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도 확인된 ‘무역국가’ 한국의 체력
반도체 경기와 원화 약세가 총액 끌어올려
국내 기여와 확산에선 성장 직접엔진 아냐
기록이 경제 전반에 퍼지는 구조 만들어야
허정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2025년 한국의 총수출이 사상 처음으로 7000억 달러(약 1004조 원)를 넘어섰다. 글로벌 고금리 기조와 지정학적 갈등, 보호무역의 확산이라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 이뤄낸 성과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특히 대미 관세 협상을 둘러싼 불확실성과 긴장이 지속됐던 상황을 감안하면, 연말에 이런 숫자가 가능할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기록은 한국 경제의 대외 적응력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결과다.
하지만 수출 7000억 달러는 단순한 도착점이라기보다, 한국 경제가 어떤 구조 위에서 이 성과를 만들어 냈는지를 되묻는 출발점이어야 한다. 수출 규모가 커졌음에도 성장의 체감은 크지 않고, 고용과 투자로의 파급 역시 과거만큼 뚜렷하지 않다는 문제 제기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수출이 흔들릴 경우 환율과 금융시장을 중심으로 경제 전체가 크게 불안정해진다는 점에서, 수출의 중요성은 여전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숫자 자체보다는 그 숫자가 만들어진 구조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성과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수출을 하나의 숫자가 아니라 세 가지 기준으로 나눠 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총액, 둘째는 수출이 국내 경제에 남기는 국내 기여도, 셋째는 그 성과가 경제 전반으로 퍼지는 확산 측면이다. 이렇게 나눠 보지 않으면 7000억 달러라는 숫자는 과도한 낙관이나 불필요한 비관을 동시에 낳기 쉽다.
수출 총액만 놓고 보면 7000억 달러는 분명 상징적이다. 세계 교역질서가 빠르게 재편되는 와중에도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했고, 연간 기준 무역흑자도 기록했다. 이는 한국 경제가 여전히 외형상 ‘무역국가’로서의 체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총액의 확대가 곧바로 국내 경제의 활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기준인 국내 기여도를 보면, 오늘날 수출은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23년에 발표한 부가가치무역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총수출 1달러 가운데 0.6∼0.7달러 정도만 국내에서 창출된 부가가치로 귀속된다. 수출 규모가 커질수록 국내에 남는 몫도 늘어나지만, 그 증가 폭은 총액의 확대와 동일하지 않다. 이 때문에 수출이 늘었음에도 성장과 고용의 체감이 약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이다.
셋째는 확산의 경로다. 최근의 수출 증가는 소수 대기업과 특정 품목에 상대적으로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로 인해 통계상 성과와 달리 중소기업과 지역경제가 느끼는 체감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수출의 외형과 국민경제 사이의 거리가 이전보다 멀어졌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출의 기능 변화라는 관점을 함께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과거에 수출은 성장의 직접적인 엔진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수출은 점점 더 경제의 하방을 지탱하는 안정장치에 가까운 역할을 하게 됐다. 수출이 늘어도 성장 체감은 제한적인 반면, 수출이 흔들릴 경우 환율과 금융시장을 중심으로 경제 전반의 불안이 빠르게 증폭되는 구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2025년의 무역흑자는 이러한 수출의 경제 안정화 기능을 잘 보여 준다. 외화 유입 여력이 확보되면서 원화 약세와 글로벌 금융 변동성 속에서도 대외 신뢰를 유지하는 완충장치로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즉, 오늘날 수출은 성장률을 직접 끌어올리는 변수라기보다 환율, 금융시장, 정책 여력을 떠받치는 거시적 안전핀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안정 기능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도 중요하다. 이번 7000억 달러 수출은 가격, 물량, 환율, 품목 구성이라는 여러 요인이 결합된 결과다. 특히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가격 사이클의 회복과 원화 약세라는 두 요인은 수출 총액 확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특정 품목과 환율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고, 수입 물가와 생산비용 악화를 통해 국내 경제에 부담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 요컨대 이번 수출이 제공한 경제 안정 기능은 지속 가능한 구조라기보다는 외생적 조건에 의한 것이었다.
수출 7000억 달러는 분명 역사적인 성취다. 그러나 이 성과를 숫자의 경이로움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수출 총액의 확대와 함께 국내 기여도를 높이고 수출 성과가 경제 전반으로 확산되는 구조를 만들지 못한다면 숫자는 커져도 체감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 괴리는 성장과 고용, 그리고 정책 효과에 대한 인식을 점차 왜곡시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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