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동

유재동 부장

동아일보 산업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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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현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모두 전해드립니다.

jarrett@donga.com

취재분야

2025-02-21~2025-03-23
칼럼74%
금융20%
경제일반3%
사설/칼럼3%
  • [오늘과 내일/유재동]明식당엔 기적의 레시피가 있다

    그동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관한 칼럼을 여러 건 썼다. 가장 유력한 대권 주자의 기업관(觀)은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문제라서, 마치 직업병처럼 그의 발언에 일일이 귀 기울인 결과다. 그동안 관찰해 온 이 대표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이리저리 애를 쓰는 배트맨이나 카멜레온 같았다. 평소엔 “그럼 그렇지” 하다가도 어느 날은 “진짜 달라졌나” 하는 호기심을 주면서 사람들을 계속 헷갈리게 한다. 이 대표의 그런 변화무쌍한 모습 자체에 그의 본질이 담겨 있다고 본다.통제와 개입으로 혁신기업 만든다는 발상 계엄과 탄핵 때문에 요즘 갑자기 헌법 공부하는 사람이 많아지듯, 필자는 이 대표 덕분에 시장경제의 기본 원리를 새삼 다시 곱씹어 보고 있다. 그가 던진 말에는 전통 주류 경제·경영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렵고 생소한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상법 개정이나 반도체법에 대한 고집은 강성 지지층에 등 돌리지 못하는 그의 처지를 반영한 것이라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얼마 전 ‘K엔비디아 발언’은 이 대표가 기업을 평소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지 너무 날것 그대로를 보여준 느낌이라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위장과 표변의 대명사인 그가 자신도 모르게 허연 맨살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 대표는 엔비디아 같은 기업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답은 제시하지 않았다. 단지 그런 기업이 생기면 그 과실을 국민과 나누겠다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한마디만으로도 이 대표가 구상하는 ‘혁신기업의 레시피’를 대략 가늠해 볼 수 있다. 국민이 공동으로 투자해 대표기업을 육성하고 그로 인해 발생할 이익을 나눈다는 발상에는 기업가 정신의 모태인 자율 경영과 성과 보상의 원칙이 살아 숨 쉴 공간이 없다. 그보다는 통제와 개입, 이익 환수처럼 혁신의 씨앗을 말려 죽이는 독소만이 담겨 있을 뿐이다. 엔비디아 같은 기업은 기업가의 창의와 야수 같은 열정, 우수한 인재, 활발한 벤처 생태계 등 모든 조건이 한데 어우러져야 겨우 하나 생길까 말까 한다. 이 대표가 들고 있는 재료로 혁신기업을 빚어내겠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기적의 요리법’에 가깝다. 이 대표는 요즘 대기업 총수나 금융계, 경제 단체, 글로벌 석학 등으로 만남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 또 기회 될 때마다 “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된다” “민주당은 원래 경제 중심 정당” 같은 말을 쏟아내고, 이는 ‘친기업 행보’ ‘중도층 잡기’라는 제목이 달려 언론에 소개된다. 그러나 이 대표 본인이 바라는 ‘우클릭’은 딱 거기까지다. 실제로는 반도체 연구개발직만이라도 ‘주 52시간 근무 예외’를 적용해 글로벌 경쟁의 족쇄를 풀어주는 데 반대하고, 모든 기업들이 우려하는 상법 개정을 강행해 기업가의 선제적 투자를 가로막고 있다. 애초에 기득권과 이익단체 눈치를 보며 미래 산업을 짓밟는 규제를 잔뜩 양산한 것도 전 정부의 여당인 민주당이었다.코리아 디스카운트 되레 악화시킬 우려 이 대표는 좌우를 오가는 오락가락 발언 와중에 종종 호언장담도 서슴지 않는다. 그는 최근 “민주당이 집권하면 아무것도 안 해도 코스피가 3,000은 넘을 것”이라고 했다. 이 대표의 바람대로 엔비디아 같은 기업이 도깨비 방망이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져 국민들이 투자 수익도 챙기고 세금에서 해방되는 만화 같은 세상이 오면 코스피는 3,000이 아니라 그 이상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여준 그의 본모습이 집권 후 현실이 된다면 우리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심각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경험해야 할지 모른다. 야당 대표가 이런저런 정책 이슈를 선제적으로 제시하고 공론화시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그 방향을 손질하고 또 일관성도 조금 갖췄으면 한다. 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 2025-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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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관세폭탄이나 딥시크보다 더 두려운 것

    최고 권력자가 등장하는 행사는 그 나라의 지향점을 말해 준다. 그 집단이 중국 같은 권위주의 체제 국가라면 더욱 그렇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며칠 전 소집한 좌담회에는 딥시크 창업자 량원펑과 알리바바의 마윈, 화웨이의 런정페이, 비야디 회장 왕촨푸 등이 모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죄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 첨단 정보기술(IT) 기업 총수라는 점. 값싸고도 품질 좋은 상품과 서비스로 서방의 공포심을 자극하면서, 미국과 기술패권 경쟁의 선봉에 선 인물들이었다. 갈수록 독해지는 미국의 대중 압박과 고립 작전을 견뎌내고 14억 인구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읽혔다.최강대국도 미래 생존 위해 분투하는데 국가 차원의 ‘생존 본능’이 감지되는 모멘트는 최근 미국서도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전쟁 참화에 시달리는 우크라이나를 쥐어짜서 안보 보장을 대가로 희토류의 50%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중국이 전 세계 희토류 공급망을 독차지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방국의 약점을 들춰내 자원 확보를 노리는 약탈적인 행보에 나선 것이다. 트럼프는 환경 보존이라는 인류 공통의 희망을 배신하고 자국 에너지 공급 안정화를 위해 화석연료 개발도 맹추진 중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흠결 많은 권력자란 건 누구나 안다. 자국이나 정권의 이익을 위해 국제사회 규범을 수시로 무시하고, 지도자의 품격을 지키기는커녕 이웃 나라를 상대로 조폭 같은 협박이나 인권유린을 일삼는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이들이 현존하는 위협에 맞서 국가 미래를 먼저 생각하는 마인드를 갖췄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지난달 취임식 때 일론 머스크와 제프 베이조스, 마크 저커버그 같은 첨단 산업의 거물들을 연단 제일 앞자리에 세웠다. 건국 100주년인 2049년 미국을 능가하는 경제대국이 돼보겠다는 중국에 “감히 꿈도 꾸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시진핑은 이에 맞서 수만 명의 디지털 전사를 집중 양성해 중국 중심의 AI 생태계를 완성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자국 이익을 최우선으로 수호하겠다는 두 권력자의 다짐은 이제 글로벌 사회가 과거처럼 상호 공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홀로 각자도생해야 살아남는 시대라는 점을 간파한 결과다.우리는 무기력증 언제 벗어던질 건가 이처럼 세계 최강대국들조차 자기 먹고사는 문제를 챙기기 바쁜 와중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볼 수밖에 없다. 성장률은 경제 규모가 몇 배는 더 큰 미국에 추월당한 지 오래고, 정치권이 혁신기업의 싹을 말려 죽이는 동안 투자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한국을 탈출하고 있다. 복지부동에 빠져 맹탕 정책만 양산하는 탄핵 정부 공무원들, 기업가정신을 잃고 현상 유지에 급급한 창업 3∼4세대 대기업들….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트럼프의 관세폭탄이나 딥시크의 공습이 아니라 이런 무기력함을 어느샌가 정상으로 여기고 위기 극복의 의욕마저 꺾여버린 모습이 아닌가 싶다. 트럼프와 시진핑의 지독한 생존 의지는 안타깝게도 요즘 많은 한국인들이 부러워하는 지도자의 면모이기도 하다. 미국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은 전기 충격에도 속수무책인 경험을 반복한 개들은 나중에 피할 방법이 생겨도 탈출 의지를 상실한다는 실험 결과를 통해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동안 ‘넛크래커에 끼인 호두’,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한국 경제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표현이 많았는데, 여기에 ‘셀리그먼의 강아지’가 추가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이다. 모두가 살기 위해 앞만 보고 내달리는 전쟁터에서 우리는 언제까지 계속 이렇게 엉거주춤 헤매고만 있을 건가. 답은 이미 나와 있는데 절박함이 아직도 모자란 건지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 2025-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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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실용 표방’ 李, 노동개혁 화두도 던져보라

    얼마 전 만난 한 장관급 인사가 “요즘 젊은이들은 편한 것만 하려고 든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처음부터 좋은 직장만 찾으려 하니 나라 미래가 걱정”이라고 말했을 때, 이는 공직자로서 매우 위험한 인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적인 자리의 푸념이라 넘기기엔, 관료들의 이런 사고가 정부의 국정 철학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혹여나 이번 명절 때 취업준비생 조카에게 비슷한 훈수를 뒀다면 괜한 꼰대 짓을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봐야 한다. 우리 사회가 청년들로 하여금 성에 안 차는 직장이라도 빨리 잡느니 차라리 장기 취준생으로 남도록 부추기고 있어서다.경직된 고용 시장이 경제 생산성 저해 평균 연봉이 9000만 원에 이르는 현대제철 노조가 최근 총파업을 예고했다. 이 회사는 중국의 저가 공세로 영업익이 60% 급감하며 실적 한파를 겪고 있지만 노조는 아랑곳하지 않고 역대 최대 성과급을 요구하고 있다. 연봉 1억2000만 원 선인 KB국민은행은 노조가 성과급을 300% 올려 달라며 파업 목전까지 갔다가 250% 인상으로 겨우 봉합했다. 대기업과 금융사 노조의 이런 모습은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된다. 강력한 투쟁력과 파업권을 무기로 실적 악화나 이자 장사 논란에도 매년 엄청난 임금 인상을 관철시켜 왔다. 그 결과 국내 대기업의 대졸 초임은 우리보다 경제 규모가 몇 배가 큰 일본보다도 60%나 높은 수준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노동 계급은 철옹성과 같다. 전체 근로자의 10%에 불과한 이들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구직자들이 온 힘을 다하지만 쉽게 넘볼 수 없다. 작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직장을 옮긴 전체 중소기업 근로자의 12%만이 대기업에 입성했다. 평균 연봉이 1억 원에 육박하는 현대차 생산직은 재작년 10년 만에 공채에 나섰는데 수만 명의 지원자가 폭주해 서버가 다운됐다. 대기업 취업 문이 바늘구멍인 이유는 일단 한 번 뽑고 나면 해고가 어렵고 갈수록 연봉이 자동적으로 올라가는 고비용 구조라 기업들이 채용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대-중소기업 격차와 노동 시장의 이중구조가 이처럼 견고한 상황에서 청년들이 별 볼 일 없는 직장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느니, 장기 백수로 남더라도 대기업의 문을 계속 두드려 보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다. 정규직 과보호와 낡은 호봉제를 깨는 노동 개혁은 우리 경제의 여러 고질적인 문제를 동시에 개선시키는 ‘만능 키’다. 우선 인건비 부담이 줄어들며 기업들이 청년 채용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갈수록 잠재성장률이 떨어지는 한국은 그간 질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쉬고 있던 인력을 활용해 경제 역동성을 높일 수 있다. 비정규직→정규직, 중소기업→대기업의 ‘일자리 사다리’를 복원하면 중소기업 구인난을 완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소수에게만 허락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과도한 입시 경쟁이나 저출산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된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과보호를 풀면 우리 경제 생산성이 5% 증가할 것이라고 추정했다.진정성 있다면 국가 위한 결단 내려야 요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실용과 성장, 안보 같은 키워드를 내세워 중도층 표심 잡기에 나서고 있다. 희대의 정권 자멸에도 자기 지지율이 박스권에 갇히자 어떻게든 외연을 확장해 조만간 벌어질 수 있는 조기 대선에서 대세론을 굳히려는 포석이다. 하지만 이 대표 특유의 캐릭터 탓에 아직은 그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쯤에서 자신의 주된 지지 세력인 귀족 노조와 결별하고 국민 전체를 위한 개혁에 나서자는 파격을 보여주면 어떨까. 보여주기식 말보다는 구체적인 행동, 사사로운 이득보다 국가 전체를 위한 결단을 보여주는 정치에 우리는 목말라 있다. 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 202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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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미국 국뽕 티셔츠의 성공이 의미하는 것

