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되돌아본 뉴욕100년/1910년대

  • 입력 2000년 3월 6일 01시 30분


1908년 12월 24일, 조지 매클리런 뉴욕 시장은 550여개에 이르는 뉴욕 시내 영화관에 대한 허가를 취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뉴욕시 역사상 가장 길고 가장 분노에 찬 청문회가 열린 직후였다. 이 청문회에는 거의 모든 교파의 목사들이 참석했는데 이들은 영화가 사회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면서 영화관을 모두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화관 폐쇄조치등 문화 주도권놓고 충돌▼

영화관의 폐쇄조치는 비록 나중에 철회되었지만 그 후 10년 동안 뉴욕에서 벌어질 더 커다란 전쟁의 일부에 불과했다. 새로 미국에 도착한 이민들과 오래 전부터 미국에 자리를 잡고 있던 사람들이 뉴욕과 미국 전체의 문화적 주도권을 놓고 한판 대결을 벌였던 것이다. 이 싸움은 문화적 타락의 상징으로 규정된 사람들과 자칭 미덕의 옹호자들 사이의 대결이었으며 변화의 힘과 변화를 멈추게 하려는 힘 사이의 대결이었다.

이런 갈등이 일어나게 된 주된 이유는 이민의 증가였다. 1900년부터 1910년까지 뉴욕의 인구가 거의 50%나 늘어났는데 이 중 대부분이 이민으로 인한 것이었다. 하버드 대학의 윌리엄 리플리교수는 1908년에 ‘문명 세계의 모든 민족이 비정상적으로 섞이게 되면’ 인간이라는 종이 퇴화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백인 앵글로색슨의 문화와 이상이 ‘여전히 길을 밝혀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리플리교수가 당시 뉴욕의 문화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면 그렇게 낙천적인 전망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도시의 어디를 둘러봐도 새로운 것과 현대적인 것이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수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또한 어빙 벌린은 흑인 음악의 표현양식을 가져다가 미국 대중음악에 접목했으며 아이린 캐슬과 버논 캐슬은 흑인들의 춤을 가져다가 역시 대중문화에 접목했다.

고급 문화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1913년에 열린 국제 현대 미술 전시회는 고급 문화가 이른바 ‘공식적인’ 문화에 대해 가한 공격이었다. 주로 표현주의 작품에 익숙해 있던 미국인들은 이 때 처음으로 피카소, 마티스, 뒤샹, 브랑쿠시 등의 작품을 접했다.

▼영화관서 음악-무용공연 이질 문화 화해 주선▼

그러나 1910년대가 끝나감에 따라 문화적 대립은 점점 화해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화해를 주선한 것은 놀랍게도 바로 영화였다. 1913년 이후 뉴욕에 웅장한 영화관들이 새로 들어서면서 중산층이 영화관에 가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영화관들은 또한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오케스트라 연주, 발레 공연, 오페라 공연 등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것은 사라져 가는 문화와 새로 떠오르는 문화 사이에서 두 가지를 통합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찾으려고 애쓰던 이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장면이었다.

(http://www.nytimes.com/specials/nyc100/nyc100-2-gable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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