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진영]“도청 이젠 안 한다”믿게 하려면

  • 입력 2005년 8월 8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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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이 과거에 저질렀던 불법 감청(도청) 사실을 고백하고 나온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지금껏 부인해 왔던 휴대전화 도청 사실이나 ‘국민의 정부’ 시절의 도청 사실을 시인한 결단을 높이 평가한다. 도청 근절의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고해성사는 같은 죄를 더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각오와 실천으로 연결돼야 한다. 도청문제에 관한 한 국민의 우려와 국가기관에 대한 불신이 매우 높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정부와 국정원은 이번 사건이 도청 근절의 계기가 되도록 특단의 노력을 해야 한다. 참여정부 출범 후 도청은 절대 없다는 국정원과 청와대의 주장을 국민이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첫째, 도청 사실과 관련자들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법적인 심판이 이뤄져야 한다. 이번 사건의 성격상 결국 특검 등의 도입이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특검이 설치되기 전까지라도 검찰은 국정원에 대한 압수수색과 관련자 수사를 통해 최대한의 수사 자료를 확보해야 한다. 특히 국정원의 도청이 소규모의 출장도청팀이던 미림팀뿐만 아니라 거대한 인력과 예산을 사용하여 통신 감청을 수행했던 과학보안국에 의해서도 이뤄졌는지 밝혀야 한다.

둘째, 도청된 내용이 사회적으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철저히 차단해야 한다. 도청 내용이 위력을 발휘한다면 도청에 대한 유혹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돈이나 권력을 얻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찰에 압수된 274개의 도청테이프 외에도 얼마나 많은 도청기록이 존재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도청테이프의 공개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란이 일고 있다. ‘알 권리’와 ‘사생활 및 통신비밀 보호’라는 두 가치 사이의 대립이다. 물론 국민 다수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취득한 내용일지라도 모든 것이 공개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는 실정법의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 논란이 어느 쪽으로 정리되느냐에 따라 대한민국에 있어서 국민정서와 법치주의 중 어느 쪽이 우위에 있는지가 판가름 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앞으로 상당 기간 한국정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셋째, 이번 사건의 정치적 활용은 절대 금물이다. 진실 규명을 가로막을 가능성이 크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비슷한 사건이 반복될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정원 고백의 정치적 의도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국정원이 도청 활동 종료 시점을 2002년 3월이라고 발표한 것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집권 세력이 이번 사건을 정치구도 재편의 계기로 삼으려 한다는 설도 떠돌고 있다. 이러한 의혹들이 힘을 얻는 쪽으로 상황이 전개되면 도청 근절의 기회는 사라지고 사회적 혼란과 불신만 가중될 것이다.

국정원은 이제 정말로 거듭나야 한다. 도청이나 정치사찰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국민이 믿을 수 있는 방법으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 그리고 국가의 안위와 관계되는 정보만을 수집 분석하는 진정한 국가정보기관으로 재편돼야 한다. 직원들의 의식구조와 행동도 바뀌어야 한다. 기관의 운영도 탈정치화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최근 국정원은 “이제 휴대전화 도청을 하지 않으니 합법적인 감청을 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 요청은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아직 ‘도청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감청 설비가 언제 도청 설비로 둔갑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도청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정진영 경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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