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서령]배설물은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 입력 2005년 10월 14일 03시 00분


코멘트
정화조를 청소하고 분뇨차를 얻어 탔다. 타고 보니 지난 1년간 모인 내 똥을 따라가는 셈이다. 똥은 어디로 가나? 갑자기 막연해진다. 희디흰 사기 변기에 앉았다가 그냥 레버만 누르면 물소리도 상쾌하게 사라져 줬으니 지금껏 그 행방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아까 진공 흡입기와 물줄기를 양손에 들고 정화조의 내용물을 빨아들였던 기사 분은 차의 방향이 난지하수종말처리장이라고 한다. 길가엔 노랗게 감국(甘菊)이 한들거리고 차의 조수석은 높아 하늘이 장하게도 드넓다. 그렇지만 뒤에 가득 실은 똥은 어디로 가나. 한때는 들고 다니는 가죽가방을 구성하던 살가죽의 행방도 궁금했다. 살고 죽는 것의 비밀을 알아보겠답시고 헤매고 다닌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내 몸이 만들어 낸 똥의 처리 따위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똥은 발음하기도 더러운 존재의 치욕일 뿐이었다.

곤지암의 한 도예가 댁에서 뜰 저쪽에 숨긴 뒷간을 봤다. 디딤판 아래엔 오물 대신 풀이 덮여 있었다. 봄가을엔 꽃잎이고 겨울엔 메밀가루 같은 재를 뿌린다고 했다. 그 댁의 뒷간 호사는 오물을 가리는 방식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이 호박은 물론이고 장미꽃도 인분을 먹여야 향기가 좋아져요. 인분을 먹인 딸기라야 단맛이 제대로 돈다니까요.”

제 몸에서 나온 거름으로 키운 채소를 다시 제 입에 넣는 것만 한 호사가 없으리라는 주장은 엄숙했다. 원래는 호사도 뭣도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데 자연을 거스르고 사는 게 문명인 줄 아는 현대에는 그 시시한 기본이 호사로 변해 버렸다고 그분은 탄식했다.

곤지암 방문 이후 똥이 땅의 다른 이름이란 걸 알게 됐다. 생각하면 땅과 똥은 식물과 동물을 중매쟁이 삼아 서로 순환하는 운명이다. 햇볕과 물과 시간 아래서 둘은 서로를 넘나들고 동물과 식물의 모습으로 서로의 형태를 바꾼다. 우리 글자 모양이 그렇듯 똥은 땅의 변형이었다. 내 몸은 땅에서 왔고 그래서 땅에서 기른 작물을 먹는다. 그리고 몸은 먹은 작물을 다시 똥으로 만든다. 나는 당연히 그 똥을 다시 땅에 돌려줘야 한다. 그건 아주 오래된 약속이었다. 식물과 동물 간에 반드시 지켜야 할 임무이고 규칙이었다.

그런데 그 엄정한 순환 고리를 지금 내가 깨고 있다. 땅으로 돌아가지 못한 똥은 천덕꾸러기가 되어 차 속에 실려 어딘가로 끌려가고 똥을 받아먹지 못한 땅은 기운이 빠져 엉뚱하게 화학비료와 농약을 먹으면서 살아가야 한다. 똥을 재발견한 이후 변기에 물을 좍좍 내리면서 똥을 씻어 내는 것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똥은 호기성 발효를 하고 오줌은 염기성 발효를 한다’는 말을 기억해 오줌을 받아 뚜껑을 덮어 둬 보기도 했다. 봄날 똥을 국화 포기 곁에 묻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농사지을 땅도 없이 수세식 변소를 쓰는 내가 지속적으로 그런 짓을 할 도리는 없었다. 누군가가 나 대신(아마도 구청이나 시청이 될 테지) 그 순환을 책임져 주기만 한다면! 약속을 어기고 사는 죄책감을 씻어내 준다면! 기꺼이 비용을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서울에는 4곳의 종말처리장이 있고 난지처리장 한 곳에만 하루 3000t의 분뇨가 들어온다고 한다. t당 처리비용은 3만5000원이라고 한다. 나는 안타까워 자꾸만 물었다. 거름으로 쓰고 있지는 않나요? 일반 하수와 같이 물로 만들어도 찌꺼기가 남을 것 아닙니까?

일부를 지렁이 먹이로 쓰기는 하지만 ‘분뇨 케이크’를 만들어 소각하거나 해양 폐기를 하고 있다는 대답이다(그 이름을 케이크라 부르는 건 의미심장하다. 땅에 주는 맛있는 케이크가 되어야 하겠건만 불에 태우기 위한 케이크일 뿐이다). 그런데 그 케이크 속에는 중금속이 규정 이상 들어 있어 작물의 거름으로 도저히 쓸 수 없다고 한다. 내 똥은 이제 성분상 땅으로 환원할 수 없는 독소가 됐단다. 기껏 똥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게 됐더니, 가을바람이 삽상해도 내 마음은 무겁다. 우린 언제쯤 똥의 고유한 위엄을 되찾을 수 있나.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