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생의 이름은 우고 디폰테.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멀지 않은 코르솔리에 살았고 양치기였습지요. 제 나이요? 어머니가 저를 낳으신 게 주후(主後) 1520년 언저리였지 싶습니다요.
사는 거요? 쉽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흑사병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형님은 제게 파이 한 쪽 제대로 주질 않았습니다요. 집을 나와 돌아다니다 천사를 만났습지요. 진짜로 강림하신 천사님이 아니고, 나무꾼의 딸인 엘리사베타, 제 첫사랑이자 유일한 마누라 말입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엘리사베타는 빽빽 우는 핏덩이를 던져놓고 저세상으로 가버렸습니다요. 제 어미를 꼭 닮지만 않았다면 내버리고 말았을 겁니다요. 촌스러운 ‘다요’ 소리 집어치우라굽쇼? 알겠습니다요, 아차 젠장맞을, 이놈의 혀!
아이고 혀야, 망발을 용서하려무나, 축복받을지어다. 왜냐굽쇼? 저를 먹여 살린 게 바로 혀였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코르솔리의 영주인 페데리코 공의 ‘시식(試食)시종’으로 들어가게 됐거든요. 그 뒤로 저도, 또 사과 같이 붉은 뺨을 가진 제 딸도, 굶는 일은 없었죠.
시식시종이 뭐냐고요? 요즘 TV 사극에 나오는 ‘기미(氣味)’ 상궁을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독이 있나 없나, 미리 맛보는 역할이었습죠.
좋았겠다고요? 속 모르는 말씀. 음식맛을 잘 가려낸다고 시식시종이 된 줄 아십니까. 의심 많고 잔인한 페데리코가 제 선임자를 죽여 버리겠다고 결심한 차에 제가 눈에 띄었을 뿐입니다. 그 뒤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겼지요. 페데리코의 적이 넣은 독에 죽을 뻔하기도 했고(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제가 지레 독을 먹은 줄 알고 게워낸 거라고도 합니다만) 심기가 불편한 페데리코가 제 머리통을 부숴버리려 한 적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나저나, 요즘 한국에서도 음식얘기가 ‘뜬다’고 하더군요. 중세의 음식을 맛보고 싶은 분, 이 책을 펼쳐 보시지요. ‘처음 맛본 백조 가슴살, …아아, 이럴 수가! 깨무는 순간 봄날의 계곡처럼 감미로운 육즙이 혀를 타고 흘러내렸다. 누군가가 행복에 겨운 신음소리를 흘렸다. 바로 나였다!…’ 제 사설을 따라가시다 보면, 독자께서도 신음소리를 흘리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할걸요.
모르긴 해도 책 속에 생생하게 묘사되는 제가 살던 시대의 풍경에도 눈을 빼앗기지 않기는 힘들 겁니다. 불길처럼 퍼지는 페스트, 악마숭배 집회의 광기, 맹수가 물어뜯는 처형장면 등 영화처럼 실감날걸요. 그도 당연하죠. 이 소설을 쓴 사람이 영화 시나리오 작가니까요. 할리우드 영화 ‘아이들이 커졌어요’인가 뭔가도 그 양반 작품이라나.
저런 저런,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 글이 중세에 씌어진 제 진짜 자서전인줄 아셨다고요? 순진하시기는… 아무리 현대인의 가필을 거쳤다고 해도 어떻게 이토록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현대식 문체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하긴 옮긴이마저 후기에서 이 책을 진짜 중세 텍스트라고 믿는 눈치를 보이더라고요. 진짜로 순진한 건지, 지은이를 흉내 내서 슬쩍 눙치는 건지….
아니, 진짜 중세 책으로 믿으신다고요? 정 그러시다면 저자의 웹사이트인 ‘피터엘블링 닷컴’(http://www.peterelbling.com)에 한번 들어가 보시죠. 이 책의 원제목은 ‘The foodtaster’(2002년) 입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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