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정만수/주유소 상표표시제 없애자

  • 입력 2000년 7월 10일 00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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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동아일보의 ‘석유시장을 파헤친다’ 시리즈와 ‘군 항공유 구매, 정유사에 바가지 썼다’ 기사를 보고 석유업계에 32년간 몸담아 온 사람으로서 국내 석유시장의 고질적인 탈법성을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지금처럼 운영되는 상표표시제(폴사인제)는 결과적으로 최종 소비자인 국민을 기만하는 제도이므로 마땅히 폐지돼야 한다. 92년 4월 실시된 폴사인제는 ‘소비자의 석유제품 선택권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마련됐지만 결국 정유사들의 시장점유율 확장장치로 전락했다. 더욱이 95년 이후 정유사들은 서로 폴 침탈행위가 절대로 불가능하게 ‘담합’해 왔다. 설사 한 정유사의 폴주유소가 무(無)폴주유소로 바뀐 뒤에도 이전의 폴은 ‘노비문서’처럼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때문에 주유소업자들은 자유시장 체제에서도 맘대로 폴을 바꿔달 수조차 없는 게 현실이다.

이렇게 특정 정유사의 폴주유소가 타사의 석유제품을 공급받지 못하게 하는 정유사들은, 하지만 자기네들끼리는 서슴없이 제품교환을 한다. 공정거래위원회 고시 하에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정유사들 사이의 제품교환은 엄밀히 말해 물류비용을 아끼기 위해 타사의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며 이는 마땅히 과세대상이다. 국세청은 주도면밀하게 정유사들 사이의 탈세 여부를 조사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정유사들은 당연히 원가절감 노력을 기울일 리 만무하다. 국제적 석유메이저들이 통상 원유 구입에 사용하는 헤징(가격위험 회피)을 하지 않는 것도 정유사 수지에는 아무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경쟁국에 비해 원유도입 단가가 비싸면 소비자 가격을 그만큼 올리면 그만이다.

물론 석유시장의 하부구조인 대리점과 주유소에도 문제는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많은 수의 대리점은 단지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정유사의 덤핑유 중개상으로 전락했다. 이들이 보유중인 탱크로리의 대부분이 특정 정유사의 표시가 없는 무도색 차량이라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또 일부 주유소들은 자구책을 넘어 지능적으로 여러 대리점의 덤핑유와 탈세유를 공급받아 소비자들에게 ‘짬뽕 기름’을 팔아치움으로써 폭리를 취하고 있는 실정이다.

석유정책을 주도하는 산업자원부의 무사안일주의도 시정대상이다. 최근 일련의 석유정책을 보면 산업자원부가 정유사의 뜻에 끌려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에너지경제연구원 등 석유정책의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연구소들도 정유사들을 두둔하는 경향이 역력하다. 막대한 자금력으로 석유시장을 주물러 온 정유사들의 행태에 비춰볼 때 적지 않은 로비가 관철됐다는 의혹을 지우기 힘들다.

결국 지금처럼 왜곡된 석유유통시장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정유사들 위주의 시장을 하루 빨리 소비자 위주로 재편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 선진국에서 일반화된 현물시장을 하루 빨리 도입하고 정유사가 휘어잡고 있는 석유 유통업과 정제업도 분리 운영돼야 한다.

정만수(전 한국주유소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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