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창업대상' 받은 구자경 LG 명예회장

  • 입력 2000년 7월 5일 18시 47분


<<구자경(구자경) LG 명예회장이 최근 선친인 구인회(구인회·69년 작고) 창업회장과 공동으로 한국경영사학회(회장 이건희·이건희 이화여대교수)가 수여하는 ‘뉴 밀레니엄 창업대상’을 받았다.

한국경영사학회는 94년부터 한국산업 발전과 사회봉사에 기여한 창업자에게 ‘창업대상’을 수여하고 있다. 창업대상은 그동안 김성곤(김성곤·쌍용그룹·75년 작고) 이병철(이병철·삼성그룹·87년 작고) 신용호(신용호·교보생명) 김향수(김향수·아남산업) 이기석(이기석·중외제약) 정주영(정주영·현대그룹) 창업자 등이 받았다.

서울 여의도 LG 트윈타워 32층 명예회장실에서 3일 구 명예회장을 만나 창업대상 수상 소감과 근황 등을 들었다.>>

―창업대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많은 상을 받았지만 선친과 함께 이 상을 받게 돼 무엇보다 기쁘게 생각합니다. 시대와 환경은 변해도 기업이 변함없이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은 바로 고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수상의 영광을 먼저 고객에게 돌리고 싶습니다. 아울러 창업회장과 저의 뜻을 잘 이해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LG의 발전에 공헌해 온 임직원 모두와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올해 75세인 구 명예회장은 95년 2월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LG 연암문화재단 등 공익사업을 챙기기 위해 1주일에 한번씩 회사에 출근한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후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결심한 것은 45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자 역할은 하되 직접적인 경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친께서도 강조하신 ‘한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는 말씀을 따른 것이기도 합니다. 대기업 회장이라는 고독하고 부담스러운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는 ‘이게 바로 삶의 여유라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회 공익사업 때문에 여전히 바쁘시다죠.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LG 복지재단, LG 연암문화재단, LG 연암학원의 일을 챙겨보기 위해 1주일에 한번 회사에 나옵니다. 사무실에 나오지 않을 때는 책도 읽고 고향 친구나 경영일선에서 은퇴한 재계 원로들과 만나 골프도 치고 산책을 합니다. 주말이면 충남 성환에 있는 연암축산원예전문대학의 농장으로 내려가 난도 가꾸고 가축도 돌보는데 흙을 만지고 자연과 가까이 하니까 아직 건강에는 자신이 있는 편입니다.”

―재계 인사들중 자주 만나는 분들은 누구신가요.

“은퇴 후에도 빠지지 않고 나가는 모임이 두 개 있는데 단오회와 진주중 동창회입니다. 단오날 결성돼 이름 붙여진 단오회는 선친께서 가깝게 지내온 두산 경방 등 그룹 회장들과의 친목모임입니다. 어언 40년이 넘었습니다. 오랜 지기인 경방의 김각중(金珏中)회장, 삼양사의 김상홍(金相鴻) 회장 등이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편입니다. 가장 흉허물없이 만나는 모임이 동창회입니다.”

―버섯연구에 몰두해 버섯박사가 다 되셨다는데 버섯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이라도 있습니까.

“‘한국에 버섯재배 농장은 많아도 종균하는 곳은 없다’는 말을 듣고 버섯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죠. 이렇다할 지식도 없이 시작했는데 버섯이 환경에 예민해 많은 정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새로운 것이 끝도 없이 나오는 무궁무진한 것이 버섯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8년전 팽이버섯으로 시작한 연구품종도 만가닥버섯, 새송이버섯 등으로 다양해졌습니다.”

적당한 시기에 물러나지 못해 뒤늦게 곤욕을 치르는 대기업 경영자들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구 명예회장은 특히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 물러나 귀감이 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요 대기업 총수들 가운데는 처음으로 스스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셨는데….

“21세기에는 젊고 도전적인 사람들로 세대교체가 이뤄져 전문경영인들이 소신있게 자율경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육상 계주에서 최선을 다해 달린 후 속도가 붙었을 때 바통을 넘겨야 하는 것처럼 최고경영자로서 대과없이 달려왔을 때 타이밍을 놓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후배 경영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은….

