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72>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1월 31일 18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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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우리 군사는 거의가 모진 싸움에 지고 여러 날 쫓겨 온 터라 아직 제대로 기력을 되찾지 못했소. 머릿수가 적보다 다소 많다 해도 승세를 타고 덤비는 초군의 사나움을 견뎌낼지 걱정이오. 거기다가 적은 벌써 50리 밖에 와 있다는데, 이제 갑자기 뛰어나가 어디서 지리(地利)를 구한단 말이오?”

한왕이 한신을 믿지만 그래도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한신이 자신 있게 받았다.

“방금 대왕께서 물으신 바가 바로 우리만의 지리가 됩니다. 적도 틀림없이 대왕처럼 헤아리고 우리가 형양 성안에서 농성하리라고 여길 것입니다. 또 적장도 간세(奸細)를 풀어 우리가 성안에 꼼짝 않고 틀어박혀 있음을 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갑자기 그 뜻하지 아니한 곳으로 뛰쳐나가[출기불의] 무섭게 들이치면 그 어떤 지리가 그보다 더 우리에게 이로울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급히 장수들을 불러 모으게 했다.

“들어라. 초나라 군사는 우리가 성안에서 농성전(籠城戰)을 벌일 것으로 알고 무턱대고 달려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성을 나가 불시에 그들을 들이치려 한다. 여러 장수들은 일각(15분) 이내에 각기 이끄는 군사를 모아 나를 따르도록 하라. 병참도 장비도 군량도 필요치 않다. 갑주와 단병(短兵)이면 넉넉하니 무슨 일이 있어도 군사를 모으는데 일각을 넘기지 말라!”

말뿐이 아니었다. 한신 자신도 칼 한 자루에 걸친 갑주 그대로 말위에 뛰어올라 본부 인마를 재촉했다. 그리고 일각도 안돼 3000인마를 끌고 형양성을 나가면서 뒤따르는 장수들에게 소리쳤다.

“우리가 적과 맞부딪칠 곳은 경현(京縣)과 삭정(索亭) 가운데의 들판이 될 것이다. 이번에는 우리가 속도와 기세로 적을 친다. 단번에 적을 쳐부수어 수수(휴水)의 수모를 씻자!”

경현은 형양현 동남 20리에 있던 현이고, 삭정은 성고(成皐) 동쪽의 대삭성(大索城)을 가리킨다고 한다. 따라서 한신이 정한 싸움터는 대략 형양성 동남 20리 남짓 되는 벌판이었다.

그때 용저와 종리매가 이끄는 초나라 군사들은 1000리가 넘는 길을 싸움다운 싸움 한번 없이 달려온 터라 한껏 마음이 풀어져 있었다. 옹구에서 한 갈래 한군(漢軍)이 기다린다고 들었으나 그들이 이르기도 전에 서족으로 달아나 버렸고, 곡우에서도 그랬다. 모두 겁을 먹고 관중으로 달아났거나, 형양에 남았다 해도 성안에 깊이 틀어박혀 관중(關中)에서 구원이 오기만을 기다릴 줄 알았다.

떠날 때 범증이 한 당부도 용저와 종리매를 억눌러 장수로서의 헤아림을 어둡게 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유방이 함곡관으로 들기 전에 따라잡아야 할 것이오. 이번에는 반드시 그 목을 얻어 천하의 형세를 결정지어야 하오!”

범증은 그렇게 서둘기만을 당부했을 뿐 그동안 유방이 끌어 모을 수 있는 군사적 잠재력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용저와 종리매가 원래 그리 용렬한 장수가 아니었으나, 그런 범증에게 내몰려 그들은 비탈을 구르는 바위처럼 참담한 패배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천릿길을 열흘이나 밤낮 없이 내달려 지친 군사를 며칠이나 쉬며 기다리고 있는 적의 대군 앞으로 사정없이 몰아댄 결과였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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