    요즘 미국 소매업체 월마트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티셔츠가 있다. 작년 독립기념일(7월 4일)에 출시된 이 옷은 가슴팍에 ‘AMERICAN MADE’(미국산)라는 글자가 박혀 있고 아랫단엔 작은 성조기 문양이 들어가 있다. 얼핏 보면 애국심에 호소하는 여느 ‘국뽕’ 상품과 다를 게 없는데 특이한 점이 두 가지 있다. 우선 가격이 12.98달러(약 1만9000원)로 매우 착하다. 또 방적 염색 봉제 등 모든 생산 과정이 실제 본토에서 이뤄졌다. 면화의 원산지도 물론 미국이다.자국 공급망 재건으로 제조업 부흥 시도 티셔츠는 ‘아메리칸 자이언트’라는 업체의 제품이다. 베이어드 윈스럽 대표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떠올리며 이 회사를 창업(2011년)했다고 한다. 그가 유년기를 보낸 1970년대만 해도 미국의 의류 산업은 제법 경쟁력이 높았고 거리엔 품질 좋은 국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흔했다. 하지만 이후 세계화가 진행되고 인건비가 싼 중국 등 해외로 생산기지가 옮겨가며 순식간에 수입 의류가 미국 시장을 점령했다. 윈스럽은 타임머신을 되돌려 아직도 미국이 질 좋고 저렴한 옷을 생산할 수 있다는 걸 입증하고자 했다. 이 회사는 미국 남부 농장들과 파트너십을 맺어 원재료를 저렴한 가격에 조달하고 공장 자동화로 생산 비용도 줄였다. 결정적으로 월마트와 대규모 공급 계약으로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한 게 13달러 티셔츠가 가능할 수 있었던 비결이 됐다. 물론 이런 제품의 성공 사례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여전히 미국에서 팔리는 옷의 95% 이상은 해외에서 생산된 수입품이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아메리칸 자이언트의 ‘작은 실험’에 미국은 적지 않게 고무돼 있다.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순전히 자국 내 공급망으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줬고, 그로 인해 산업 기반을 지키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표본까지 제시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공약대로 수입품 관세를 대거 인상할 경우 ‘메이드 인 아메리카’의 경쟁력은 더욱 배가될 수 있다. 기업들은 굳이 애국심에 호소하지 않고도 외국산 못지않은 가성비의 제품을 소비자에게 내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국 내에서 모든 생산 과정을 진행하려는 기업들의 행보는 차기 행정부의 정책 기조와도 100% 부합한다. 관세뿐 아니라 앞으로 또 어떤 인센티브가 제2의 아메리칸 자이언트를 탄생시킬지 모를 일이다.미중發 통상 악재, 한국엔 산업 전체 위기 제조업 부흥에 대한 미국의 기대감은 역으로 한국에는 상당한 도전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미국이 드높은 관세 장벽에 더해 이전보다 더 촘촘한 공급망으로 철벽을 치면 우리 기업이 거대한 북미 시장을 비집고 들어갈 틈은 갈수록 좁아지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은 최대 시장인 중국 수출의 둔화로 고전하고 있지만, 지난해 미국을 상대로는 사상 최대 흑자를 내며 무역 전선에서 선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급변하고 있다. 트럼프는 보호무역과 리쇼어링(해외 진출 기업의 본국 회귀) 정책만으로도 모자라서, 자국 내 생산이 어려운 핵심 산업은 한국 같은 동맹국을 쥐어짜서 미국 땅에 공장을 지으라고 압박할 태세다.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는 우리로서는 이런 요구를 대놓고 무시할 수 없는 처지다. 그는 취임도 하기 전에 이웃나라에 영토를 내놓으라는 협박마저 불사하는 인물이다. 우리 기업은 이런 미국발 악재에 더해 중국의 저가 상품 밀어내기로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고 있다. 중국산의 쓰나미에 내수 시장이 잠식되고 미국 등 해외 시장의 판로마저 막힌다면 단순한 통상 위기를 넘어 자칫 산업 기반의 붕괴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까지 올 수도 있다. 이처럼 대외 환경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데 이를 버텨내야 하는 나라 꼴은 여전히 엉망진창이다. 기업들로서는 그 어느 해보다 불안한 한 해의 시작이다.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 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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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가 만난 사람]“트럼프 제재, 中 기술자립 의지 높일 것… 글로벌 반도체 경쟁 더 격화”

    《“트럼프의 강한 압박이 단기적으로는 중국의 발전을 지연시키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중국의 자립화 의지와 기술 개발 투자를 더 높일 것입니다. 결국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경쟁환경은 더욱 치열해지겠죠.”1일 취임한 윤의준 한국공학한림원 회장(65)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대중 제재가 이어지는 동안 한국 반도체 산업은 전열을 정비해야 한다”며 “우리가 국가적 차원에서 반도체 산업에 지원을 안 하면 자칫 산업공동화 현상이 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윤 회장은 화합물 반도체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화합물 반도체는 두 가지 이상 원소로 만들어진 반도체로 기존 실리콘 반도체보다 전력 효율과 특성이 좋아 요즘 첨단 분야에서 수요가 늘고 있다. 그는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주목받는 마이크로-발광다이오드(LED) 분야의 원천 특허도 다수 갖고 있다.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전자재료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대 교수, 연구처장 및 산학협력단장, 한국에너지공대 초대 총장 등을 지냈다.1995년 설립된 한국공학한림원은 공학 분야에서 기술 발전에 공을 세운 공학기술인들이 모인 단체다. 공학 분야 석학 및 관련 기업 최고경영자(CEO) 등 661명(정회원은 288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공학기술 분야에서 정부에 정책 제언을 하는 ‘싱크탱크’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다음은 윤 회장과의 일문일답.》―중국과 일본 등에 비해 한국의 산업 경쟁력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나. “첨단산업 분야에서 한국의 수출경쟁력이 중국에 이미 뒤처지고 있다. 2024년 1∼8월 첨단산업의 무역특화지수를 보면 한국은 25.6, 중국은 27.8로 중국이 앞서고 있다. 특히 10년 전인 2014년과 비교했을 때 한국의 지수는 4.3포인트 하락한 반면, 중국은 16포인트 상승했다. 물론 한국이 아직 앞서는 분야도 많다. 조선업에서 한국은 세계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기전자 산업에서는 한국, 일본, 대만이 치열한 경쟁 구도를 보이고 있다. 한국의 산업 경쟁력은 전반적으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중국의 빠른 추격과 일본, 대만의 기술력에 대응해 지속적인 혁신과 구조조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나라 산업 경쟁력이 예전 같지 않은 원인은 무엇인가. “결국 ‘혁신의 부족’이다. 과거엔 정부 주도의 강력한 산업정책으로 많은 성과를 냈지만, 현재는 생산성과 경쟁력이 함께 약화되고 있다. 주력 산업이었던 제조업의 경쟁력 약화, 대-중소기업 간 불균형 심화로 인한 비즈니스 생태계 저하, 혁신의 부재, 그리고 기업가 정신 약화로 인한 인재 부족 등…. 우리나라의 혁신 네트워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신호다.” ―그렇다면 기업가 정신과 혁신이 부족해진 이유는 뭔가. “주요 대기업들을 보면 예전처럼 ‘죽기살기’로 신기술을 개발하는 것 같지가 않다. 세계 최고가 되고자 하는 분위기라든가, 추진력, 결기, 이런 게 없어 보인다. 주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중엔 주 52시간 근무제 같은 규제 문제도 있을 것이다. 한창 연구개발에 매진해야 하는데 근무시간 채웠다고 컴퓨터 끄고 집에 가야 하는 상황이 현실에 안 맞는 것이다. 또 반도체 산업을 예로 들면 과거 한국의 반도체가 세계로 쭉쭉 뻗어 나가는 시대엔 공대에서 제일 잘 하는 학생들이 전자공학과를 가고 최고 인재들이 기업에 모였는데 지금은 학생들이 ‘그쪽에 비전이 있을까’ 하며 주저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정부나 정치권의 반도체 산업 지원은 부족한 게 많다. “아직도 ‘잘나가는 대기업을 왜 세금으로 지원해야 하느냐’, ‘왜 수도권에 지원을 몰아주느냐’는 심리가 이들에게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반도체는 특정 기업이나 산업의 영역으로 보면 안 된다. 인공지능을 비롯해 미래 산업의 가장 기초가 되는 산업인 만큼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은 국가적으로 엄청난 지원을 하고 있는데, 우리만 ‘민간이 알아서 하라’고 하면 승산이 없을 것이다. 자칫 그러다가 국내 산업 공동화가 올 수도 있다. 다 미국으로 빠져나가지 않겠나.”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제재가 한국 반도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트럼프의 강한 압박이 단기적으로는 중국의 발전을 지연시키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중국의 자립화 의지를 더욱 높이게 될 것이다. 미국의 제재가 중국의 기술적 발전을 포기하게 하지는 못할 것 같다. 결국 중국은 미국의 제재를 견디기 위해 자체 반도체 기술 개발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할 것이고 이로 인해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경쟁환경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미국의 대중 제재가 우리에게 반사이익이 될 수도 있지 않나. “물론 대중 제재로 중국의 추격이 단기적으로 주춤할 수 있다. 그 사이에 한국 반도체 산업은 전열을 정비해야 한다. 반도체특별법의 조속한 통과로 반도체 업계에 보조금, 세제 혜택, 인프라 구축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 스스로가 기술적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반도체특별법은 계속 국회에서 공전하고 있다. “반도체특별법은 반도체 산업만을 위한 법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산업의 경쟁력 유지를 위한 법이다. 반도체를 생산하는 대기업은 물론 소재, 부품, 장비와 관련된 수많은 중소중견기업의 성장을 지원하는 법이다. 반도체 없는 한국은 상상하기 어렵다.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은 자동차, 조선, 정보통신 등 타 산업의 경쟁력 확보의 근간이다. 반도체 산업을 지키자는 데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중국의 기술력은 우리를 바짝 추격해 와 있고, 미국 일본 등 선발국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원천기술을 사업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법안이 국회에서 멈춰져 있는 것은 국가적으로 위험한 일이다. 지금 정치권은 산업계의 목소리를 믿어야 할 시기다.” ―우리나라에 ‘제2의 엔비디아’가 안 나오는 이유는 뭔가. “아직 창업 생태계가 안 갖춰져 있다.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할 수 있는 벤처캐피털(VC)이 부족하다. 우리나라 VC는 실리콘밸리 VC에 비해 아직 진짜 ‘모험 자본’이라 할 만한 투자를 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시리즈 A∼C’(투자 유치 단계)까지 기업이 수익을 내지 않아도 다 기다려주며 기업의 성장을 도와준다.” ―저출산으로 학생 수가 줄고 의대 선호 경향까지 있어서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학생들에게 반도체 산업의 국가적 중요성을 홍보하면서 애국심에 호소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본다. 인력 부족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우리의 반도체 산업을 계속 성장시켜야 한다. 성장을 통해 늘어난 기업의 이윤이 근로자에게 돌아가고, 일자리가 늘어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반도체 산업의 직업안정성과 보수가 높아지면 반도체 선호 경향, 이공계 선호 경향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아울러 반도체 관련 스타트업들이 더욱 발전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반도체 인프라를 이용해서 반도체 관련 창업으로 세계 시장을 공략하는 젊고 패기 있는 기업인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특히 인공지능(AI)의 발전은 새로운 기회의 창이 열리는 시점이며 인공지능용 반도체의 수요는 급격히 늘어날 것이다. 지금도 전 세계에는 엔비디아, TSMC 아성에 도전하는 기업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엔비디아의 독점을 깨기 위한 새로운 수많은 도전자 중에 한국 스타트업이 많이 나와야 한다.” ―산업계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대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기존 대학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인터넷에 전 세계 유명 교수의 강의가 다 공개돼 있고, 인공지능에 물어보면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이 됐다. 따라서 앞으로의 우리 교육은 학생들에게 세상에 없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창의적 역량을 길러줘야 한다. 질문을 할 줄 아는 학생,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고 그에 맞는 해법을 남보다 먼저 찾을 수 있는 학생을 길러내야 한다. 이를 위해선 학부생 교육이 단순 지식 전달 위주의 강의에서 프로젝트 기반 학습 방법으로 바뀌어야 한다. 적극적으로 기업, 연구실 인턴십을 하도록 해서 대학에서 배우는 학문이 문제 해결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체득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은 창업 혁신의 거점 역할을 해야 한다. 대학의 우수한 인적·물적 인프라를 활용해 스타트업과 중소벤처 성장 생태계의 중심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한국의 AI 경쟁력은 어떠한가. “어느 정도 경쟁력이 있고 상당한 잠재력도 있다고 본다. AI 등 미래 산업 분야에서 한국의 위치는 전 세계적으로 중상위권에 속해 있다. 영국의 데이터 분석업체 토터스 미디어에 따르면 한국은 글로벌 AI 국가 역량에서 6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거대언어모델(LLM)을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그러나 한국이 AI 분야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AI 산업 발전을 위한 인프라 투자, 인력 양성, 국제협력 등에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 법제도와 규제 개선도 필요하다. 또 인재 유출 문제를 해결하고 해외 인재를 유치하기 위한 전략도 필요하다. 지속적인 투자 확대 또한 필수적이다. 대한민국이 갖고 있는 제조업에 AI를 도입하여 제조업 경쟁력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다.” ―공학한림원의 역할을 어떻게 변화시킬 생각인가. “올해로 한국공학한림원이 창립 30주년을 맞이한다. 일단 회원제도를 업그레이드하려고 한다. 현재는 대기업과 주요 대학의 석학들이 주로 회원으로 돼 있는데 그 문호를 넓히려 한다. 우리나라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유니콘 기업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런 기업과 기업인들이 공학한림원에 참여해 함께 우리나라 발전을 위해서 의견을 나눠야 한다. 이를 위해 보다 젊고 역동적인 유니콘 창업가, 중소중견 기업인, 여성 공학인들을 새로 맞이하려 한다.”윤의준 회장(65)△1983년 서울대 금속공학 학사△1985년 서울대 대학원 금속공학 석사△1990년 MIT 전자재료 박사△1985∼2020년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2011∼2013년 서울대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원장△2013∼2017년 산업통상자원부 R&D전략기획단 주력산업MD△2019∼2021년 서울대 연구처장 겸 산학협력단장△2020∼2023년 한국에너지공대 초대 총장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 2025-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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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尹이 한때 꿈꿨던 정부

