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준비된 대통령’ 맞나 ?

  • 입력 2001년 4월 11일 18시 26분


97년 대선에서 김대중(金大中·DJ)후보측이 내놓은 ‘준비된 대통령’ 슬로건은 기발했다. 그러잖아도 졸지에 당한 IMF위기로 황망하던 터에 ‘준비된 대통령’은 국민의 귀에 쏙 들어올 만했다.

그러나 김대통령 집권 3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어떤가. ‘준비된 대통령’의 ‘준비된 개혁’에 대한 기대보다는 잘못된 개혁 때문에 생기는 혼란으로 불안해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한다. 어려운 만큼 원칙과 방향도 확고해야 하고 준비도 치밀해야 한다. 개혁의 주체는 도덕적 힘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DJ정권의 개혁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다.

▼개혁, 도덕적 힘이 있어야▼

우선 준비부족을 들 수 있다. 개혁은 거저 되는 게 아니다. 치밀하고 정교한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비용이 든다. 어느 곳에 얼마만한 돈이 들 것이라는 계산을 정확히 하고 그에 따른 재원조달책이 미리 마련돼야 한다. ‘일을 하다보니 돈이 많이 드네요’라는 식으로는 안된다.

시간도 든다. 혁명은 하루아침에 되지만 개혁은 그렇지 않다. 이해당사자와 대화와 설득을 통해 합의를 구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개혁의 부작용은 최소화하고 효과는 극대화할 수 있다. 아무리 개혁성이 풍부하고 추진력이 강한 장관이라도 장관 혼자 개혁을 성공시킬 수는 없다. 명분과 당위성만 내세워 단시간 내에 뭔가 이뤄내야겠다는 개혁강박증에 사로잡혀 일을 그르친 예는 교육개혁과 의료개혁으로 족하다.

개혁에는 일관된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재벌개혁의 핵심인 현대건설을 억지로 연명시켜가는 과정을 보면 원칙을 찾아볼 수 없다.

개혁은 힘이 있어야 한다. 도덕적 힘이다. 우선 개혁주체들이 도덕적으로 자신이 있어야 한다. 김영삼(金泳三·YS)대통령의 ‘문민개혁’도 전반기에는 국민의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후반에 들어 아들 김현철씨 비리가 터지면서 정권의 도덕적 힘이 빠져버리자 개혁은 물거품이 돼버렸다.

그렇다면 국민의 정부는? 작년 말 김대통령과 민주당 최고위원들의 간담회 자리에서 바로 김현철씨 얘기가 나왔다. 강직한 정동영(鄭東泳)의원의 입바른 소리였다. “국민의 눈엔 우리 당 권노갑(權魯甲)최고위원이 YS정권 때의 김현철처럼 투영되고 있습니다.” ‘김현철처럼…’이라니 이게 무슨 뜻인가. YS정권시절 김현철씨와 그 주변 인물들이 저지른 것과 같은 갖가지 비리관련 의혹이 권최고위원 주변에 구름처럼 몰려 있어 그것이 언제 소나기가 되어 쏟아질지 모른다는 경고가 아니었을까.

이 경고를 듣고 물러났던 권씨가 꼭 3개월 만에 정치 일선에 복귀했다. 그가 새로 문을 연 사무실 개소식에는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권씨의 복귀 무렵 이뤄진 개각 및 여권개편으로 그와 가까운 동교동계 구주류인사들이 다시 요직을 차지했다. 비리에 연루된 의혹 때문에 물러났던 장관이 청와대 핵심 자리로, 무리한 교육개혁으로 교사들의 지탄의 대상이 됐던 전교육부장관이 당 정책위의장이 됐다. 이를 두고 한 야당 의원은 국회대정부질문에서 ‘동교동 독재시대’라고 비난했다. 아무튼 DJ정권 남은 임기 동안 이른바 개혁주도세력은 DJ직계의 동교동계 사람들일 것이 분명하다. 이들한테서 얼마나 센 개혁추진의 힘이 나올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상한 개헌론 공방▼

더욱 중요한 것은 개혁의 방향이다. 아직 개혁해야 할 과제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벌써부터 정권재창출에 쫓겨 개혁이 그 방향을 상실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운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요즘 잇따라 터져 나오는 개헌론이 대표적이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김대통령이나 민주당대표는 개헌추진 의사도, 계획도 없다면서 개헌론을 자제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청와대나 민주당에서는 개헌론이 계속 나오고 있다. 당 총재나 대표의 지시가 먹혀들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정권재창출 시나리오에 의한 역할분담 작전인지 모를 일이다.

정권재창출을 위한 정지작업으로 개헌론을 동원한 기존 정치판 흔들기와 함께 비판 언론에 대한 옥죄기도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정부가 언론개혁을 얘기하면서 비판기사를 많이 쓴다는 이유로 출입기자의 출입을 봉쇄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상황이고 보면 이제 개혁은 정말 엉뚱한 방향으로 멀어져 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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