“저는 창업세대와 고생을 함께 했다는 것이 다른 2세 경영자와 다릅니다. 회장이 된 후 ‘더 잘 해보겠다’는 욕심이 없지 않았지만 무턱대고 확장하기보다는 내실있는 경영을 하게 된 것도 선대의 경험을 통해 경영의 어려움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최근 젊은 경영인들의 패기와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기대도 큽니다. 다만 우선은 ‘경영의 내실화’를 통한 질적 경쟁력 제고에 힘써 달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사회공익사업에 전념해 소외된 계층을 위해 다소나마 도움이 되는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영농과학화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겠습니다.”

▼구자경은 누구인가 ▼

노사분규가 극한으로 치닫던 1989년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던 구자경(具滋暻)LG명예회장은 민관합동대책회의에서 화끈한(?) 발언을 했다. “노조가 계속 분규를 일으키면 공장을 아예 태국으로 옮겨버리겠다”고 한 것이다. TV에서 생중계 되는 공개석상에서 터져 나온 구명예회장의 이 말은 태풍을 몰고 왔다. 노조는 물론 많은 국민이 들고 있어났다. 나라보다는 개인만 챙기는 이기적 발상이라며 성토를 해댄 것. 그러나 구명예회장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인건비 수준에 따라 국제적으로 분업을 하는 요즈음의 기업 풍토에서 보면 경영의 흐름을 미리 꿰뚫어 본 혜안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쨌든 구명예회장의 발언은 기업인들도 대응수단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노사협상에서 기업이 제 목소리를 내게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구명예회장은 이처럼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옳은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비밀리에 이뤄진 정주영(鄭周永)전 현대명예 회장의 북한 방문을 최초로 터뜨린 이도 구명예회장이다. 정부 정책에 대해서도 마음껏 비판을 했다. 그의 이러한 배짱은 철저한 장사꾼 정신에서 나왔다. 구명예회장은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진주사범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부친인 고 구인회(具仁會) 회장의 지시에 따라 교사생활을 하다가 바로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에 입사했다. 이 때가 50년이었다. 구명예회장에게 맡겨진 첫 직책은 창고지기였다. 사업을 하려면 재산을 지키는 것부터 배워야한다는 부친의 지론에 따른 것이다.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그러나 구명예회장은 이 때의 일이 가장 보람있었다고 회고한다. 발로 뛰는 경영의 기초가 여기서 다져졌다. 회장취임 이후에 수시로 대리점 서비스센터 영업장 등 고객이 있는 현장을 찾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소한 민원에도 귀를 기울여 온 덕분에 시장의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철저한 장사꾼이다. 정치권이나 외부와 결탁하지 않고 오로지 사업으로만 승부를 거는 스타일이다. 5공 시절 고위층으로부터 인사청탁을 받아 사원을 채용한 적이 있다. 낙하산으로 날아온 직원의 능력이 기대에 못미치자 바로 잘라 버렸다. 당시 청와대에서 몹시 서운해했다고 한다. 구명예회장은 회사에 도움이 안되면 누구의 인사 압력도 받지 않겠다고 맞섰다.

그는 또 대단한 추진력을 지녔다. 한번 마음먹으면 반드시 해낸다. 일본에서 유행하던 전자제품을 들여다 직접 뜯어보면서 새 제품개발을 지시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회장으로 재직하던 90년대 중반에 매출규모를 38조원으로 늘렸다. 한창 잘 나가던 95년에 구본무(具本茂)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었다. 당시로서는 충격이었다. 아들이 더 낫다는 판단을 하는 순간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버렸다. 자신보다는 회사의 앞날을 생각한 용단이었다. 그 후로는 한번도 경영에 간섭하지 않고 있다.

▼약력 ▼

1925년 4월 24일 경남 진주 출생

1943년 진주고보 졸업

1945년 진주사범학교 강습과 수료

1950년 LG화학 이사로 LG 입사

1970년 LG회장

1986년 고려대 명예경제학 박사

1987년 전국경제인연합회장

1988년 한국경영자총협회 고문

1995년 LG회장 은퇴

1999년 연세대 명예 경영학 박사

2000년 창업대상 수상

<구자룡기자>bonho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