    오래전에 이 정부 인수위에 참여했던 고위 공직자에게 들은 얘기다. 대선 직후 새 정부도 ‘문민정부’, ‘참여정부’처럼 별칭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와서 실제 몇 가지 아이디어가 논의됐다고 한다. 그때 윤석열 대통령의 의중이 담겼다며 내부에서 공유되는 것 중에 ‘상식(常識)의 정부’가 있었다. 다소 기이했던 건, 그 앞에 ‘미치지 않은’이라는 수식어도 함께 달려 있었다는 것이다.상식과 합리, 예측가능성의 상실 별칭을 다는 건 어찌됐건 없던 일로 결론이 났다. 너무 즉흥적이고 지나가는 농담 같은 말이어서 별로 진지하게 검토됐을 것 같지도 않다. 다만 분명한 건 인수위 내에서 이런 표현을 생각해낼 사람은 실제 윤 대통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는 후보 시절 “이번 대선은 상식의 윤석열과 비상식의 이재명 간 싸움”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으로 상대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탈원전, 소주성, 조국 사태 등 전 정권의 국정 실패와 몰염치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특유의 거친 언어로 구현하지 않았을까 싶다. 정부가 상식적이고 정상적(미치지 않음)이어야 한다는 건 물론 지극히 옳고 당연한 얘기다. 그럼에도 역대 정부에선 정권이 국민 기대와 달리 상식 밖의 일을 도모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런 일들은 집권세력이 특정 이념에 경도돼 민생 현장을 외면하거나 권력자의 오판을 참모들이 쉽게 견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로 발생했다. 또 이는 필연적으로 정권 지지율 하락과 경제를 스스로 위험에 빠뜨리는 자해 행위로 이어졌다. 상식의 가치를 그렇게도 강조했던 윤 대통령의 최근 헛발질은 ‘미친 정권’의 극적인 사례이자 너무 황당한 자기모순이라 아직까지도 사실로 믿어지지 않는다. 기업인이나 투자자를 만나 보면 이들은 의외로 정부에 그다지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들의 요구 사항은 돈이 저절로 쏟아지는 요술방망이를 안겨 달라거나 역사에 길이 남을 노벨상급 경제 정책을 펴 달라는 게 아니다. 그저 규제·행정 당국으로서 최소한의 상식과 합리를 갖추고, 의사 결정에 필요한 예측 가능성을 보장해 달라는 것뿐이다. 뒤집어 말하면 극단적인 정책 변화나 정치적 혼란에 따른 불확실성, 세계 어디에도 없는 엉뚱한 규제 같은 것은 경제에 가장 치명적인 요인들이다. 만일 윤 대통령의 처음 바람대로 이 정부가 기본 상식에만 입각해 돌아갔어도 우리 경제는 그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럭저럭 버틸 여력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끔찍한 자폭 행위 몇 번에 우리는 이미 최소한의 자격조차 미달한 정부를 갖게 됐다. 어이없는 계엄의 대가는 투자자들이 금융시장을 떠나가고 내수 경기가 나락에 떨어지며 국가 경제가 위험에 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간 공들여 쌓아온 국격과 대외신인도가 한 방에 허물어질 위기다.결국 경제를 극한 위험에 빠뜨려 윤 대통령이 꿈꿨던 이상적인 정부가 실패로 돌아간 가장 근본 원인은 정부의 발목을 잡는 거대 야당도, 지지율을 바닥에 내리꽂은 여사 문제도 아니라고 본다. 그보다는 자기주장만 상식으로 여기고 이에 반대하는 의견들은 비상식으로 매도한 것, 그리고 설득과 인내, 타협이라는 국정 운영의 기본을 망각한 비민주적 태도가 문제의 본질이었다. 여러 증언을 종합해보면 윤 대통령은 대체로 경청보다는 독선, 토론보다는 윽박지름으로 행정부를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합리적인 의견 개진이 불가능한 경직된 관료 조직, 잦은 정책 실패와 이해할 수 없는 인사로 귀결됐다. 45년 만의 계엄이라는 희대의 자책골은 어느 한겨울 밤의 정신 나감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차곡차곡 빌드업된 결과물일 수 있다.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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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식물 정부의 피해는 오롯이 국민의 몫

    공교롭게도 지난 두 번의 정부 부처 출입을 모두 정권 말기에 했다. 2007년과 2012년, 대통령 국정 지지율이 지금처럼 20∼30%를 맴돌았을 때다. 당시 관료들의 사무실에는 회색 철제 캐비닛이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그때 만난 국·과장들은 “내가 가진 정책 아이디어는 모두 저 안에 쌓아 놨다”는 말을 종종 했다. 어차피 정권의 힘이 빠진 지금은 추진해 봐야 빛을 볼 수 없으니, 새 정부가 출범하면 그때 들이밀기 위해 아껴 놓고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당대 최고의 엘리트 관료들이 모인다는 기획재정부는 딱히 이렇다 할 정책을 내놓지 않았고 휴가자가 많은 사무실은 빈자리가 많아 개점휴업을 방불케 했다. 임기 3년 차에 벌써 심각한 복지부동 돌이켜 보면 그때의 경제 상황은 공무원들이 바닥에 배를 깔고 시간만 보내거나 선거판을 기웃거릴 정도로 한가한 시절은 절대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전주곡인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며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에 거대한 외풍이 몰아쳤다. 2012년은 우리 경제의 생산성이 잠재성장률에도 못 미치는 최악의 경기침체 국면에 돌입했던 시기다. 낮은 정권 지지율이나 국회 상황을 핑계로 관료들이 일손을 놓기는커녕 비상등을 켜고 밤낮없이 일해도 부족했을 때였다. 당시 공무원들이 아예 기본적인 일조차 안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임기 말 분위기에 휩쓸려 규제 완화나 경제 구조개혁 같은 주요 현안에 소극적으로 임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공직사회 복지부동의 폐해를 감안하면 고작 3년 차에 접어든 현 정부에서 벌써부터 정권 말 풍경이 관찰되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극심한 여소야대로 인해 “어차피 뭘 해도 안 된다”는 무기력증, 핵심 국정과제를 주도적으로 처리하다가 다음 정부 때 책임 추궁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감이 정권의 이례적인 ‘조기 식물화’를 부추기고 있다. 간부들의 자신감 결여는 조직 전체로 전염되며 능력 있는 MZ 사무관의 공직 이탈로 이어진다. 낮은 급여를 참고 조국에 기여한다는 사명감으로 버티라는 조언은 공무원 사회에서 꼰대 발언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물론 이런 요인들이 관료들에게 일이 손에 안 잡히는 원인은 될 수 있어도 그 자체로 복지부동의 면죄부가 될 순 없다. “국회 권력이 너무 커졌다”, “요즘 젊은 공무원들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은 10, 20년 전에도 나왔던 얘기들이다.정책 주도권 되찾고 실용적 성과 보여줘야 공무원들이 캐비닛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잠수 타는 것의 피해는 오롯이 국민의 몫이다. 공직자의 기강 해이는 각종 비리와 안전사고로 이어져 국민의 소중한 인명·재산 손실을 일으킨다. 글로벌 경쟁에 일분일초가 아쉬운 기업들은 집권 초 약속했던 규제 개혁이 2년 반 넘게 공전하면서 정부에 대한 기대감을 접었다. 레임덕의 가장 현실적인 정의는 미래 권력의 눈치를 살피면서 정작 지금 해야 할 일은 소홀히 하는 것이다. 공무원들 마음이 콩밭에 가 있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다음 정부로 넘기는 현상이 앞으로 2년 이상 더 지속된다고 상상해 보라. 당장 미국에서 일론 머스크를 모셔와 공직 개혁의 칼춤을 추게 해도 모자랄 판이다. 이른 동면에 들어간 관료사회를 깨우려면 정권이 최소한의 지지율을 다시 회복하는 게 필수다. 그런 반전이 자화자찬식 민생토론회와 정책 홍보, 또는 대통령의 분노를 듬뿍 담은 기강 잡기로 과연 가능할까. 그보다는 국민적 합의가 어느 정도 이뤄진 민생 아이템을 발굴해 야권과 조금씩이라도 합의를 해나가는 식으로 실용적인 성과를 계속 쌓아가는 게 이 정부의 유일한 살길이라 본다. 정부가 불리한 정치 구도에서도 정책 주도권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그런 변화를 국민도 충분히 체감하기 전까지는 관료들이 자기 방 캐비닛 문을 자발적으로 여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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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文의 뻥튀기, 尹의 마사지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인 2012년 9월, 기획재정부는 ‘원천징수 합리화’라는 낯선 대책을 내놨다. 간이세액표 개정을 통해 매월 떼어가는 근로소득세액을 줄여 가계 수입을 늘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랏빚을 내지 않고도 경기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처음엔 ‘묘수’라는 호평이 부처 내에서 나왔다. 하지만 이 대책은 곧 조삼모사 논란에 휩싸인다. 세금을 적게 내는 만큼 연말정산 때 적게 돌려받는다는 점에서 결국 납세자의 부담은 같았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없는 살림에 마른 수건 쥐어짜 마련한 정책”이라며 둘러댔지만 사실 여기엔 차마 대놓고 밝히지 못한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 대선을 불과 석 달 앞두고 경기를 어떻게든 끌어올려 보자는 것이었다.보수 정권마다 반복되는 재정 꼼수 이런 꼼수는 다음 정권에서 급기야 큰 사달로 번졌다. 경제민주화를 기치로 화려한 복지 공약을 내세운 박근혜 정부는 그 재원 마련을 위해 집권 첫해부터 세법 개정에 나섰다. 근소세 공제 방식을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전환한 것인데, “고소득자 부담을 늘렸다”는 정부 설명과 달리 중산층과 봉급생활자가 내야 하는 세금이 대거 늘었다. 여론 반발에 직면한 정부는 “세율을 올리지 않았으니 증세가 아니다”,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깃털만 살짝 뽑았다”는 식의 말장난으로 오히려 월급쟁이의 분노만 키웠다. 복지 확대를 위해 증세가 필요하다거나 나랏빚을 더 내야 한다고 국민을 설득하는 정공법 대신, ‘거위 털 뽑듯’ 슬그머니 직장인 유리지갑을 털 궁리만 한 것이다. 정부가 얕은수로 국민의 눈을 속이는 일은 놀랍게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 기재부는 30조 원의 세수 결손을 메우기 위해 외국환평형기금과 주택기금 등 각종 기금을 동원한다고 발표했다. 당초 정부는 올해 예산을 편성하면서 병사 월급과 기초연금 인상, 신공항 건설 같은 선심성 대책을 대거 포함시켰다. 하지만 세수가 원하는 만큼 걷히지 않자 외환시장 안정과 서민 주거복지에 써야 할 비상금을 탈탈 털고, 한국은행에선 150조 원이 넘는 차입금까지 끌어다 쓰는 무리수를 감행했다. 그러고도 “국채 발행을 피했으니 건전재정 기조를 지켜냈다”, “나랏빚 펑펑 내던 전임 정부와는 다르다”고 스스로를 홍보한다.前정부 고용 부풀리기와 다를 게 뭔가 그러나 이런 자평과는 반대로 정부의 ‘재정 마사지’는 현 정부가 그토록 차별화를 시도했던 지난 정부의 데자뷔를 보는 느낌이 든다. 문재인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동원해 공공 일자리를 쏟아낸 결과 고용률이 올라가는 등 이른바 ‘겉모습’은 개선됐지만, 실제로는 저임금 비정규직만 잔뜩 늘어나면서 고용의 질은 추락했다. 돌려막기와 마이너스통장으로 겨우 파산을 면하고는 “나라살림을 튼튼히 지켰다”고 정신승리하는 것과, 예산 축내며 질 낮은 ‘세금 알바’를 양산해 놓고 자칭 ‘일자리 정부’라 치켜세우는 것. 그 둘을 지켜보며 국민들이 느낄 민망함의 차이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 과속 인상과 일자리 증가라는 서로 상충되는 목표를 달성하려다 결국 통계 분식(粉飾)까지 감행했다. 그런 견지에서 보면 우파 정부에서 유독 이런 ‘재정 꼼수’가 되풀이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건전 재정과 감세 기조가 집권 세력에 일종의 도그마(독단적 신념)가 된 상태에서 선심성 지출은 지출대로 하려다 보니 관료들이 이런 막다른 선택에 내몰리고 마는 것이다. 건전 재정이라는 큰 방향은 옳지만 이는 국가 경제를 운용하는 하나의 원칙쯤으로 여겨야지 그 자체가 절대 허물어선 안 되는 성역이 돼선 곤란하다. 누구보다 대통령부터 그 고집을 내려놔야 한다.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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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증시 부양이 밸류업이라는 착각

