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노했고, 강한 불쾌감 표현했지만
‘재판’이 역린이라는 사실, 만방에 알린 셈
사적 이해관계 따라 국정 운영해도 되나
대통령 감정 맞춰 춤추다 시스템 망칠 판
이재명 대통령이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6.02.10. 청와대통신사진기자단
이재명 정부에서 ‘격노’는 금기어에 가깝다.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11일 더불어민주당의 2차 특검 후보 추천과 관련해 “이 대통령이 격노한 적은 없다”고 굳이 밝혔다. 대통령의 격노가 국가적 비극을 불러올 수 있음을 12·3 친위 쿠데타로 파면당한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온몸으로 알렸기 때문일 터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가 마구 밀어붙이던 조국혁신당과의 합당은 일단 멈췄다. 전격 합당 제안 19일 만인 10일 그가 사실상 백기를 들기 전, 청와대에서 이 대통령 심기 관련 두 개의 설명이 나온 건 의미심장하다.
하나는 “정 대표가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합당을 전격 추진)하는 것처럼 발언한 데 대해 대통령이 노(怒)했다”고 청와대 관계자가 전한 것이다. ‘노했다’는 말은 ‘No했다’ 말고는 요즘 거의 안 쓴다. 격노라는 단어를 애써 피한 충정이 역력하다.
또 하나는 특검 후보 전준철 변호사에 대해 이 대통령이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는 내용이다. 그는 대북 불법송금 재판에서 이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증언한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을 변호한 적 있다. 이에 친명은 “반역” “역린”이라며 펄펄 뛰었고 정청래는 “대통령께 누를 끼쳐 죄송하다”며 납작 엎드렸다.
강훈식 말대로 이 대통령이 격노를 잘하는 스타일은 아니다(질타는 종종 한다). 역대 대통령 기사를 검색해 봐도 윤석열을 빼곤 격노 잘하는 대통령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 격노했는지를 보면 그 대통령에게 무엇이 중한지 알 수 있다.
문재인은 퇴임 대담에서 “저는 격노 잘 안 하고요”라고 밝혔던 대통령이었다. 그가 취임 20일 만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발사대 4대의 국내 비공개 반입 사실을 보고받고 “매우 충격적”이라며 진상조사를 지시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격노를 최대한 절제해 브리핑한 거다. 문재인에게는 대북·대중 관계가 우리 안보보다 중했던 모양이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 노태우가 지지부진한 5공 청산에, 노무현이 북한의 전격 핵 보유 선언에 격노한 것은 능히 이해된다. 김영삼이 측근과 아들 비리 때문에, 김대중이 외환위기 와중에 미적대는 대기업 ‘빅딜’ 때문에 격노한 것도 당연했다. 이승만은 소련의 휴전 제안에, 박정희는 북한의 판문점 도끼 만행에 격노했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제였고 시국 현안이어서 대통령은 격노만 할 게 아니라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빗발쳤다.
이에 비하면 이 대통령이 노했고 또 불쾌했다는 이번 사안은 삿되어 보인다. 이 대통령이 합당을 원치 않았다면, 목적은 달성됐다. 그러나 대통령의 감정과 시간은 일종의 공공재다. 국가적으로 중요하지도 않고 시국 현안이랄 수도 없다. 당무 개입 의도가 없다면 괜히 왜 대통령의 사적 감정을 밝혔는지 의문이다.
특히 특검 후보에 대한 강한 불쾌감 표현은 이제라도 취소했으면 한다. 이 대통령에게 가장 중한 것은 자신의 재판 문제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고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 이혜훈 때는 인사 검증도 못 한 청와대였다. 전준철 문제는 청와대에서 득달같이 잡아냈다니 대통령 재판만 신경 쓰는 것 같다. 특검이 매우 정치적이라는 이 정부의 진실이 드러난 점도 심각하다. 특검의 최고 덕목은 정치 중립인데도 집권당이 대통령 마음에 안 드는 후보를 추천했다고 잘못을 비는 모습도 구차했다. 당신들을 뽑아준 국민은 안중에 없다는 건가.
더 큰 문제는 이 대통령이 문서 아닌 감정 표현으로 국정을 운영함으로써 법과 제도, 시스템이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사적 이해관계에 따른 감정을 드러내고, 충직한 친명 금배지들이 쌍지팡이를 짚고 나서면서 벌써 2차 특검의 엄정함은 기대할 수 없게 됐다. 공직자 인사 기준 역시 ‘이 대통령 재판’이 될 판이다. 공직사회에서도 대통령의 감정과 질타 수위에 맞춰 무리한 일들이 뒤따른다면 나라와 국민에게는 재앙이다.
천년의 이치를 담은 제왕학으로 꼽히는 ‘자치통감’은 당나라 덕종 때 재상 양염의 고사를 들어 공권력 행사와 사사로운 복수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개인의 은원(恩怨) 관계를 공무에 옮겨 와선 안 된다는 것은 우리의 불행한 대통령사(史)도 말해주는 바다.
이 대통령은 재판에 신경을 곤두세울지 몰라도 다수 국민은 그렇지 않다. 70명 넘는 친명 의원들이 ‘이재명 대통령 사건 공소 취소와 국정조사 추진을 위한 의원모임’이나 하는 건 혈세 낭비다. 이 대통령이 개딸 아닌 국민도 바라보며 국정을 운영한다면, 불행한 전직 대통령은 또 나올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 대통령부터 친명-반명 구분을 없애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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