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힘든 두려운 무서운 길’

  • 입력 2000년 6월 20일 19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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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두려운, 무서운 길을 오셨습니다.” 13일 북한 김정일국방위원장이 한 말이다. 도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그 다음에 곧바로 따라붙은 한마디가 그의 생각을 짐작하게 한다. “공산주의자도 도덕이 있고 우리는 같은 조선민족입니다.” 자기가 비록 남한의 헌법과 법률이 ‘반국가단체의 수괴’로 규정한 공산주의자이지만 스스로 초대한 남한의 정치지도자에게 해를 가할 만큼 패덕한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도 김대중대통령이 정말로 ‘힘든, 두려운, 무서운 길’을 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정일위원장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그렇다. 김대통령의 평양 방문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건 모험이었다. 이번 회담이 잘못됐다면 한때 ‘민족의 지도자’로 일컬어졌던 그가 30년 동안 가다듬어온 3단계 평화통일론은 현실성을 잃었을 것이다. 일관되게 추진해 왔던 대북 포용정책도 빛이 바랬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취약한 국내의 정치적 기반은 더 약화되어 집권당 총재로서 품고 있는 재집권의 꿈도 무산될 것이다. 여기에 정치가로서 느끼는 좌절감과 인간적 비애를 더하면 정상회담의 실패는 곧 김대통령의 인생 그 자체의 파산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겨레의 소망이 아프게 꺾이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 얼마나 ‘힘든, 두려운, 무서운 길’이었는가.

그런데 언변과 논리로 겨루자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김대통령이 평양의 공개석상에서 극도로 말을 아낀 것을 두고 흠을 잡는 사람들이 있다. ‘미귀환 국군포로’와 납북어부 송환 요구를 관철하지 못하는 등 ‘너무 많은 것을 주고 너무 적은 것을 얻었다’는 비난도 들린다. 한나라당 이회창총재는 ‘북한의 연방제를 수용한 듯한 표현’이라는 말로 정상회담 합의사항에 대한 ‘사상적 의혹’까지 넌지시 제기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은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다. 김대통령은 전쟁을 하러 평양에 간 것이 아니다. 대화와 협상을 하러 갔을 뿐이다. 게다가 협상의 상대방은 절대권력의 반석 위에 서 있었던 반면 김대통령은 언제 꺼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밟고 선 채 협상을 해야 했다.

북한은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는 구호가 아무 문제없이 통하는 나라다. 당의 결정은 곧 김정일위원장의 결정을 의미한다.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권좌에 오른 그는 북한의 권력을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절대권력자다. 정상회담이 아무 성과 없이 끝나도 그의 권력이 위협받을 이유는 없었다.

반면 김대통령은 수십 년 동안 용공시비와 박해에 시달렸던 정치인으로서 겨우 40% 남짓한 표를 얻은 소수파 정권을 이끌고 있을 뿐이다. 그가 총재로 있는 당은 혼자 힘으로는 입법을 할 수 없다. 게다가 해묵은 지역주의가 매사에 발목을 잡는 가운데 마땅한 소재가 있으면 가차없이 대통령을 비판하는 언론인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정상회담을 해야 했다. 의례적인 말 한마디, 사소한 합의사항 하나만 잘못 돼도 자칫하면 정치적 치명상을 입게 된다는 위기의식을 뇌리에 새긴 채 말이다.

김대통령은 정말로 ‘힘든, 두려운, 무서운 길’을 다녀왔다. 그가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느꼈던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면 이번 회담은 별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회담을 앞두고 ‘범죄자 김정일을 경멸하면서 내려다 보라’고 주문했던 일부 극우 지식인들은 이제 ‘성과가 미진하다’고 대통령을 비판한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요구한다. 협상의 상대방에 대해 경멸감을 표명하면서도 원하는 모든 것을 얻어낼 그들만의 오묘한 협상비법을 공개하라고.

‘북한의 주석궁을 한국군 탱크가 점령하는 것’이 ‘정의로운 통일’이라고 믿는 분들은 내놓고 정상회담과 남북협력에 반대하는 게 옳다. 잘 하시라고 해놓고 돌아서서 침을 뱉는 건 아무래도 비겁하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대북정책에 관한 한 앞으로도 여러가지 어려운 협상을 해야 할 대통령의 발 밑을 든든하게 만들고 싶다.

나는 전쟁을 수반하는 그 어떤 ‘정의로운 통일’보다 한반도의 평화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유시민(시사평론가)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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