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재호/안희정이 더 실망스러운 이유

  • 입력 2003년 12월 16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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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대선자금을 받은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과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인 안희정씨. 두 사람은 한국 사회의 엘리트 충원 구조가 이원화(二元化)돼 있음을 잘 보여준다. 최씨는 제도권 출신이고 안씨는 운동권 출신이다. 서로 다른 경로를 택했지만 엘리트군(群)에 진입하는데 성공했고 불법 대선자금으로 함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그동안 엘리트층에 낄 수 있는 확률은 제도권 출신이 더 높았다. 민주화보다 산업화가 급했기 때문이다. 우선 먹고살아야 했으므로 테크노크라트에 대한 수요가 더 컸던 것이다. 민주화되면서 이런 경향도 변했다. 노 정권에선 오히려 역전된 느낌을 줄 정도다.

양자 사이의 관계도 달라지고 있다. 권위주의 시절엔 서로 불신하고 반목했다. 운동권 눈에 제도권 출신은 역사의식도 없이 일신의 안락을 좇는 속물로 보였다. 제도권이 보기에 운동권은 개인의 권력욕을 사회적 동기(動機)로 포장한 위선자들 같았다.

민주화와 함께 서로를 보는 눈도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화해’라고 하기엔 이르지만 적어도 각자가 사회발전에 나름대로 기여했다고 서로 인정해 주는 정도는 됐다. 민주화가 우리에게 준 가장 의미 있는 진전 중의 하나다.

두 세력은 결국 수렴되고 재편될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 수렴은 헌법의 정신 위에 함께 서는 것이다.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에 관한 한 차이가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민주 대 반(反)민주가 아닌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 예를 들면 이라크 파병, 재산세 인상, 사회복지 확대, 고교 평준화와 같은 쟁점들을 놓고 경쟁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보수, 진보로 재편되어야 한다. 지역할거주의와도 결별해야 한다. 내년 총선의 시대사적 의미는 여기에 있다.

제도권과 운동권이 수렴과 재편을 통해 보편적 가치로서의 보수와 진보로 거듭나야 할 시점에 우리는 부패의 덫에 걸려 있다. 제도권은 ‘차떼기’를 했고, 운동권은 개혁을 말하면서 뒤로는 구악(舊惡) 뺨치게 돈을 받았다. 제도권과 운동권이 부패를 통해 동화, 수렴되어야 한다면 이보다 더 서글픈 아이러니는 없을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우리를 실망케 하는가. 노 대통령의 셈법에 따르면 안씨의 죄는 최씨의 10분의 1 이하일 터이다. 그러나 죄의 크기와 실망의 크기는 다르다. 안씨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 순환의 한 통로를 막아버렸다. 전체 운동권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줌으로써 운동권 출신의 엘리트군 진입을 어렵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제도권이 운동권에 갖기 마련인 정신적 부채(負債)마저 날려 버렸다. 안씨가 더 실망스러운 이유다.

엘리트는 순환되어야 한다. 이탈리아의 사회학자 파레토는 “엘리트층 내부에 새로운 피의 순환이 부족할 때 엘리트층의 위치는 위협 받게 된다”고 했다. 운동권이 다시 운동권의 영역으로 물러나는 것은 사회의 균형 발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원한 재야(在野)보다는 참여하는 재야가 더 바람직하다. 안씨는 “5·16 때 군인들이 군복 입고 한강 다리를 건넜지만 우리는 노사모와 함께 노란 목도리를 매고 한강을 건넜다”고 했다. 그 여정(旅程)의 끝이 고작 여기인가.

이재호 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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