관의 총리행은 당내 실력자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간사장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결과라는 평도 나온다. 의원 47명을 거느린 니카이 간사장은 지난달 30일 가장 먼저 ‘스가 지지’를 선언했다. 이후 이달 1일까지 사흘간 당내 7개 파벌 중 5개 파벌이 동참했다. 하지만 세계 3위 경제대국을 이끌 새 지도자를 파벌 간 이합집산으로 뽑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각 파벌이 새 내각 구성을 두고 벌써부터 논공행상식 자리싸움을 시작했다는 관측도 있다. 정치 평론가 스즈키 데쓰오(鈴木哲夫) 씨는 마이니치신문에 “파벌정치가 과거보다 왜곡된 형태로 부활했다. 최악”이라고 비판했다.

일각에서는 아베 총리가 ‘어둠의 쇼군’으로 불렸던 다나카 전 총리처럼 상왕 노릇을 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록히드 비리로 물러난 후에도 계파 의원을 잇달아 총리로 만들며 막후에서 엄청난 권력을 휘두른 다나카 전 총리처럼 아베 총리가 자신의 심복이었던 스가 장관을 통해 각종 정책을 좌지우지할 것이라는 의미다. 양 교수는 “자민당의 장기 집권, 아베 총리의 장기 집권이 동시에 겹치면서 일본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 조유라 기자
#일본 총리#스가 요시히데#자민당 총재 선거#파벌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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