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후 절치부심한 소니와 일본의 발전상은 모두가 아는 대로다. 1980년대 일본의 경제력은 미국마저 추월하며 세계 1등을 넘보는 나라가 됐다. 그 핵심 동력은 정부와 기업, 학계가 총력을 기울여 육성한 반도체 산업이었다. 모리타가 당시 일본의 극우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와 함께 쓴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에는 “일본의 반도체 기술 없이 미국의 군사력은 유지될 수 없다. 미국에 고개 숙일 필요가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 일본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베스트셀러 ‘칩워(Chip War·반도체 전쟁)’를 쓴 경제사학자 크리스 밀러에 따르면 미국이 반도체를 경제안보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은 이 무렵부터였다. 후발주자 일본의 급부상으로 궁지에 몰리자 그동안 정부의 간섭도 지원도 마다했던 실리콘밸리 기업인들이 워싱턴을 제 발로 찾아갔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세금 지원, 지식재산권 보호 같은 카드를 내밀었지만 산업계의 위기감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나온 게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 일본이 자국 내 미국산 점유율을 높이고 일본산의 미국 수출은 제한하는 굴욕적인 협정을 계기로 일본 반도체 산업은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칩워는 ‘영원한 내 편’이 없는 각자도생 혈투다. 상대에게 얕보이지 않을 초격차 기술이 없으면 아무리 혈맹이라도 힘에 의해 휘둘리고 탈탈 털리는 신세를 면할 수 없다. 정부가 미국을 붙잡고 반도체지원법에 이의를 제기한다고 하지만 요청이나 부탁의 차원을 넘진 못할 것 같다. 협상의 지렛대를 얻으려면 본연의 힘을 키워야 하는데 그동안 우리에게 그럴 의지나 전략이 있었나. 마침 반도체 투자에 세제 지원을 확대하는 ‘K칩스법’이 여야와 정부의 공감대 속에 늦었지만 곧 처리될 수 있다고 한다. 설령 그게 된다고 해도 우린 아직 갈 길이 너무나 멀다. ‘3류 관료, 4류 정치’가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다는 오명도 떨칠 때가 됐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