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가족관계부 보고 ‘폭력 아빠’ 찾아올까봐 혼인신고 못해요”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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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결혼한 30대 여성 A 씨는 7년째 혼인신고를 못 하고 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인연을 끊은 아버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다. 혼인신고를 하면 자신의 가족관계증명서에 남편의 인적사항이 올라가고 그렇게 되면 남편까지 아버지의 추적 대상이 될 수 있다.

현행법상 아버지는 A 씨의 가족관계등록부를 언제든지 열람할 수 있다. A 씨는 “내 사정 때문에 ‘동거인’에 머물러 있는 남편 얼굴 보기가 늘 미안하다. 혼인신고를 못 해 부부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도 포기해야만 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A 씨에게 아버지는 “내 인생에 처음부터 없길 바랐던 존재”였다. 아버지는 의처증이 심했다고 한다. A 씨의 어머니가 야근을 마치고 늦게 귀가한 날이면 “직장에서 바람을 피우는 것 아니냐”며 주먹을 휘둘렀다. A 씨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아버지는 A 씨도 자주 폭행했다. 우산으로 머리를 때리고 화가 치밀면 뺨을 때렸다. “너 같은 애는 학교 갈 필요 없다”며 등교를 막아 결석한 적도 많았다.

2006년 부모의 이혼으로 A 씨는 아버지의 가정폭력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하지만 또 다른 공포가 시작됐다. 도박에 빠져 지내던 아버지는 돈을 뜯어내려 A 씨 모녀를 찾아다녔다. 대학생이 된 A 씨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생활비도 빼앗다시피 가져갔다. 대학 선후배들과 교수들로부터 “아버지라는 사람이 찾아와 네 거주지와 연락처를 집요하게 물었다”는 말을 전해 들을 때마다 A 씨는 몸서리쳤다. 친구들로부터 “네 아버지가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도 자주 받았다.

A 씨는 대학교 기숙사에서 도망치듯 나와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허름한 원룸을 전전했다. 휴대전화번호도 수시로 바꿔야 했다. A 씨가 취업하자 아버지는 A 씨의 직장으로도 연락해 “내 딸이니 주소와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했다. 아버지의 추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결혼 후 7년이 지났지만 A 씨는 아직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다. 아이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가면 아이마저 아버지의 추적 대상이 될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A 씨는 아버지가 가족관계증명서를 볼 수 없도록 하는 법이 만들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2009년 주민등록법 개정으로 가정폭력 가해자는 가족의 주민등록등·초본을 열람할 수 없다. 하지만 가족관계증명서를 보는 데는 여전히 제한이 없다. 지난해 12월 김현아 자유한국당 의원은 가정폭력 피해자가 원할 경우엔 가족관계증명서에 배우자와 자녀의 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의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A 씨는 매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 법안의 처리 상황을 확인하고 있다. 이 개정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됐지만 아직 논의가 시작되지 않았다.

A 씨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울타리를 세워야 하고, 그 안에서만 안전한 상태”라며 “가정폭력 피해자가 가해자와 완전히 분리될 수 있도록 법이 바뀌어 혼인신고도 하고 아이도 낳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신아형 기자 abro@donga.com
#가정폭력#혼인신고#가족관계증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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