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소나무 에이즈

  • 입력 2005년 4월 4일 1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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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숙종 때인 1100년부터 3년간 소나무의 병충해 피해가 극심했다. 나라에서는 벌레를 잡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고 불경을 외우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어느 날 임금에게 고한다. “저희들이 변변치 못하여 병충해를 막지 못하오니 원컨대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불초한 자를 물러가게 하소서.” 소나무가 시름시름 죽어가자 내각이 총사퇴 의사를 밝힌 것이다.

▷조선시대의 소나무 중시(重視) 정책은 치밀한 ‘계획 조림(造林)’으로 이어졌다. 조선백자 같은 고급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소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해야 한다. 왕실은 6개의 큰 소나무 숲을 조성하고 10년씩 돌아가면서 나무를 베어 궁궐에서 사용하는 도자기를 구워냈다. 소나무를 벌채한 곳에는 다시 어린 소나무를 심어 50년 후를 대비했다. 소나무를 귀하게 여긴 것은 효용가치 때문이다. 한옥은 소나무 목재가 없으면 건축이 불가능하며 가구, 생활용품, 농기구의 원자재도 소나무였다.

▷아이가 태어나면 솔가지로 금줄을 만들었고 송편과 다식(茶食), 송엽주를 즐기다가 죽어서는 솔밭 앞에 묻혔다. 평생 소나무와 인연 맺고 살아온 게 우리 민족이다. 소나무는 오감(五感)으로 느낀다고 한다. 소나무의 기품은 회화의 소재가 되고도 남음이 있고 바람과 소나무가 만나 빚어내는 솔바람 소리는 상큼한 정취로 가득하다. 머리를 맑게 하는 솔향기, 부드러운 감촉은 알싸한 맛과 더불어 소나무를 심미적 경지로 승화시킨다.

▷그런 우리의 소나무가 위기를 맞고 있다. 소나무 재선충이라는 1mm 크기의 벌레가 남녘부터 소나무 숲을 갉아먹으며 빠르게 북상하고 있다. 전염되면 모든 나무가 말라죽는 치명적인 해충이다. 얼마나 무서우면 ‘소나무 에이즈’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식목일을 맞아 나무 심는 일 못지않게 각별한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정부도 ‘내각 사퇴’까진 아니더라도 특단의 각오로 맞서야 한다. 소나무를 잃는 것은 곧 우리의 정체성을 잃는 것 아닌가.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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