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불안 언제까지?]증시는 '호황'을 믿지않는다

  • 입력 2000년 5월 23일 18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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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분기 연속 두자릿수의 성장률, 사상 최대의 기업 실적, 낮은 물가상승률, 한자릿수의 저금리기조 유지, 900억달러에 육박하는 외환보유액….’

경제기초여건(펀더멘털)의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는 이처럼 과거 그 어느 시기보다도 양호하다. 그런데도 금융시장이 전체적으로 크게 동요하며 특히 주식시장은 사상 최악의 폭락사태로 거의 빈사상태에 빠졌다. 얼마나 더 빠질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정부 당국은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시각이다. 양호한 펀더멘털을 강조하는 정책 당국자의 상황 인식은 97년 숱한 외환위기의 경고에도 무대책으로 일관하던 자세와 거의 닮은꼴이다.

그러나 시장에선 ‘주식시장이 실물경기와 따로 도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며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원인을 빨리 찾아 치유하는 것’이라고 주문한다. 한마디로 시장이 이헌재경제팀의 정책의지와 방향을 불신하고 있다.

▽수급 악화는 향후 경기에 대한 불안한 심리가 촉발〓증시 내부적으로는 수급악화가 주가폭락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자주 거론된다. 주가는 ‘재료’(호재 악재 등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가 아무리 좋더라도 수급이 나쁘면(주식 공급물량이 수요를 초과하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즉 현재의 증시는 사상 최대의 기업실적 등 호조건의 재료가 수급악화에 의해 철저히 배척되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주식공급 물량이 아무리 넘쳐나더라도 시장에서 신규 주식매수 세력이 형성된다면 수급부담은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결국 현재의 수급 공백 상태는 200조원을 웃도는 부동자금이 존재하는데도 신규 매수세력이 없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리젠트자산운용 이원기사장은 “사상 최대의 기업실적은 이미 현실화된(확인된) 지표로 현 단계에서 주식매수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며 “향후 경기둔화를 걱정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주식매수를 꺼리고 이것이 수급 공백 상태를 초래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금융지표, 얼마나 나빠지고 있나〓우선 주가에 이어 금리 환율 등 3대 가격지표가 악화되고 있다. 환율은 22일 달러당 1130원대로 상승한 이후 가파른 오름세를 이어가고 있으며 금리도 금융시장 불안이 확산되면서 23일 연 10%대를 돌파했다.

이처럼 3대 금융지표가 나빠지고 있는 것은 대내외 경제환경이 불안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 우선 미국의 고금리정책과 이로 인한 아시아 유럽 등 전세계의 동반 금리상승 움직임이 가장 우려되는 부문. 미국을 비롯한 세계 증시는 최근까지 저금리기조와 풍부한 유동성을 기반으로 대폭 상승한 점을 감안할 때 세계적인 고금리 추세는 증시의 하락 반전을 이끌어낼 가능성이 높다. 이미 미국증시는 금리인상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올 들어 큰 폭의 조정을 거치면서 전세계 증시의 동반약세를 초래하고 있다.

금리인상으로 세계 경기가 위축되면 수출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기업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이미 무역수지 흑자규모는 4월까지 작년 동기에 비해 10분의 1로 축소될 정도로 위축돼 있다. 특히 무역수지 흑자폭이 줄어들면서 원화가 약세로 반전하고 환차손을 우려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이탈이 가속되면서 원화 약세 추세가 기조적으로 정착될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실물부문도 낙관할 수 없다〓투신권을 비롯한 금융권 전반의 미진한 구조조정이 발등의 불이며 새한그룹의 워크아웃 신청은 그동안 진행돼 온 기업구조조정 작업이 ‘부채비율을 맞추는’ 선에서 형식적으로 이뤄진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KTB자산운용 장인환사장은 “저금리기조와 내수 및 수출호조 등 양호한 기업환경에서도 중견 그룹이 자금난을 호소할 정도라면 향후 기업환경이 악화될 경우 상당수 기업이 똑같은 상황에 봉착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우려했다. 실물부문의 위기는 금융시스템의 불안을 초래해 금리상승을 더욱 가속화할 수 있다.

기업들의 향후 실적 전망도 낙관하기만은 어려운 상황. 올 1·4분기 기업들의 실적이 대폭 호전됐지만 유가 및 임금인상으로 원가부담이 커지고 세계 경기의 둔화로 수출이 지장을 받을 경우 국내 기업의 수익성은 얼마든지 악화될 여지가 있다.마이애셋 최남철상무는 “일부 투자자들은 올해가 기업실적의 정점이 될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런 예측이 정말 가시화될 경우 올해 장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우려했다.

<이강운·최영해기자>kwoon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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