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1년 장도영 법정구속

  • 입력 2004년 11월 1일 18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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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사(革命史)에는 혁명세력의 지근거리에 있었으나 반혁명 분자로 몰려 고초를 당하는 인물들이 곧잘 발견된다. 5·16군사정변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장도영(張都暎·81·미국 거주)씨도 그런 경우다. 그는 정상적인 사회에선 훌륭한 관리자일 수 있었지만 난세에는 박정희(朴正熙)와 같은 인물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유능했지만 성격이 온순하고 술도 잘 못했다. 여섯 살 위이지만 부하였던 박정희를 가까이 한 것이 동정심 때문이었다고 회고록에서 고백한 그는 박정희가 좌익 의혹을 받을 때마다 애써 누명을 벗겨주고 보직을 주었던 은인이었다.

그가 쿠데타 음모를 알았는지, 혹은 사전 내통하기까지 했는지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린다. 혹자는 그가 박정희를 잡아 넣을 만한 배짱이 없었고 ‘혁명이 성공하면 지도자로, 아니면 말고’라는 양다리 걸치기식 처신을 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부패정부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했던 당시 사회 분위기를 따져 보면 기존 기득권 세력의 중심에 있었던 그는 ‘안정 속의 개혁주의자’였다. 시대는 그런 신중함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5·16군사정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국방부 장관, 계엄사령관 등을 겸직하면서 권력을 한손에 쥔 것 같았다. 그러나 피가 뜨거웠던 젊은 혁명가들은 장도영이 혁명에 무임승차한 뒤 권한만 행사하려 한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혁명에도 의리가 있다”며 달랬던 박정희도 소용없었다. 마침내 1961년 6월 30일 밤, 박정희와 마지막 독대를 마친 그는 7월 3일 최고회의 의장을 사퇴하자마자 가택연금 신세가 된다. 그리고 4개월 뒤인 61년 오늘, 반혁명 세력의 수괴로 법정 구속된다.

그는 무기징역까지 선고받았으나 이듬해 형 면제로 석방되어 서른아홉에 미국 유학이라는 형식으로 정치적 망명길에 오른다. 학부부터 7년 만에 정치학박사 학위를 취득해 군인에서 학자로 직업을 바꾼다.

“이제 돌아와도 괜찮다”는 권유에도 “박 정권 아래서는 안 산다”고 거절했다는 장도영. 자신을 내친 부하(박정희) 역시 부하의 총탄에 쓰러져 죽고, 도망치듯 고향을 떠났던 자신은 살아남아 타국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혁명이 비정하다고 하지만 한 시대를 바꾸고 새 질서를 만드는 세력에 의리와 정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으리라.

속절없이 흘러버린 시간 앞에서, 이제 여든 생을 지나는 그는 무정했던 세상 인심에 얼마나 무디어졌을까.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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