    “밸류업한다고 증시 오르겠어요? 기업이 돈을 잘 벌어야 뭐라도 되지.”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얼마 전 금융당국 고위 관료가 털어놓은 얘기는 아무리 사석(私席)이었지만 너무 솔직했다. 자사주 매입, 배당 확대 같은 대책들은 곁가지일 뿐이고 결국엔 주가와 비례적 함수 관계에 있는 기업 실적이 받쳐주지 않으면 밸류업이고 뭐고 공염불이라는 그의 주장은 물론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증시 밸류업의 주무부처 관료가 이렇게 대놓고 존재론적 ‘자기 부정’을 하다니…. 증시 문제를 바라보는 대통령, 넓게 말해 여야 정치권과 관료·전문가 그룹 간 인식차가 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세금 깎아주는 등 단기 성과에만 집착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한다며 정부가 증시 밸류업 정책을 추진한 지도 1년이 다 돼 간다. 올해 초 일본을 벤치마킹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발표한 데 이어 최근에는 야심 차게 ‘코리아 밸류업 지수’까지 내놨다.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한국거래소를 두 번이나 찾으며 각별한 관심을 보였고 대주주 주식양도세 완화, 증권거래세 인하 같은 세제 지원책도 줄줄이 나왔다. 하지만 성적표는 아직 초라하다. 올 들어 미국 일본 등 주요국 지수가 20% 안팎 고공행진을 하는 동안 코스피는 상승은커녕 되레 뒷걸음질 쳤다. 자사 주가의 밸류업 계획을 공시한 기업도 상장사 중 1%가 채 안 된다. 기업의 주주 친화적 경영을 유도해 시장 평가를 높이겠다는 밸류업의 큰 방향은 옳다. 기업들이 지금보다는 배당을 늘리고 소액주주의 목소리를 수용하는 한편 오너 일가의 이익만 챙기는 일부 기업들의 행태에 변화를 주는 것도 필요하다. 문제는 밸류업의 본질인 ‘기업가치 제고’보다 ‘증시 부양’이라는 단기 성과에 집착한 나머지 앞뒤를 가리지 않은 대책을 남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게 금융투자소득세다. 금융상품 투자수익에 일정 비율로 과세한다는 이 제도는 여야 합의로 마련돼 내년부터 시행 예정이지만 정부여당이 개인투자자 표심을 우려해 느닷없이 폐지를 추진하고 있다. 금투세를 굳이 없앤다면 적어도 ‘패키지 딜’로 추진돼 왔던 거래세 인하라도 되돌려 재정 누수를 막아야 하는데 거래세는 또 원래대로 낮추겠다고 한다. 평소 건전재정을 중시한다던 정권이 맞나 싶다.기업 환경과 경제 활력 개선이 핵심 정부가 아예 ‘공포 마케팅’을 조장하기도 한다. 주가 하락이 예상되는 주식을 빌려 팔아 수익을 내는 공매도는 모든 선진국에 보편화된 투자 기법이고 시장의 과도한 거품을 빼는 순기능도 있다. 하지만 정부는 ‘공매도는 주가 폭락의 주범→공매도 금지는 밸류업’이라는 일부 투자자 단체의 단선적 주장에 확성기를 대주기 바쁘다. 국제 표준을 한참 벗어난 규제의 결과는 해외 투자자들이 이탈하고 증시의 선진지수 편입이 번번이 좌절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밸류업의 사다리를 스스로 걷어찬 것이다. 대통령과 여권은 어떻게든 시장에 거품을 주입해 지수를 끌어올리는 게 밸류업의 본질이라고 믿는 듯하다. 마치 우리 증시의 실패가 공매도와 금투세 때문이고 이를 없애지 않으면 주가가 당장이라도 폭망할 것처럼 여론을 호도한다. 그러나 진정한 밸류업은 주주 환원 확대,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함께 경제 활력을 높이고 혁신기업이 양산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는, 그 뻔한 진리를 굳이 또 강조해야 하나 싶다. 최근 어느 해외 연기금 관계자가 우리 증시를 놓고 “저평가라는 말도 부끄럽다”고 혹평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저평가’라는 말이 너무 후하다는 점은 동의할 수밖에 없다. 지금 현실을 보면 우리 증시는 저평가된 게 아니라 딱 수준에 맞는 적당한 평가를 받는 것 같다.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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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이지 머니’ 시대는 다시 오지 않는다

    주요국의 금리 피벗이 본격화됐다. 2022년 3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가파른 긴축에 시동을 걸며 각국의 돈줄 조이기가 시작된 지 2년 6개월 만이다. 금리를 내릴 여지조차 없는 일본을 제외하면 긴축 완화 결정은 이제 선진국 중 사실상 한국만 남았다.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의 3고(高) 위기에 시달려 온 우리는 이 시기를 누구보다 기다려 왔다. 중력을 거스르는 힘겨운 오르막 경사가 이제 조금이나마 평탄해질 기미를 보이고 있다.과거와 달리 물가 불안요인 상존금리 인하는 기본적으로 경제 성장에 플러스 요인이다. 시장에서 자금 조달이 쉬워지기 때문에 기업 투자가 늘고 주식 부동산 등 자산가치가 오른다. 또 사업이 잠시 어려워진다 해도 급전을 빌려 버티는 게 용이해진다. 풍부한 유동성의 파도에만 올라타면 ‘마치 무빙워크 위를 걷는 것처럼’(오크트리캐피털 하워드 막스 회장의 표현) 적은 힘을 들이고도 쉽게 돈 벌 기회가 열려 있다. 세계 경제는 저금리 환경에서 생산성이 높아지고 물가도 안정적이었던 골디락스 시대를 경험한 바 있다. 정보기술(IT) 혁명이 미국의 ‘신경제’로 이어진 1990년대, 중국의 고도 성장에 전 세계가 수혜를 입었던 2000년대 초중반이 그랬다.통화정책의 변화에 따라 경기 흐름이 바뀐다는 것은 경제학에서 기본 중 기본이 되는 원리다. 하지만 앞으로는 과거와 같은 제로금리나 양적완화의 사례를 경제원론 교재에 다시 추가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최근 각국이 ‘이지 머니’(easy money·손쉽게 돈을 빌려 투자하는 것)의 폐해를 너무나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연준은 금리를 너무 오랫동안 낮게 유지했다가 정권이 흔들릴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더 멀게는 2008년 금융위기 역시 장기간 이어진 초저금리가 집값 거품의 모래성을 쌓아 올린 게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물가도 과거와 달리 불안 요소가 상존한다.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든 미중 갈등은 더욱 커질 조짐이다. 이는 전 세계를 하나로 이어왔던 공급망이 더 잘게 분절되고 값싼 중국산은 글로벌 시장에서 배제된다는 것을 뜻한다. 저가 상품과 인력의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고비용 구조가 세계 경제에 상수(常數)로 고착화됐다. 여기에 기후변화에 따른 식량 가격 폭등, 지정·지경학적 긴장에 의한 에너지 위기도 자주 반복되고 있다.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물가 불안 요인들을 열거하면서 고물가에 경기침체가 겹치는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이런 우려들을 감안하면 각국의 긴축 완화에는 상당한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연준은 2022년 초부터 제로 수준의 금리를 5%포인트 넘게 올리는 데 불과 1년 반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반대의 과정은 훨씬 천천히 이뤄질 공산이 크다. 어쩌면 제로금리는커녕 연 2∼3% 이하의 상대적 저금리 시대도 앞으로 수년간 찾아오지 않을 수 있다.각국 금리 낮추는 데 한계 분명특히 한국은 가계부채라는 혹을 달고 있어 고민이 더 크다. 미국과 유럽을 따라 금리를 함부로 내렸다간 자칫 ‘경제 시한폭탄’이 폭발해 버릴 수 있다. 바닥을 뚫고 지하실로 내려간 경기를 생각하면 한국은행은 금리를 내려도 이미 한참 전에 내렸어야 하지만 가계빚과 집값 우려가 발목을 단단히 잡으면서 통화정책이 길을 잃은 모양새다. 금리를 빠르게 내리기 어렵다는 것은 서민들의 이자 부담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것, 그리고 내수 경기 회복이 한동안 쉽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다.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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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먹사니즘의 본질은 막쓰니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평소 자신이 포퓰리스트라는 비난에 전혀 굴하지 않는다. 그냥 쿨하게 인정하고 때로는 이를 역이용하기도 한다. 그는 언론 등에 “포퓰리즘으로 비난받은 정책을 내가 많이 성공시켰다. 앞으로도 포퓰리즘을 하겠다”고 했다. 포퓰리즘을 대놓고 하겠다는 자에게 포퓰리스트라는 비판은 아무런 타격감이 없다. 임기응변과 권모술수의 달인다운 면모다. 포퓰리즘이란 말이 본인도 듣기는 거북했는지 이 대표는 이번엔 먹사니즘이란 대안을 들고나왔다.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 즉 민생을 최우선에 두겠다는데 그 대의(大義)에 누가 반기를 들까 싶다. 문제는 그 아름다운 단어를 한 꺼풀 벗겨냈을 때 드러나는 진짜 속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를 위험에 빠뜨렸던 포퓰리즘 정책들은 죄다 ‘민생’, ‘실용’ 같은 그럴듯한 말들로 포장돼 있었다. 이재명의 새 정치 구호도 그리 다를 게 없어 보인다.철학도 원칙도 없는 ‘나랏돈 퍼주기’ 이 대표가 외치는 민생회복지원금은 먹사니즘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례다. 그의 주장대로 전 국민에게 25만 원씩 나눠주기 위해선 생때같은 나랏돈 13조 원이 필요하다. 국민 개개인이 받는 돈은 그야말로 ‘용돈’ 수준이지만 이를 위해 들어가는 재정은 천문학적이고 오히려 고물가를 더 부추기는 부작용까지 우려된다. 이 대표가 ‘1호 민생법안’으로 밀어붙인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남아도는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사들이자는 것인데 쌀 과잉생산을 유발할 수 있는 데다 매입·보관 비용도 매년 1조 원이 들어간다. 대선 공약이었던 ‘탈모약 건보 적용’과 ‘병사 월급 200만 원’, 또 그의 브랜드로 자리 잡은 ‘기본 시리즈’도 모두 국가 재정에 심각한 충격을 주는 내용이다. 굳이 나랏돈을 펑펑 써야 한다면 곳간을 어떻게 채워 넣을지에 대한 구상이라도 내놔야 하는데 그조차도 없다. 차라리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대기업-고소득자에게 세금을 더 걷겠다고나 하면 정책의 타당성 여하를 떠나 앞뒤 논리라도 맞을 텐데, 여태 ‘부자 감세’ 프레임을 씌어 반대해 온 종합부동산세 완화를 느닷없이 추진하겠다고 한다. 기존 입장이 어떻든지 간에 납세자의 표만 얻을 수 있다면 나라살림 축내는 건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지금까지 지켜본 이재명의 먹사니즘은 무슨 철학이나 원칙이 있는 국정이념이라기보다는, 뭐든 나눠주거나 깎아주면서 민생을 챙기는 정치인으로 자신을 각인시키고, 무리한 지출에 국고가 바닥나는 현실은 외면하는 무책임한 정치쇼에 가깝다.민생 가장한 또 다른 포퓰리즘일 뿐 진짜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 그리고 요즘 이 대표가 유독 강조하는 ‘성장’의 해법을 찾으려면 지금처럼 재정 퍼주기 같은 원시적인 처방에 기대선 안 된다. 그보다는 투자와 혁신 등 민간 부문의 창의성이 빛을 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경쟁에서 뒤처지는 취약 계층에 기회의 사다리를 제공하는 것이 우선이다. 특히 국가 지도자급 반열에 오르는 걸 목표로 한다면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나라의 시스템을 바로잡는 일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가령 연금·노동개혁과 전기요금 현실화 같은 문제는 비록 유권자의 인기를 얻진 못하더라도 국가 장래를 위해 꼭 필요한 과제들이다. 지금 서민경제 현장은 현금 뿌리기로는 해결 못 하는 일들만 산더미다. 당장 노동시장에선 이렇다 할 직업도, 구직의사도 없이 그냥 쉬는 청년이 사상 최대라고 한다. 먹사니즘을 표방한다는 이 대표는 이들의 지갑에 25만 원씩 꽂아준다는 것 외에 청년 ‘일자리 절벽’의 근본 해법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나. 민생이라는 말의 무게를 그가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닌지 걱정이다.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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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스피 사상최대 폭락… 亞증시 ‘최악의 날’

