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리포트]밸리신화 뒤에 美정부 있다

  • 입력 2000년 7월 10일 18시 44분


실리콘밸리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스탠퍼드대와 함께 가장 많이 등장하는 회사는 휴렛 팩커드와 페어차일드이다. 지금도 이 회사 출신들은 실리콘밸리 네트워크의 큰 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페어차일드가 60년대 획기적인 반도체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미 공군이 미사일 유도관련 제품을 구매해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미 정부와 정부관련 연구소들은 이 회사의 가장 중요한 고객이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정부 조달 예산의 35%를 중소기업간 경쟁으로 조달하도록 법제화해 시행하고 있다.

스탠퍼드대 기술이전실은 현재 약 1500여건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98∼99 회계연도에 339개 특허기술로 4000만달러의 로열티 수입을 올렸고 17개 신생기업으로부터 기술이전 대가로 주식을 받았다. 스탠퍼드대의 연구성과가 활발한 것은 학교운영 예산의 40%를 점하는 정부의 연구용역 수입 때문이다. 미 정부의 대학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비 지원이 없었다면 벤처의 싹이 될 획기적인 기술들이 대학에서 나올 수 없었다.

실리콘밸리가 속한 캘리포니아주는 미국에서도 가장 기업을 경영하기 좋은 법과 제도를 갖고 있다. 특히 미국의 파산법은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했다가 실패한 기업가들을 전과자로 만들지 않고 새로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경쟁사로 옮기지 않겠다고 고용계약서에 서명했다 해도 캘리포니아에서는 아무 제약없이 경쟁사로 직장을 옮기는 것이 법적으로 보장된다.

실리콘밸리에 관한 기업 사례나 언론 기사에서 ‘정부’라는 단어는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실리콘밸리는 정부 주도가 아닌 대학과 산업계 리더들의 비전에 의해 만들어졌고 철저한 시장 원리에 의해 자생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정부의 역할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장에 정부가 나서지 않는다고 해서 역할이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센터의 헨리 로웬 소장은 “미국 정부는 규칙제정자(rule maker)로서, 상품 구매자로서, 연구개발자금 지원자로서 실리콘밸리의 토양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다만 정부는 규칙을 정하고 심판 역할을 할 뿐 직접 경기자가 되지는 앉는다. 여러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가 경쟁적으로 벤처지원 정책을 추진하는 우리나라와 대조적이다.

우리나라는 실리콘밸리와 제반 여건과 역량이 다르기 때문에 벤처 육성에 대한 정부의 역할이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미국에서도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리서치트라이앵글처럼 정부 주도로 만들어져 성공한 첨단과학산업단지도 있다. 우리나라처럼 법적으로 벤처기업을 지정하는 일은 없지만 벤처기업들도 중소기업 지원 정책의 혜택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 벤처가 장기적으로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선 벤처정책 담당자들이 벤처를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과 패러다임을 가져야 한다. 벤처정책의 핵심은 벤처 생태계의 주역인 벤처기업가와 전문가 그룹을 키우고 경쟁과 시장원리에 의해 가장 우수한 것만 살아남는 제도와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즉 시장 창출과 민간의 활력을 활용하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벤처를 지원하는 것이다.

전체가 잘 되기 위해선 치열한 경쟁을 통해 누가 도태될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50%의 벤처가 망해야 전체 벤처가 발전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이 설득력있게 들린다.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미국 스탠퍼드대 객원교수)

ztbae@gsb.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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