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성희]숨을곳 없는 ‘투명사회’

  • 입력 2005년 8월 8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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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라는 제목의 책을 접하고 잠시 의아해 한 기억이 있다. 투명하다니까 뭔가 부정부패가 없고 모든 것이 합법적으로 돌아가는 멋진 세상을 일컫는 말쯤으로 여겼는데, 내용을 살펴보니 투명해서 개인이 겪는 프라이버시 침해를 우려 섞인 시선으로 엮어 놓은 책이었다.

저자인 데이비드 브린의 논지는 이렇다. 집을 나서면 온통 감시카메라가 지켜보고,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된 개인정보는 언제나 노출될 위험이 있는 ‘투명사회’에서 인간이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옛날 사람들이 자유를 얻기 위해 피를 흘렸다면, 앞으로의 사람들은 자유의 대가로 사생활을 내놓아야 할지 모른다고 그는 경고했다.

정보사회의 부작용을 걱정하는 저자는, 그 대안으로 상호적인 투명성을 제안한다. 유리로 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생존에 걸맞은 항체(그는 ‘투명성·transparency 세포’라는 뜻으로 ‘T-세포’라고 명명)를 몸에 길러야 하는데, 이 항체로 면역된 개인은 더는 암호나 익명 속에 갇히지 않고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들을 역으로 감시하며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기술의 발전에 따르는 부작용은 결국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원형 감옥’처럼 한쪽만 훤히 들여다보이는 어설픈 투명성 또는 반투명성에서 초래된 것이며, 따라서 세상 전체가 훤해지면 정보사회의 부작용도 줄어든다는 것이다.

프라이버시 침해의 문제는 정보화 시대의 아킬레스건이다. 말 그대로 거미줄처럼 연결된 정보망에 나와 관련된 정보의 조각들이 흘러 다닌다. 원치 않는 상대에게 그 정보가 공개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기술은 계속 발전할 것이고, 정보는 점점 늘어나고, 정보를 분류하고 통합하는 기술 또한 세련될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프라이버시가 위기로 내몰릴 상황인데, 최근 여기에 정부의 불법 감청(도청)까지 가세하고 나섰다. 이른바 ‘X파일’로 촉발된 국가정보원의 도청 파문이 그것이다.

암호의 역사가 문자의 역사와 함께 가듯이, 엿듣기 역시 의사소통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그동안의 정보기관 행태에 비추어 보면 이번 국정원의 도청 사실은 어쩌면 그다지 새로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놀랄 일은 역대 정부의 거짓말이다. 안심하고 통화하라고 신문에 광고까지 낸 정부가 도청을 계속해 왔다는 게 밝혀지고, 도청은 없다던 시절의 도청 테이프가 무더기로 발견된 것은 충격이라기보다는 허탈감에 가깝다. 더욱이 그동안 눈부시게 진행된 정보화가 도청 기술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업그레이드하고 무수한 개인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했다고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하다.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나 그에 대항하던 민주화운동의 지도자나, 하나같이 도청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 보면서 새삼 권력의 속성을 읽는다.

도청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원형 감옥’으로 만드는 암적인 존재다. 그 자체로 불법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도청은 법을 파괴하고, 기본적인 인권을 파괴한다. 사람들 사이의 불신을 양산하고, 저급한 호기심을 부추기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해악을 낳는다. 따라서 도청이 자행되는 사회에서는 투명사회를 자유롭게 살도록 도와주는 항체인 ‘T-세포’만으로는 살아남기 힘들다. 좀 더 지독한 백신이 필요한 사회거나, 도저히 살기 힘든 사회일 것이 분명하다.

세계는 지금 정보사회의 양지를 넘어 투명사회가 드리울 그늘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보기술 강국이라는 한국은 과연 정부와 개인이 정보사회의 역습에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국정원의 도청 파문이 어떤 방향으로 마무리 지어질지 지켜봐야 알 일이지만, 이번 일이 불투명사회와의 고리를 끊고 튼실한 투명사회로 가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휴대전화를 손의 일부로 여기고, 인터넷을 학습장이자 놀이터로 삼는 우리의 다음 세대가 불법적인 인권 침해가 아닌 합법적인 프라이버시 침해를 염려하는 사치를 누리게 해 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정부가 디지털 휴대전화는 도·감청이 불가능하다는 등의 거짓말은 이제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소도 웃을 노릇이다.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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