    미국의 경기 침체 등을 우려한 투자자들의 ‘역대급 투매’로 한국과 일본, 대만 증시가 모두 사상 최대 폭으로 하락하는 등 아시아 증시가 일제히 초토화됐다. 기업들의 연쇄 부도나 감염병 확산 같은 대형 악재 없이 막연한 공포심리로 인해 증시가 이 정도로 대폭락하는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다. 그만큼 한국 금융시장이 대외 환경 변화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으로도 분석된다. 5일 국내 증시에서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234.64포인트(8.77%) 하락한 2,441.55에 거래를 마쳤다. 하락 폭 기준으로는 역대 최대다. 코스닥도 88.05포인트(11.3%) 하락한 691.28에 마감했다. 이날 코스피와 코스닥은 하락 폭이 커지면서 오후에 거래가 20분간 일시 중단되는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됐다. 국내 증시에서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된 것은 2020년 3월 19일 이후 4년 4개월여 만이다. 코스피는 거래 재개 이후에 지수가 더 떨어지면서 한때 289.23포인트(10.81%) 내린 2,386.96까지 하락하기도 했다. 두 시장에는 매도 사이드카 역시 발동됐다. 일본 증시는 더 크게 내렸다. 이날 닛케이평균주가는 4,451.28엔(12.4%) 내린 31,458.42로 마감했다. 이날 낙폭은 3,836엔이 떨어졌던 1987년 10월 20일 ‘블랙 먼데이’보다 커 역대 최대였다. 대만 증시 역시 1807.21포인트(8.35%) 빠진 19,830.88로 거래를 마쳤다. 1967년 지수 산출 이후 최악의 폭락장이다. 한국 시간 5일 밤 개장한 이날 뉴욕 증시는 나스닥지수가 6%, S&P500지수가 4% 급락한 채 거래를 시작했다. 유럽 증시도 장중 2%를 넘는 하락세를 보였다. 글로벌 증시 폭락의 직접적인 이유는 미국의 경기 침체 우려다. 여기에 인공지능(AI) 거품론이 불거지는 등 그동안 증시를 이끌었던 빅테크 기업 실적에 대한 의문이 확산된 것도 증시 하락의 기폭제가 됐다. 일본의 경우는 기준금리 인상으로 엔화 가치가 다시 급등하면서 수출 기업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그동안 엔화를 저금리에 차입해 세계 각지에 투자(엔 캐리 트레이드)했던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와 시장 불안을 가중시켰다. 여러 악재가 중첩된 복합 위기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증시 전문가들은 이런 요인들이 이날 대폭락장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글로벌 금융위기나 9·11테러, 팬데믹처럼 뚜렷한 이유 없이 시장이 급전직하하는 것은 막연한 공포심리가 투자자들 사이에 빠르게 전염되면서 비이성적인 투매가 반복된 결과라는 것이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주가 급락을 설명할 단서가 뚜렷하지 않다”며 “미국은 지금까지 증시가 과하게 오른 데 따른 반작용일 수 있지만 한국은 별로 오른 것도 없는 증시가 더 떨어지니 허무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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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스피 장중 2400 붕괴…亞증시 ‘최악의 날’

    미국의 경기침체 등을 우려한 투자자들의 ‘역대급 투매’로 한국과 일본, 대만 증시가 모두 사상 최대 폭으로 하락하는 등 아시아 증시가 일제히 초토화됐다. 기업들의 연쇄 부도나 감염병 확산 같은 대형 악재 없이 막연한 공포심리로 인해 증시가 이 정도로 대폭락하는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다. 그만큼 한국 금융시장이 대외 환경 변화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으로도 분석되고 있다.5일 국내 증시에서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234.64포인트(8.77%) 하락한 2,441.55에 거래를 마쳤다. 하락 폭 기준으로 역대 최대다. 코스닥도 88.05포인트(11.3%) 하락한 691.28에 마감했다. 이날 코스피와 코스닥은 하락 폭이 커지면서 오후에 거래가 20분간 일시 중단되는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됐다. 국내 증시에서 코스피·코스닥 시장에 동시에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된 것은 2020년 3월 19일 이후 4년 4개월여 만이다. 코스피는 거래 재개 이후에 지수가 더 떨어지면서 한때 282.23포인트(10.81%) 내린 2,386.96까지 하락하기도 했다.일본 증시는 더 크게 내렸다. 이날 닛케이 평균 주가는 4,451.28엔(12.4%) 내린 31,458.42로 마감했다. 이날 낙폭은 3,836엔이 떨어졌던 1987년 10월 20일 ‘블랙 먼데이’보다 많아 역대 가장 컸다. 대만 증시 역시 1807.21포인트(8.35%) 빠진 19,830.88로 거래를 마쳤다. 1967년 지수 산출 이후 최악의 폭락장이다.이날 증시 폭락의 직접적인 이유는 미국의 경기침체 우려다. 미국은 지난 주말 제조업 지표가 악화되고 실업률이 3년 만에 최대치로 올라서는 등 경제 감속에 대한 불안감이 커진 상황이다. 여기에 인공지능(AI) 거품론이 불거지는 등 그동안 증시를 이끌었던 빅테크 기업 실적에 대한 의문이 확산된 것도 증시 하락의 계기가 됐다. 일본의 경우는 기준금리 인상으로 엔화 가치가 다시 급등하면서 수출 기업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그동안 엔화를 저금리에 차입해 세계 각지에 투자(엔 캐리 트레이드)했던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와 시장 불안을 가중시켰다.그러나 증시 전문가들은 이런 요인들이 이날 대폭락장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글로벌 금융위기나 9·11테러, 코로나19 팬데믹처럼 뚜렷한 이유가 없이 시장이 급전직하하는 것은 막연한 공포심리가 투자자들 사이에 빠르게 전염되면서 비이성적인 투매가 반복된 결과라는 것이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주가 급락을 설명할 단서가 뚜렷하지 않다”며 “미국은 지금까지 증시가 과하게 오른 데 따른 반작용일 수 있지만, 한국은 별로 오른 것도 없는 증시가 더 떨어지니 허무한 상황”이라고 말했다.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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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힐빌리는 우리 주변 어디나 있다

    미국 러스트벨트의 백인 저소득층을 뜻하는 멸칭(蔑稱) 하나가 JD 밴스의 공화당 부통령 후보 지명을 계기로 다시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밴스의 베스트셀러 회고록에 소개된 힐빌리(Hillbilly)의 삶은 미국 현지에서도 2016년 출간 직후 상당한 화제가 됐다. 가난과 폭력, 알코올중독, 마약에 찌든 이들의 영혼은 ‘열심히 살아봤자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학습된 무기력이 지배한다. 고된 생업에 지친 부모들은 점심은 KFC, 저녁은 맥도널드로 자녀의 끼니를 아무렇게나 때운다. 마을에는 고등학교 중퇴자가 넘쳐 나고, 설탕 음료를 하도 마셔대서 이빨이 모두 썩어나가는 ‘마운틴듀 입’(Mountain Dew Mouth)을 가진 아이들투성이다.급변하는 경제 환경의 피해자들 힐빌리의 스토리는 여느 국가의 평범한 빈곤층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필자는 2020년 미 대선 당시 특파원을 하면서 도널드 트럼프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이런 ‘촌 동네’ 백인들을 많이 만나 봤다. 이들의 주장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공통된 것은 “우리가 원래는 잘살았다. 그런데 외부 세력이 들어오고 나서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는 논리였다. 밴스는 책에서 글로벌 기업의 침투로 마을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가난이 대물림되는 경험을 담담하게 기술했다.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확산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밑바닥까지 밀려난 사람들, 그게 바로 힐빌리의 본질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달라진 경제 환경의 급류에 휩쓸려 계층 하락의 피해를 보는 ‘한국판 힐빌리’는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있다. 부동산 가격 폭등에 무리한 대출로 집을 샀다가 고금리 장기화라는 철퇴를 맞은 영끌족들, 부모 세대는 경험해 보지 못한 저성장과 구직난에 비자발적 백수로 지내는 청년 실업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최저임금 급등과 내수 침체에 줄폐업하는 자영업자, 인공지능(AI)에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수많은 지식 노동자들도 마찬가지 신세다. 물론 세상이 변하고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뒤처지고 도태되는 집단은 인류 역사에 언제나 있어 왔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 변화와 추락의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실업 청년, 영끌족 아픔 보듬어야 미국 경제의 중추에서 순식간에 하층(下層)으로 전락한 힐빌리에게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정치 세력이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워싱턴 정가가 여야 모두 기득권 세력만 구애하는 각축장으로 변했을 때, 그 빈 공간을 영민하게 꿰차고 들어온 것이 정치 신인 트럼프와 밴스다.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외환위기 이후 자산 격차가 고착화되며 기회의 사다리가 붕괴되는 동안, 여의도 정치인들은 소수의 극렬 지지층과 거대 이익집단만 바라보며 정작 서민의 삶을 외면했다. 진보다 보수다 실용이다 온갖 고상한 용어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포장했지만, 삶이 절박한 이들에겐 먹고사는 것을 제외한 모든 말들은 그저 딴세상 얘기일 뿐이다. 그런 와중에 ‘내가 노력만 하면 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비율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정치 지형과 사회 여건이 미국과 여러모로 다른 한국에선 영끌족이나 청년 구직자,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미국처럼 정치 세력화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힐빌리를 ‘미국판 태극기 부대’쯤으로 보고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현상으로 치부하기에는 우리 주변 흙수저들, ‘한국판 힐빌리’의 현실이 너무나 녹록지 않다. 소외 계층의 분노와 아픔을 제때 감싸안지 못한 게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지난 몇 년간 미국은 뼈저리게 경험했다. 거기서 우리가 깨닫는 게 있어야 한다.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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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가 만난 사람]“귀농해보니 농업정책, 현장과 괴리… 예산 뿌린뒤 결과는 안챙겨”

