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시식시종'…“伊 맛이야”

  • 입력 2003년 10월 31일 17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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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식시종’의 작가 피터 엘블링은 경건함과 떠들썩한 일탈이 교차하는 중세시대 귀족과 평민의 일상을 음식이라는 코드를 통해 유쾌하게 복원해 냈다. 그림은 16세기 화가 피터 브뢰겔의 ‘춤’. 동아일보 자료사진

‘시식시종’의 작가 피터 엘블링은 경건함과 떠들썩한 일탈이 교차하는 중세시대 귀족과 평민의 일상을 음식이라는 코드를 통해 유쾌하게 복원해 냈다. 그림은 16세기 화가 피터 브뢰겔의 ‘춤’. 동아일보 자료사진

◇시식시종/피터 엘블링 지음 서현정 옮김/419쪽 8500원 베텔스만

소생의 이름은 우고 디폰테.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멀지 않은 코르솔리에 살았고 양치기였습지요. 제 나이요? 어머니가 저를 낳으신 게 주후(主後) 1520년 언저리였지 싶습니다요.

사는 거요? 쉽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흑사병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형님은 제게 파이 한 쪽 제대로 주질 않았습니다요. 집을 나와 돌아다니다 천사를 만났습지요. 진짜로 강림하신 천사님이 아니고, 나무꾼의 딸인 엘리사베타, 제 첫사랑이자 유일한 마누라 말입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엘리사베타는 빽빽 우는 핏덩이를 던져놓고 저세상으로 가버렸습니다요. 제 어미를 꼭 닮지만 않았다면 내버리고 말았을 겁니다요. 촌스러운 ‘다요’ 소리 집어치우라굽쇼? 알겠습니다요, 아차 젠장맞을, 이놈의 혀!

아이고 혀야, 망발을 용서하려무나, 축복받을지어다. 왜냐굽쇼? 저를 먹여 살린 게 바로 혀였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코르솔리의 영주인 페데리코 공의 ‘시식(試食)시종’으로 들어가게 됐거든요. 그 뒤로 저도, 또 사과 같이 붉은 뺨을 가진 제 딸도, 굶는 일은 없었죠.

시식시종이 뭐냐고요? 요즘 TV 사극에 나오는 ‘기미(氣味)’ 상궁을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독이 있나 없나, 미리 맛보는 역할이었습죠.

좋았겠다고요? 속 모르는 말씀. 음식맛을 잘 가려낸다고 시식시종이 된 줄 아십니까. 의심 많고 잔인한 페데리코가 제 선임자를 죽여 버리겠다고 결심한 차에 제가 눈에 띄었을 뿐입니다. 그 뒤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겼지요. 페데리코의 적이 넣은 독에 죽을 뻔하기도 했고(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제가 지레 독을 먹은 줄 알고 게워낸 거라고도 합니다만) 심기가 불편한 페데리코가 제 머리통을 부숴버리려 한 적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나저나, 요즘 한국에서도 음식얘기가 ‘뜬다’고 하더군요. 중세의 음식을 맛보고 싶은 분, 이 책을 펼쳐 보시지요. ‘처음 맛본 백조 가슴살, …아아, 이럴 수가! 깨무는 순간 봄날의 계곡처럼 감미로운 육즙이 혀를 타고 흘러내렸다. 누군가가 행복에 겨운 신음소리를 흘렸다. 바로 나였다!…’ 제 사설을 따라가시다 보면, 독자께서도 신음소리를 흘리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할걸요.

모르긴 해도 책 속에 생생하게 묘사되는 제가 살던 시대의 풍경에도 눈을 빼앗기지 않기는 힘들 겁니다. 불길처럼 퍼지는 페스트, 악마숭배 집회의 광기, 맹수가 물어뜯는 처형장면 등 영화처럼 실감날걸요. 그도 당연하죠. 이 소설을 쓴 사람이 영화 시나리오 작가니까요. 할리우드 영화 ‘아이들이 커졌어요’인가 뭔가도 그 양반 작품이라나.

저런 저런,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 글이 중세에 씌어진 제 진짜 자서전인줄 아셨다고요? 순진하시기는… 아무리 현대인의 가필을 거쳤다고 해도 어떻게 이토록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현대식 문체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하긴 옮긴이마저 후기에서 이 책을 진짜 중세 텍스트라고 믿는 눈치를 보이더라고요. 진짜로 순진한 건지, 지은이를 흉내 내서 슬쩍 눙치는 건지….

아니, 진짜 중세 책으로 믿으신다고요? 정 그러시다면 저자의 웹사이트인 ‘피터엘블링 닷컴’(http://www.peterelbling.com)에 한번 들어가 보시죠. 이 책의 원제목은 ‘The foodtaster’(2002년) 입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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