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우리 시대의 조급증환자들

  • 입력 2001년 4월 20일 18시 35분


아프리카에는 '누영양' 이라는 소(牛)과 동물이 있다. 큰 무리를 지어 사는데 어찌나 성미가 급한지 바람결에 덤불이 조금만 흔들려도 사자가 나타난 것으로 착각하고 내달리기 시작한다. 한 마리가 달리면 수천 마리가 영문도 모른 채 앞서거니 뒷서거니 전속력으로 그 지역을 빠져 나가는데 한번 시작하면 몇 시간동안 수십㎞를 달리고서야 기진맥진해서 멈춘다고 한다. 사자는 바로 이때를 노린다고 하던가.

세상이 모두 조급증에 빠져 좌불안석이다. 여유를 숭상하던 양반문화 자손들의 모습은 어느 한구석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고 사람들은 맹목적적으로 달리는 누영양의 모습을 닮고 있다. 한 사람이 뛰면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불안해 함께 달려야 하고, 앞서지 못한다면 최소한 그 사람의 발목이라도 잡아야 마음을 놓는다.

▼사회의 병은 깊어만 가고▼

시시각각 현재 위치에서 통화를 해야 불안을 떨쳐낼 수 있는 사람들은 휴대전화로 무장을 하고서야 집을 나설 수 있다. 한국인 1인당 휴대전화 사용시간이 세계 최고라는 기록은 이 시대를 우리가 얼마나 급하게 살고 있는지를 증명한다.

과외를 덜 시키면 뒤진다는 느낌에 불안한 학부모는 잠 못이루는 밤 을 접고 경쟁적으로 교육이민길에 오른다. 우리 사회에서 단기간내 신분의 수직상승을 약속하는 유일한 길이 좋은 대학 졸업하는 것이라는 믿음은 조급증 사회를 구축하는 원자재에 해당한다.

그러나 개인들의 조급증이야 시행착오가 있다 해도 피해가 가정안에서 끝나는 정도지만 정부가 조급하면 태풍만큼이나 큰 해악을 국민에게 떠넘긴다는 점에서 보통 문제로 볼 수 없다. 불행하게도 우리 정부는 이미 조급증의 병세가 심화된 전형적 증세를 보이고 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가 유력신문사의 비판에 분노한 정부의 조급증이 행정력의 이름을 빌어 집행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논리적 모순으로 가득 찬 신문고시를 공정위가 필사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비판적 언론과 서둘러 한 판 승부를 내고 싶어하는 정부의 조급증을 여러 군데서 엿볼 수 있었다. 정권의 조급증은 임기말이 되면서 더 심화될 것이고 그로인한 후유증은 정부 스스로 수습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다.

구조조정 문제만해도 그렇다. 수십년 내려온 경제적 병폐의 치료를 2월말까지 끝내겠다고 국민앞에 큰소리할 때도 이 정부의 조급증은 싹수가 확실히 보였다. 그래놓고 막상 약속날이 다가오자 '조조정의 틀이 완비됐으니 이제부터는 기업자율의 상시체제로 간다'고 했다. 그로부터 두 달이 다 된 오늘, '제는 안해도 되는'구조조정의 짐을 벗어 던진채 환하게 안도하는 장관들의 표정말고 세상에 달라진 게 무엇인가.

철도도 없이 고속도로 하나 덜렁 깔아놓은 채 '세계의 허브공항' 은 탄생했고 황급하게 작업을 시작한 수조원짜리 새만금사업은 뒤늦게 대통령이 '생각만해도 골치가 아픈 존재' 로 전락했다. 천문학적 결손을 일으킨 의약분업도 조급증이 일으킨 대표적 합병증에 해당하지만 세상이 바뀔 것처럼 요란했다가 불과 1년도 못가 발병이 나고 만 남북관계도 과연 조급증과 관련없는지 따져볼 대상이다.

▼정부가 신뢰잃으면 조급해져▼

이런 저런 사례들의 공통점이라면 전현직 대통령들 모두가 뒤뜰 은 생각않은 채 당대에 기어코 무언가 해야 한다는 조급증에 걸려 만들어낸 작품들 때문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당신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고 지나가면 그만일수도 있겠지만 그 많은 시행착오 때문에 국민은 허리가 끊어질 지경의 세금부담을 해야 하고, 분열된 국론으로 경제는 더욱 어려워 지고 있다는 사실을 왜 외면하는가. 조급하게 작정하고 밀어붙이다가 안되면 원위치로 돌려 보내고, 그래서 외국인들은 우리 정부를 '시계추 정책의 산지(産地)' 라고 놀리지만 그런 정도로 자극받을 위인들은 아닌 것 같다.

미래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할 때 사람들은 서두르게 되고 조급증은 구제역처럼 번진다. 국민은 정책을 보고 미래를 설계하지만 정부가 신뢰를 잃을 때 미래예측은 사치스런 기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순간 정부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요즘들어 한결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국가 전체의 조급증이라고 충언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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