    《한 나라의 재상(宰相)까지 지냈던 농부의 집은 생각보다 단출했다. 2층 양옥집과 그 옆에 조그만 단칸방이 있는 사랑채, 그리고 정자 하나가 전부였다. 박근혜 정부 때 역대 최장수(2013년 3월∼2016년 9월)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지낸 이동필 전 장관(69)은 장관 퇴임 바로 다음 날 아내와 함께 고향인 의성군 단촌면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에서 노모(92)를 모시면서 3000평 정도 되는 논밭에서 8년째 마늘, 고추 등 농산물과 과일을 재배하며 살고 있다. ‘사원제’(思源齊)라는 이름의 사랑채는 ‘사람의 도리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독서나 공부 모임을 위해 귀농 후 직접 마련했다고 한다. 인터뷰는 ‘애일당’(愛日堂·‘오늘 하루가 가장 소중하다’는 뜻)이라는 현판이 걸린 3평 넓이의 정자에서 10일 진행됐다. 평상에 낡디낡은 선풍기가 한 대 있었지만 틀어 놓지 않아도 시골 바람이 꽤 시원했다.》―요즘은 어떤 농사를 짓고 사시나. 2016년 9월 장관직을 그만둔 다음 날 내려왔으니 귀농을 한 지는 올해 9월로 8년이 된다. 국회의원을 했으면 두 번이나 했을 기간인데 아직은 초보 농사꾼이다. 마늘, 고추, 작약 등을 기른다. ―농사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어떤가. 이전에는 그래도 농사로 수입을 조금 올리곤 했는데 지금은 거의 벌어들이는 게 없다. 큰 농기계가 있어야 돈 버는 농사가 가능한데 며칠 일하자고 개인적으로 기계를 살 수도 없고 농사를 지어도 내다 팔 곳이 마땅치 않다. 가난한 선비랄까. 나이가 들면서 무리하게 일하기도 어려워졌다. ―요즘 이상 기후 때문에 농사일이 힘들지 않나. (이 전 장관을 만난 10일은 충청·전라도 지역에 기습폭우가 쏟아진 날이었다.) 기후변화가 매우 심각하다. 요즘도 농사철이 되면 가뭄과 홍수가 거듭되는데 선진국이 되려면 물 관리를 해서 이를 막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재해 대책을 세우기보다 보상을 어디에 얼마나 주느냐만 얘기한다. 이러면 근본적 해결이 안 된다. ―농사일을 해보니, 공직에 있을 때와 현장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농정과 현장의 괴리가 크다. 좋은 취지의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느라 애를 쓰지만 성과 관리가 부족한 것 같다. 기업인들은 일을 하면 결과를 체크하는데, 공직자들은 어디서 예산을 따오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경우가 많다. 그 정책을 추진해서 농가소득이나 식량자급률 같은 성과를 내는지 여부가 중요한데 돈만 쓰고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지 않나. 또 주민 생활에 꼭 필요한 곳에 돈을 써야 하는데 공급자 위주로 대형 공사만 남발하다 보니 성과를 체감하기 어렵다. 시골에도 문화회관 체육관 이런 거 크게 지어놨지만 이용하는 사람이 없다. ―장관직에서 퇴임하고 5급 공무원(경북도 정책자문관)으로 일해 화제가 됐다. 젊었을 때 “우리나라 농촌이 왜 못사는지를 공부해 오겠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무작정 서울로 갔다. 그래서 농촌경제연구원에 취직해 한평생 연구를 하고 여러 직책도 했다. 나름 나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막상 시골에 다시 와 보니 그게 아니었다. 마을은 전부 다 요양원처럼 노인들, 빈집들밖에 없고 내가 그동안 뭘 했나 자괴감이 왔다. 그런데 마침 기회가 생겨서 그냥 혼자 농사나 짓는 것보다는 내가 좀 거들 게 있나 싶어서 2019년부터 2년 정도 자문관을 했다. 그런데 내가 한마디로 밥값을 제대로 못 했다. 지방행정이라는 게 예산이나 역량에 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직원 한 명당 5, 6개씩 사업을 끼고 있다. 지역에 필요한 새로운 사업을 스스로 추진할 엄두조차 내기 어렵다. ―농촌이 여전히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나라 농업소득(순수하게 농사를 지어서 얻는 소득)이 1000만 원밖에 안 된 지 10년이 넘었다. 그렇게 많은 공직자가 매달려서 수십 조 예산을 쓰고도 농가소득이며 농촌인구며 줄어들고 이제는 농사 지을 사람도 없다. 농정의 내용과 체계를 싹 바꿔야 한다. 우리나라 농산물은 외국보다 두세 배는 비싸다. 결국 농업 생산비용을 낮추고 품질을 높여야 국제경쟁에서 살아남는데, 그것보다는 “쌀은 정부가 사준다”, “직불금 준다”는 얘기만 하고 있다. 표를 의식하니 문제의 본질은 놔두고 모두 생색내기에만 급급한 듯하다. ―생산비용을 어떻게 떨어뜨리나 농업을 규모화, 기계화, 전문화해야 한다. 농업 법인이 젊은 사람들을 고용해서 영세소농들과 함께 들녘이나 마을 단위로 농사를 짓고 품종을 통일하고 공동 육묘와 방재를 하면 ‘규모의 경제’가 가능해져 비용이 크게 절감된다. 지금은 소농들이 각개전투로 따로따로 농사를 짓는데 이래서는 효율이 생기지 않는다. 대형 농기계를 갖고 있는 농민은 흔하지 않다. 이렇게 농지와 노동력, 농기계 등 한정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서 생산성을 높일 생각을 해야지 쌀 수매가격에만 집착하다 보면 농촌은 계속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 전 장관은 장관 재임 시절 농촌 공동경영으로 영농 규모를 키워 생산비를 절감하는 ‘들녘 경영체’ 사업을 추진한 바 있다.) ―한때 많아졌던 귀농 인구가 요즘 계속 줄고 있다. 정부는 도시에서 일자리가 늘어서 그렇다고 해석하는데 나는 그렇게만 보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귀농·귀촌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줄었다. 농촌 상황이 그만큼 절박하다. 농사를 지어 먹고살기 힘들고 생활도 불편하다. 여기 해만 지면 밤새 깜깜하다. 청년들이 여기 와서 긴긴밤을 어떻게 보내겠나. 이 마을 초등학교는 내가 다닐 때는 한 학년이 200명이었는데 지금은 전교생이 10여 명 남짓하다. ―귀농·귀촌에 대한 정부 지원이 부족한가. 통계청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귀농·귀촌자들이 정보 제공은 많이 받지만 정작 주택 자금이나 영농 지원을 받은 사람 수는 미미하다. 귀촌자들의 경우 막상 시골에 살려면 도시 집 팔고 가야 하는데 그럴 때 양도소득세 감면은 해줘야 하지 않나. 특히 농촌 내려와서 살려면 용접 전기 목공 이런 실용적 기술이 상당히 필요한데 이런 건 안 가르치고 농산물 재배 방법만 알려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지방소멸을 걱정하면서도 귀농·귀촌자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은 모자라는 것 같다. ―젊은 인구를 농촌으로 유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결국은 일자리다. 농촌에 사는 게 수지가 맞고 재미있고 보람이 돼야 온다. 개인의 삶과 행복에 관한 문제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얘기할 때면 항상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삼농 정책을 말한다. 농사일의 수익성이 높아야 하고(후농·厚農), 농사짓기가 수월해야 하고(편농·便農), 농민의 자긍심이 높아져야 한다(상농·上農). 농업은 다른 사람의 먹거리를 생산해 주는 고귀한 직업, 뿌린 대로 거두는 정직한 직업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기후변화로 과수농가들의 위기감도 크다. 경북 최고 특산품이라는 사과를 예로 들어 보자. 사과도 개인적으로 재배, 판매하지 말고 과수 농가와 관련 사업자끼리 연대해야 한다. 봄철 사과꽃은 환상적이고 가을 사과밭도 아름답다. 사과 농가들이 품종 기술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시설·장비를 같이 쓰고 판매도 공동 브랜드로 해야 한다. 사과밭에 약 치는 것도 공동으로 하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굳이 객지에 나가서 사과를 팔지 말고 사람들을 끌어들여 보자. 미국 내파밸리처럼 ‘애플 밸리’를 만들어서 사과를 원료로 한 음식과 체험 및 관광을 연계하면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다. ―사과값 급등 때문에 난리인데 외국에서 수입하면 안 되나. 자칫 검역을 완화했다가 과수화상병 같은 게 발생하면 피해가 매우 크기 때문에 정부로서는 허락해 주기가 쉽지 않다. 그보다는 저탄소농업으로 사과 생산비를 떨어뜨리고 보기 좋은 사과보다 맛있고 먹기 좋은 사과를 생산하는 게 우선이다. 다만 금사과 사태가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수입을 영영 막을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남아도는 쌀은 어떻게 해야 하나. 쌀농사가 비교적 편하고 오랫동안 정부가 쌀농사 우선 정책을 펴왔기 때문에 농가에선 쌀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소비량보다 많은 쌀이 생산되지 않도록 생산을 조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짜야 한다. 양곡관리법 같은 수매 제도를 다시 도입하면 당장은 농민들에게 좋아 보이지만, 그게 장기적으로 농업농촌에 도움이 될지는 생각해 봐야 한다. 남아도는 쌀을 고집하기보다 부족한 다른 식량 작물을 재배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장관 출신이 평범한 농부로 돌아가서인지 일상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요즘 ‘이동필의 1-2-3-4’ 원칙을 지키며 산다. 1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 2는 하루 두 번 들에서 일하는 것, 3은 삼시세끼 어머니와 밥 챙겨 먹는 것, 4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말동무하며 지내는 것이다. 이동필 전 장관은…△1955년 경북 의성 출생△1978년 영남대 축산경영학과 졸업△1980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 연구위원△2011∼2013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장△2013∼2016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박근혜 정부)△2019∼2020년 경북도 농촌살리기 정책자문관의성=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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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한국의 혁신기업은 왜 실패하는가

