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 큰 흠결 없으면 집 안빼고, 나갈땐 ‘원상회복 의무’ 엄격히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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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차법 논란/확 바뀌는 전월세살이]<中> 깐깐해지는 임대차 문화

서울 강동구 암사동 전용면적 84m²짜리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는 김모 씨(64)는 올해 10월 계약 만료를 앞두고 계약갱신요구권을 행사하려다 포기했다. 개인 사정상 내년 2월까지 더 살 계획이었는데 집주인이 “10월까지 비워주지 않으면 집 상태를 원래대로 돌리는 데 들어가는 각종 비용을 모두 따져 전세보증금에서 차감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는 “소송 걸면 승소는 하겠지만 신경 쓸 게 너무 많지 않냐”며 “단기 임대를 알아보는 중”이라고 씁쓸해했다.

전월세상한제와 계약갱신요구권 등을 규정한 임대차 2법이 전격 시행되면서 집주인과 세입자 간 분쟁이 잦아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일찍이 임대시장 규제를 도입한 미국, 유럽, 일본 등에선 이런 혼란을 줄이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 공급 적은 도심에선 전입 조건 까다로워질 우려

임대차 2법으로 세입자들은 그동안 집주인과 ‘협의’해 결정하던 재계약 여부와 임차료를 법으로 보장받게 됐다. 그러나 급작스러운 법 시행으로 집주인과 세입자 모두 그동안 거래 관행을 따르기보다는 ‘법대로 하자’며 날을 세우고 있다.

해외 사례에 비춰 보면 집주인들은 세입자를 들일 때 검증을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임대료를 규제하는 미국 일부 주에서 세입자는 집주인에게 ‘임차 지원서(rental application)’를 제출해야 한다. 법적 의무는 아니지만 집주인이 요구하면 은행 잔액 등을 증빙해야 한다. 또 흡연이나 범죄 사실이 알려지면 퇴거하겠다는 내용 등을 계약서에 담기도 한다. 미리 약속한 조건과 다르게 생활하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계약서가 책 한 권 분량만큼 두꺼워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국에서도 임대차 계약 시 반려동물 관련 규약을 강화하거나 흡연이나 못질 금지처럼 세입자에게 불리한 조건을 특약으로 내거는 경우가 늘 것으로 보인다.

임대료 인상에 제동이 걸린 집주인은 비용 최소화를 위해 각종 수리비 등을 세입자한테 전가할 수도 있다. 세입자가 이사 나갈 때 원래 상태로 돌려놓아야 하는 ‘원상회복’ 의무를 엄격하게 적용해 일상적인 흠집, 파손까지 수리비를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일본이 그렇다. 집주인은 정당한 사유 없이 세입자를 내보낼 수 없다. 그 대신 입주 시 통상 2개월 치 월세를 보증금으로 내는데 이사 가기 전 집주인이 집 상태를 확인하고 복구비, 청소비를 뺀 뒤 돌려준다. 통상 바닥만 긁혀도 약 5만 엔(약 57만 원)을 청구한다.

일각에선 임대료 인상에 제약이 생긴 집주인들이 집의 보존상태 관리를 소홀히 해 주거 품질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임대 수요가 공급보다 많은 도심일수록 이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날 공산이 크다. 1974년부터 임대료를 규제한 미국 뉴욕주에서는 도심 ‘슬럼화’가 심해졌다. 뉴욕 맨해튼 북부의 할렘 지역이 대표적이다.

○ 세입자 주거 안정은 장점

반면 세입자는 높은 거래 ‘문턱’만 넘으면 주거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다. 프랑스 파리 시민 에밀리(가명) 씨는 최근 자신의 집에 사는 세입자를 계약 만료 기간 전에 내보내는 조건으로 보증금과 별도로 6개월 치 월세를 현금으로 줬다. 프랑스에서 집주인은 계약 만료 6개월 전까지 집을 비워달라는 통보를 해야 한다. 아들의 결혼으로 신혼집이 필요해 계약 만료를 한 달 앞두고 세입자에게 “집을 빼 달라”고 부탁하자 세입자가 현금 보상을 요구했다. 한국보다 세입자를 강하게 보호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집주인은 최소 3년은 거주를 보장해야 하고, 큰 흠결이 없으면 함부로 나가라고 하지 못한다.

임대차 규제가 있는 미국의 일부 주에선 정당한 사유로 세입자를 내보내려고 할 때에도 집주인은 담당 행정기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임의로 세입자를 내쫓아 생기는 갈등을 사전에 막기 위한 취지다. 일본에선 ‘관리회사’가 이런 역할을 대신한다. 관리회사는 세입자 모집, 관리, 퇴거 절차를 맡는데, 파손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판단하고 조율한다. 애초에 집주인과 세입자가 ‘누가 수리해야 하느냐’를 놓고 다툼을 벌일 일이 없는 셈이다. 상당수 집주인은 월세 수입의 5∼10%를 관리회사에 낸다.

○ 집주인-세입자 분쟁 막을 실효적 방안 절실

반면 한국에서는 현재 전월세 분쟁 해결이 쉽지 않다. 지난해 말 세 들어 사는 집의 보일러 고장으로 집주인과 수리비 관련 갈등을 겪었던 이모 씨(38)는 “조정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했지만, 집주인이 조정할 의사가 없다고 통지해 신청이 각하됐다”며 “민사소송밖에 답이 없다고 해서 결국 내 돈을 주고 수리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개정된 주택임대차보호법에서 기존 대한법률구조공단 산하에 마련된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의 기능을 2∼3개월 후부터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한국감정원에 나누기로 했지만,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세입자가 집주인과의 임대차 갈등으로 조정위원회에 도움을 요청해도 집주인의 동의가 없으면 조정 접수 자체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제도 정착이 될 때까지 사회적 비용을 낮추기 위해 분쟁 조정의 실효성을 높일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현성 법무법인 자연수 변호사는 “앞으로 급증할 수밖에 없는 임대차 관련 분쟁들을 별다른 권한이 없는 조정위원회에서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정순구 기자 soon9@donga.com / 도쿄=박형준 / 뉴욕=유재동 특파원
#임대차법#논란#임대차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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