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미석]“고맙습니다, 여러분”

  • 입력 2005년 12월 7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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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몇 시예요?”

시험시간을 코앞에 두고 정신없이 달려가던 소녀가 나무 위에서 일하는 아저씨에게 소리쳐 묻습니다. 급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아저씨는 느긋하게 답합니다. “어제 이맘때!”

출근 준비를 서두르다 언뜻 벽에 걸린 달력을 보니 아직도 11월에 멈춰 있습니다. 게으름을 반성하다 스스로를 위로하며 떠올린 이란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이란 아저씨 식대로 따지자면 시간은, 단순한 숫자가 아닐 테지요. 그러니 유난히 어수선한 세밑을 맞은 우리들도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의 분주함으로 동동거리기보다, “지난해 이맘때”란 마음가짐으로 좀 여유를 가져봄 직합니다.

이 세상 어디나 그 지역 고유의 시간 재는 방법과 근거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책에 보니, 부룬디에서는 한밤중의 시간을 ‘누구세요?-밤’이라고 부른답니다. 칠흑 같은 어둠 때문에 사람을 마주쳐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죠. ‘세계가 지나갔다’라는 요커츠 족의 표현은 ‘한 해가 흘렀다’로 번역할 수 있답니다. 브라질에 사는 과라니-카이오와 인디언들의 나이를 알려면 “당신 생애에서 구아버 꽃이 몇 번 피었나요?” 하고 물어야 한다는군요. 하루 24시간, 1년 365일. 서구식의 토막 시간보다 자연의 흐름에 근접해 보이지 않나요.

이제 달력 한 장을 넘기면 세계는 몇 번을 지나가고, 구아버 꽃은 또 몇 번 피고 진 것일까요. 사람마다 그 수는 다르겠지만 저마다 어김없이 체감하는 삶의 현실은 있습니다. 올해도 사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세상은 너그럽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서 해 놓은 일 없이 그저 한 해를 보내는 것이 두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나이가 주는 편안함도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오랫동안 의심 없이 받아들여 온 관습적 통념을 거부하거나 내 식대로 뒤집어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수성가(自手成家)’란 말을 저는 더는 믿지 않습니다. 혼자 힘으로 성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살다 보니, 부모나 가까운 사람에게서 눈에 보이는 지원을 설혹 못 받았다손 치더라도 이 고단한 세상을 남의 도움 전혀 없이 홀로 헤쳐 나가기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팍팍한 삶의 어느 한 대목에서 만난 따뜻한 말 한마디, 정겨운 미소가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한 해를 넘기면서 고마운 사람들을 꼽아 봅니다. 가족이나 친구야 더 말할 것도 없고요,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함께했지만, 한번도 감사함을 전하지 못한 분도 많습니다. 언제나 저보다 먼저 출근해 말끔한 사무실에서 일하게 해 주신 미화원 아주머니, ‘맛있게 드세요’라며 제가 좋아하는 국물 듬뿍 떠주시는 구내식당 아주머니, 자정 넘어 퇴근해도 절대 졸지 않고(?)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꼬박꼬박 배웅해 주는 보안 담당 아저씨들도 그런 분들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분들입니다. 아침마다 햇빛 들어오는 광화문 사무실에서 올곧게, 선하게 살고자 하는 동료들이랑(사실 가끔은 높은 목소리도 오갑니다만) 만나게 해 주신 분들입니다.

불가(佛家)에선 평생 한 사람이 3000명 정도의 사람과 인연으로 살아간다고 한다는군요. 근데 기자들에겐 그보다 훨씬 많은 인연이 있을 것 같습니다. 불쑥 이런 말 꺼내기 참 쑥스럽지만 그래도 이참에 꼭 한번 말하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고미석 문화부 차장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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