    올해 초 윤석열 대통령은 집무실에 놓인 부친 고(故)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의 책장과 저서를 언론에 공개했다. 그는 “아버지가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해주셨고…(그런) 아버지의 생각을 새기고 일하기 위해 가져다 뒀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지난 2년간 현 정부의 경제정책을 보면 ‘자유’나 ‘시장’의 가치와 거리가 있는 항목이 적지 않았다. 최근 이슈가 된 몇 개만 골라 열거해도 지면에 차고 넘칠 정도다. 정부는 시장의 기본원리와 기업 경영의 자유를 흔들었다. 만만한 은행과 통신사, 공기업을 쥐어짜서 요금을 못 올리게 하거나 이미 거둔 수익마저 토해내게 했다. 지난주엔 전기료를 다섯 분기째 동결해 부채가 200조 원이 넘는 한국전력의 경영난을 가중시켰다. 은행들에는 이자 부담을 덜어준다는 명목으로 대출 금리를 억누르고, 대규모 이자 환급과 신용 사면도 강제했다. 이런 반시장적 경영 개입은 ‘조금 무리해서 빚을 내도 결국 탕감해 준다’는 신호를 줘서 가계빚 급증을 부채질했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은 기업의 자율적인 경영 판단을 제약할 게 뻔하지만 어찌 됐든 계속 밀어붙이고 있다.보수정부에서 反시장 정책 쏟아져 소비자에게선 선택의 자유를 뺏었다. 고물가에 신음하는 국민들은 발품을 팔아 해외에서 저렴한 상품을 직접 구매해 왔지만 ‘국민 안전’을 명목으로 이를 통째로 틀어막으려 했다. ‘금사과’, ‘금배’ 현상은 계속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은 데도 농가 눈치를 보며 과일 수입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안 그래도 이익집단의 저항에 번번이 백기를 들며 타다, 로톡 같은 혁신기업의 싹을 자르는 나라에서 시장경제의 기본인 재화의 자유로운 거래까지 차단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투자의 자유를 잃었다. 주가 하락이 예상되는 주식을 빌려 팔아 수익을 거두는 공매도는 모든 선진국에서 보편화된 투자 기법인데, 유일하게 한국만 1년 넘게 금지하려 한다. 공매도가 주가 하락을 부추긴다는 증거는 없고 오히려 과도한 증시 거품을 빼는 순기능이 있지만, 1000만 개미 유권자의 심기만 살피는 대통령실은 이를 곧이들을 생각이 없다. 증시 밸류업을 한다는 정부가 도리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범 역할을 한다. 윤 대통령은 그동안 자유와 시장의 신봉자로 스스로를 여러 차례 각인시키려 해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민과 기업의 경제적 의사 결정의 자유를 제약하고 시장 기능을 위축시키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혁신 장려하는 포용적 제도 갖춰야 대통령의 책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본다. 윤 대통령은 대런 애스모글루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필독서로 꼽은 적이 있다. 얼마 전 동아국제금융포럼 참석차 방한한 애스모글루는 이 책에서 통제와 규제, 억압보다는 혁신과 창의를 장려하는 포용적 제도를 갖춰야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같은 견지에서 ‘한국 증시는 왜 실패하는가’, ‘한국 기업의 혁신은 왜 실패하는가’에 대한 답도 찬찬히 연구해 보길 바란다. 시장 본연의 기능인 가격 결정에 개입하고 정상적인 기업 활동을 방해하는 이 정부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인지, 애스모글루는 “한국은 군사정권 시절 관치경제 흔적이 남아 있다. 완전히 포용적인 제도 구축을 위해 갈 길이 멀다”고 일갈했다. 이 정부는 기득권 집단의 저항을 넘어 시장의 박힌 돌과 고인 물을 빼고, 소비자를 이롭게 하는 ‘자유시장경제 수호자’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나. 그게 아니라면 우리 증시가 왜 다른 나라에 뒤처지는지, 엔비디아 같은 혁신기업이 왜 한국에서 안 나오는지는 따로 고민해 볼 필요도 없다.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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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이러다간 정말 ‘데드덕’ 신세 된다

    지난달 총선이 끝나고 세종시 관가에서는 일제히 비상대책회의가 열렸다. “3분의 1밖에 안 되는 여당 의석으로 어떻게 국정을 꾸려가야 하나.”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를 수습하듯, 대통령실과 정부 부처들은 자신들에게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무기를 헤아려 보기 시작했다.극단적 여소야대에 정권 ‘식물화’ 우려 여당은 이번에 300석 중 192석을 잃었다. 집권세력엔 사망선고일 것 같지만 헌법이 보장하는 행정부의 권력은 생각보다 막강하다. 우선 나라의 돈줄을 여전히 쥐고 있다. 정부는 예산을 편성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더 중요한 ‘증액 동의권’을 갖고 있다. 국회는 정부가 짜온 예산을 이래저래 삭감할 수는 있지만, 정부 동의 없이는 어떤 지출 항목도 규모를 늘리거나 새로 만들지 못한다. 두 번째 무기는 시행령. 정부 여당의 입법 기능은 이제 완전히 상실됐다고 볼 수 있으나, 대통령에게 위임된 권한으로 아직도 많은 정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게 종합부동산세 같은 세금 제도다. 법 개정으로 세율을 바꾸지 않고도 시행령을 통해 실제 국민들의 세 부담(과세표준)을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다. 마지막은 이 정권이 워낙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서 필부에게도 익숙해진 재의요구권(거부권)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남은 3년을 버틸 통치수단이 대충 이 정도라는 점을 인식한 듯하다. 그가 얼마 전 국민의힘 초선 당선인들을 모아 놓고 “정부 여당으로서 권한이 있으니 소수라고 기죽지 말라”고 한 것도 그런 차원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선거 직후 관가에서는 “야권이 200석을 넘지 않은 게 그나마 천만다행”이라는 자조가 나왔다. 그랬다면 모든 법안을 야당이 단독 처리할 수 있게 되고, 여권이 힘겹게 찾아낸 ‘3개의 화살’ 중 2개(거부권과 시행령)가 우습게 사라질 뻔했으니 말이다. 앞으로 윤 정부의 경제 정책은 법을 바꾸지 않고도 구현할 수 있는 ‘잔잔바리’ 대책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공무원들의 창의성이 받쳐줄지 걱정되기는 하나, 이들은 이런 여소야대 상황에 아주 익숙하다. 문제는 이런 정치 판도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 역시 우리에게 무척이나 익숙하다는 점이다. 관가에선 벌써부터 무력감을 넘어 복지부동과 책임 회피, 야당에 줄 대기 같은 풍토가 만연한다.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재정준칙 마련 등 주요 정책이 줄줄이 좌초되는 가운데, ‘해외 직구 금지’ 번복 사태는 가뜩이나 움츠러든 공직사회에 “뭐든 절대로 나서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무엇보다 가장 큰 우려는 야당은 거대 의석으로 정부의 발목을 잡고, 정부는 거부권으로 이에 응수하는 비토크라시 정국이 임기 끝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면 서로가 서로의 멱살을 잡고 늘어져 결국 아무것도 진척되지 않는 심각한 국정 정체가 불가피하다. 삼권분립이 아닌 삼권대립, 삼권충돌의 시나리오다.민생-실용주의 정부로 재탄생해야 새 국회가 오늘 개원한다. 여소야대 정부가 ‘식물화’되는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민생이 걸린 사안에 더욱 주도권을 갖고 임해야 한다. 거대 야당을 설득하고 국민 여론을 경청하며 과도한 이념 색채를 줄여 실사구시 정책을 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총선 이후 정부 여당이 그런 쇄신의 태도를 보여준 게 있었나. 오히려 연금개혁이나 종부세 개편 같은 현안은 야당에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면서 대통령 심기 경호를 위해선 한 몸처럼 똘똘 뭉치는 작태만 보이고 있다. 22대 국회에서는 거부권이 무력화되는 이탈표의 기준도 17표에서 8표로 낮아진다. 까딱하다가 윤 정부 후반부는 정말 레임덕(lame duck)을 넘어 데드덕(dead duck·심각한 권력 공백)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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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가 만난 사람]“AI, 전기처럼 어디서나 쓰일 것… 영화 ‘매트릭스’ 같은 파국 막아야”

    《“저는 기본적으로 인공지능(AI) 시대를 낙관합니다. 다만 우리가 미래에 적절히 대비했을 때에 한해서죠.”저명한 AI 전문가이자 미래학자인 마틴 포드(61)는 앞으로 다가올 AI 시대는 우리가 하기에 따라 극명히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인류에 긍정적으로 전개될 수도 있지만, 자칫 디스토피아가 펼쳐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만일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만 한다면 앞으로 미래는 비관적”이라며 “사람들이 일자리를 빼앗긴 채 가상의 세계에만 의존하는 세상도 충분히 상상이 가능하다”고 했다. 포드는 “AI의 활용 범위에 대한 적절한 규제와 함께 AI 기술의 발전으로 일자리를 잃는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필수”라고 조언했다.》 베스트셀러 ‘로봇의 부상’, ‘AI 마인드’, ‘로봇의 지배’의 저자인 포드는 전 세계에서 AI 분야 전문 강연자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그는 대학 때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실리콘밸리에서 소프트웨어 개발 스타트업을 설립해 운영한 경험도 있다. 또 이달 30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리는 ‘2024 동아국제금융포럼’에서 ‘AI, The Coming Disruption’(AI, 다가오는 혼란)을 주제로 강연한다. 포드는 본보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딥페이크 기술이 정교해지면서 AI가 민주주의와 선거제도를 위협하고 있다”면서 “AI 기술이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들어가 민간인 살상에 쓰일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 수년간 AI 발전 속도는 예상했던 수준인가. “생각보다 빠르다. 대형언어모델(LLM)이나 챗GPT는 정말 놀라운 일이다. 지금 AI 시스템은 인간보다 대부분의 영역에서 우월하다.” ―AI 시대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나. “AI는 전기(electricity)와 같아질 것이다. 그만큼 어디에서나 존재하게 된다. 전기의 발명이 그랬던 것처럼 AI도 우리의 삶, 문화, 경제 등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다. 일단 긍정적인 것은 AI가 과학기술의 진보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의학의 영역에서 질병 치료와 생명 연장 기술에 돌파구가 될 것이고, 빈곤 퇴치와 기후변화 대응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포드는 “AI로 인해 새로운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변화가 생기고 앞으로 더 혁신적인 제품이 나와 모든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것”이라며 “이런 혜택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AI가 전기처럼 쓰인다면, 앞으로 인류가 지나치게 AI에 의존하게 될 수 있다”며 “챗GPT 때문에 벌써 학생들이 글 쓰는 법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했다. ―AI 같은 신기술은 모두에게 공평한 혜택을 줄까. “아닐 것이다. AI는 일자리 시장에서 불평등을 늘릴 가능성이 크다. 어떤 일자리는 AI가 업무에 큰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어떤 일자리는 AI가 당신을 대체해 버릴 수도 있다. 가령, 과학자들에게는 AI가 연구를 돕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그러나 패스트푸드 음식점에선 지금도 많은 로봇과 키오스크가 직원들의 업무를 대체하고 있다. 물류창고나 공장 또는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사무직도 마찬가지다. 결국 일반 노동자들보다는 부자들이 AI 기술로 더욱 혜택을 입을 것이다. 그래서 사회는 이를 보정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보편적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도 방법이다.” ―생산직과 사무직 중 어느 쪽이 더 타격을 입을까. “아까 AI가 전기와 같이 어디에나 영향을 준다고 했듯이, 일자리에 미치는 충격도 둘 다 마찬가지다. 둘 중 어디가 먼저 충격을 입을지를 굳이 말한다면 사무직이다. 블루칼라를 대체할 로봇들은 더 만들기 어렵고 비싸기 때문이다. 블루칼라 중에서도 전기 기사나 배관공 같은 숙련 노동자들은 가장 안전한 직종이다.” ―사무직 중 가장 AI에 취약한 직종은 무엇인가. “컴퓨터 앞에서 일상적으로 정보를 다루는 모든 직종이 해당될 것이다. 대표적으로 계산 업무를 하거나 대출을 집행하는 금융 분야다. 기자들의 업무도 이미 자동화되는 추세다.” 포드는 “그러나 AI로 인한 일자리 변화의 양상이 어떤 일은 완전히 사라지고 어떤 일은 온전히 살아남는 형태는 아닐 것”이라며 “일자리의 개념이 다시 정의(redefined)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포드는 ‘세 사람이 같은 일을 하고 있었는데 AI의 등장으로 일이 줄어서 직원 수가 한두 명으로 감소한 경우’를 예로 들었다. 이때 남은 한두 명은 이전과 같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업무의 범위와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고 이로 인해 기업도 새로운 일을 하는 직원을 다시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로봇이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고 창의적인 생각을 하게 될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창의성은 이미 갖고 있는 것 같다. 또 AI가 감정을 복제하거나 조작하는 것도 하게 될 것이다. AI가 우리의 감정을 읽어내는 능력도 향상됐다. 우리가 어떤 제품을 구입하게 만들거나, 범죄자가 사람들의 돈을 빼앗는 데도 AI가 활용될 수 있다.” ―미국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AI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우려가 많다. “물론이다. 가령 선거를 며칠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어떤 후보가 인종차별적 발언 같은 최악의 말을 하는 장면이 딥페이크 음성파일에 담겨서 유포되는 걸 상상해 보라.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하기 어렵다. 그런 딥페이크는 정치인들의 실제 영상과 음성을 통해 알고리즘이 학습을 거듭할수록 훨씬 더 정교해질 수 있다. 요즘은 동영상 하나가 퍼졌을 때 충격파가 엄청나다. 단적으로 조지 플로이드 영상 하나로 미국 사회가 엄청난 혼란을 겪지 않았나. 그런 영상을 가령 중국의 정보기관 같은 데서 미국 사회의 불안을 자극하기 위해 가짜로 만들어서 뿌린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 일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고 AI가 악용될 여지는 충분하다.” ―AI의 무기화 우려를 어떻게 보나. “정말 현실적인 우려다. 모든 주요국의 군대는 이를 위한 연구를 하고 있을 것이다. AI를 활용할 수 있다면 실제 전쟁터에서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뉴스에 거의 즉각적으로 반응해 금융거래를 수행하는 알고리즘이 있다면 인간 트레이더들은 거의 경쟁이 안 될 것이다. 유엔 차원에서 이런 자율무기 개발을 금지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항상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 러시아 등 주요국이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술이 테러리스트의 손에 들어간다는 것도 매우 우려된다. 이들이 AI 드론을 민간인 공격에 활용한다면 매우 끔찍한 시나리오다.” ―AI가 우리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일론 머스크는 AI 기술 개발을 6개월간 중단하자고도 제안했는데 나는 그것에는 반대한다. 다만 AI의 적용 부문에 대해서는 규제가 필요하다. 지금도 의학 또는 자율주행차에 대해서는 규제가 있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규제가 많지 않다. 또 다른 과제는 AI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에 대처하는 것이다. AI로 인해 밀려나는 근로자의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AI 기술이 강력해질수록 이들이 겪는 충격은 훨씬 더 심해질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의 권리가 박탈될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주장하는데, 그 재원은 누가 댈 수 있나. “기본적으로 기업들의 세금이다. AI 발전으로 기업들의 인건비 지출이 줄어든다면 남아도는 돈을 세금으로 거둬서 재원으로 마련하자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복지의 차원이 아니다. 앞으로는 기업들이 더 적은 직원으로 제품을 만들 수는 있어도, 그것을 사줄 수 있는 소비자들, 즉 근로자들의 소득이 충분치 않다면 기업은 제품을 판매할 수 없을 것이다. 기본소득은 사람들에게 단지 음식과 주거를 제공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경제성장에 필수적인 수요를 창출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그리고 기본소득을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나눠 주자는 것도 아니다. 모두에게 먹고살 만큼은 주되, 공부를 하거나 재교육을 받는 등 생산적인 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더 많이 주는 인센티브를 병행하자는 것이다.” ―AI 시대에는 어떤 산업이 각광받게 될까. “아까 말했듯이 AI는 전기와 같아서 모든 산업을 변화시킬 것이다. 물론 당장은 AI와 연관된 기술 산업들이 잘나가겠지만 기본적으로 제조업, 물류, 소매 등 모든 산업에 영향을 줄 것이다. 고령화가 심각한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헬스케어 분야에서 AI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AI와 인류의 미래에 대해 낙관하나. “낙관한다. 다만 미래를 위해 우리가 합리적인 조치를 취한다는 전제하에 그렇다. 만일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하기만 한다면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다. 최근 저서에서 영화를 이용해 두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한 바 있다. 하나는 스타트렉 같은 낙관적 시나리오, 다른 하나는 매트릭스 같은 비관적 시나리오다. 매트릭스처럼 AI가 인간을 노예화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스러운 세상은 앞으로 얼마든지 올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사람들이 돈을 벌거나 일자리를 갖기 어렵고 현실 세계에서 유리된 채 가상의 세계에서 생활하는 디스토피아적인 세상은 앞으로도 충분히 그려 볼 수 있다.”마틴 포드(61) △미래학자 겸 작가△미국 미시간대 컴퓨터공학과△UCLA 앤더슨 경영대학원△실리콘밸리 소프트웨어 개 발 회사 설립△‘로봇의 부상’, ‘AI 마인드’ (사진), ‘로봇의 지배’ 저자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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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공짜 점심도, 공짜 무역도 없다

    도널드 트럼프의 ‘무역 책사’인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전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 트럼프가 재집권한다면 재무장관 또는 최소 통상정책을 다시 맡을 게 확실시된다. 그가 작년에 출간한 ‘No trade is free’(공짜 무역은 없다)에는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의 형 윌버 라이트의 말이 소개돼 있다. “젊은 사람에게 내가 성공을 위한 조언을 건넨다면, 좋은 부모 만나 오하이오에서 인생을 시작하라고 하겠다.”美 대선 앞두고 보호주의 가속화 오하이오주는 윌버와 라이트하이저의 고향이다. 지금은 쇠락한 ‘러스트벨트’의 대표주자 격이지만 라이트하이저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1950, 60년대만 해도 윌버의 말처럼 미국의 풍요와 여유로움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라이트하이저는 “그러나 그 후로는 일자리와 함께 사람들도 떠나갔다”며 “내가 살던 마을은 이제 3분의 1이 빈곤층이고 대졸 학력자도 10%가 안 된다”고 했다. 그는 고향마을 몰락의 주된 이유로 미국의 ‘잘못된 경제 정책’, 즉 자유무역을 지목한다. 외국 기업들의 무차별 공습이 미국 노동자 가정의 삶의 터전을 파괴했다는, 우리도 이젠 익히 들어서 아는 논리다. 라이트하이저의 이런 생각은 자기 고향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몸소 보고 겪으며 형성됐다. 뼈마디에 새겨진 확고부동한 신념인 것이다. 그가 2017년 트럼프 1기 행정부의 통상정책을 맡자마자 한 일도 기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걷어차고 한미 FTA 재협상을 주도한 것이었다. 동맹의 가치나 정통 경제이론이 어떻든 간에 계산기를 두드려 보고 미국에 불리하다는 판단이 서면 한 치도 좌고우면이 없다. 그는 최근에도 “기술이 계속 바뀌는데 무역협정이 영원해야 한다는 것만큼 멍청한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재집권에 성공한다면 미국이 한국 같은 무역 흑자국에 내미는 청구서는 생각보다 빨리 발송될 수 있다. 트럼프 캠프는 모든 국가에 관세율을 10%까지 올리는 ‘보편적 기본 관세’를 도입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게 현실화하면 지금의 한미 FTA 협정문은 휴지 조각이 된다. 물론 트럼프의 승리는 아직 장담할 수 없는 단계다. 그럼 조 바이든 후보는 좀 나을까. 그는 ‘주한미군 철수’ 같은 과격한 협박을 하진 않지만 경제 분야에서는 오히려 더 치밀하게 ‘미국 우선주의’ 기조를 견지한다. 미국이 근래에 와서 여야 당론이 일치하는 지점이 몇 개 있는데 그중 일부가 중국에 대한 강경 기조, 그리고 자국 산업·일자리를 적극 보호하는 것이다. 이는 통상정책의 최전선인 USTR 대표에 대한 의회 표결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라이트하이저를 포함해 대부분의 경우 양당의 초당적인 지지로 인준안이 통과됐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의 대중 고율 관세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반도체 보조금, 인플레이션감축법 같은 새로운 보호무역 카드를 동맹국의 입장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계속 꺼내 들고 있다. ‘말과 스타일이 거친 트럼프냐, 조용히 행동으로 보여주는 바이든이냐’인데, 정말 고민이다. 우리에게 투표권이 있다면 과연 누굴 찍어야 할지.역대급 대미 흑자에 취할 때 아니다 작년 한국은 미국과의 교역에서 사상 최대(445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냈다. 지난 30년간 우리 수출의 버팀목이었던 중국의 역할을 이제 미국이 대신해 주나 싶지만 그런 기대는 너무 순진하다. 미국과의 교역에서 재미를 볼수록 우리는 과다 흑자국으로 찍히고, 워싱턴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든 하나 분명한 것은 라이트하이저의 책 제목처럼 우리에게도 미국과의 공짜 무역이 더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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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유재동]‘5000원 원피스’의 한국 공습

    지난주 중국을 방문한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은 워싱턴의 대표적인 친중 유화파다. 중국과의 경제 협력이 양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를 이롭게 한다고 믿는다. 1990년대 빌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자문위원장 시절 그는 중국에 손을 내밀어 훗날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중국을 글로벌 무대로 불러내면 민주주의의 가치를 받아들여 서방에 동화되고, 미국은 중국의 값싼 상품을 수입해 소비자 후생(厚生)이 증가할 것이란 계산이었다. 그의 전략은 일부 현실이 됐다. 미국의 의도대로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급부상하자, 글로벌 경제는 중국의 저가 상품 덕분에 고성장-저물가의 호황을 누렸다.세계 경제 위협하는 中의 과잉생산 이들의 공생은 영원하지 못했다. 중국의 시장 잠식으로 제조업 기반이 흔들린 미국에서는 세계화가 한창이던 10여 년 동안 수백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파국의 도화선은 2008년 금융위기였다. 미국이 비틀거리는 사이 중국은 고부가산업 발전의 사다리를 타며 태평양 건너 유일 초강대국의 지위를 위협했다. 그런 위기의식에 탄생한 트럼프 정권은 드높은 관세 장벽을 치며 중국산 제품에 빗장을 걸었고, 뒤이은 바이든 행정부도 대중 압박에 온 힘을 다했다. 옐런 장관은 이번 방중에서 “중국이 과잉 생산을 억제해야 한다. 미국의 신산업이 파괴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놨다. 중국을 세계화로 이끌며 전 세계에 ‘메이드 인 차이나’의 홍수를 일으킨 장본인이 한 말이라고는 믿기가 힘들다. 요즘 ‘알·테·쉬’로 상징되는 초저가 중국산의 공습은 20년 전과 섬뜩한 데자뷔를 이룬다. 중국 기업들은 자국 정부 보조금을 등에 업고 상품을 헐값에 해외로 쏟아내다시피 하고 있다. 한국이 ‘디플레 수출’의 전초기지로 활용된다는 점도 당시와 비슷하다. 하지만 따져 보면 지금의 양상은 이전과는 차이점이 오히려 더 많다. 우선 원인부터 다르다. 과거엔 ‘은둔의 나라’ 중국의 글로벌 무대 데뷔로 저가 제품들이 자연스럽게 시장에 쏟아졌지만, 지금은 내수 시장과 부동산 침체로 자국에서 안 팔리는 재고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성격이 짙다. 중국의 불황은 우리가 싸구려 중국산의 공습에 대응해 우리 제품을 중국에 내다 팔 여지가 적다는 걸 뜻한다. 실제로 작년 대중 수출이 급감하면서 한국은 1992년 수교 이후 처음 중국에 무역적자를 냈다. 중국의 산업구조도 변했다. 2000년대 초반엔 주로 저숙련·경공업 기반의 중국산이 세상에 풀렸다면, 지금은 전기차 배터리 석유화학 등 한국과 경쟁 관계에 있는 주요 산업에서 초저가 제품이 범람하고 있다. 중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커지니 ‘2차 차이나 쇼크’의 충격도 배가될 수밖에 없다. 값싼 중국산이 밀려들면 당장 해당 국가의 소비자들은 물가가 낮아져 좋을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가격 경쟁에서 밀린 자국 기업의 실적이 추락하고 일자리 감소와 내수 침체, 산업 기반 붕괴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그런 뼈아픈 경험이 있는 미국은 “이번에는 당하지 않겠다”며 중국 상품에 대한 고강도 견제에 나설 채비다.값싼 중국산의 홍수, 더는 축복 아냐 주요국의 철벽 방어막에 판로가 막힌 중국은 먹잇감을 다른 주변국에서 찾고 있다. 요즘 한국이 그 타깃이다. 알리나 테무 앱에서는 2000원짜리 무선 이어폰, 5000원짜리 원피스 등이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우리를 현혹하지만, 개중에는 품질도 형편없고 발암물질만 듬뿍 함유된 엉터리 제품들이 무더기로 포함돼 있다. 한때 우리 경제 성장의 버팀목 역할을 했던 중국은 이제 이웃나라의 산업 생태계와 국민 안전을 위협하는 나라로 돌변했다. 값싼 중국산의 홍수에 기업도 정부도 소비자도 바짝 긴장해야 한다.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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