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포스트 모던 정치

  • 입력 2000년 2월 29일 19시 10분


역사란 참 묘한 것이다. 분명 뚜렷한 흐름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곧장 가는 법이 없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우연과 돌발사태가 곳곳에서 불거지고 때로는 흘러간 물이 물레방아를 돌리는 이해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역사는 설계할 수 없다고 하는 모양이다.

우리의 정치가 독재에서 민주주의를 향해 흘러왔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변화 또는 발전의 경로가 퍽이나 독특하다. 박정희씨는 군사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산업화와 근대화를 내걸었다. 그런데 종신집권 체제를 만들었던 그는 바로 그 개발독재가 ‘성공’한 결과 출현한 산업사회의 저항에 부닥쳐 권력과 생명을 모두 잃었다.

유신독재의 잔명(殘命)을 폭력으로 연장시켰던 전두환 정권은 1985년 2·12 총선을 계기로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다가 1987년 6월 항쟁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5공정권의 제2인자였던 노태우씨가 합법적으로 권력을 이어받았다.

그 후임자 김영삼씨는 ‘소수파’로서 당시 집권당의 품에 안김으로써 ‘문민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김대중대통령은 DJP연합의 ‘다수파’로서 옛 집권세력인 자민련을 파트너로 삼아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우리는 누구도 예측하거나 설계하지 못했던 ‘점진적 단계적 민주화’를 경험한 것이다. 이제 우리 앞에 또 어떤 기묘한 권력이동이 기다리고 있을까?

어디 역사만 그런가. 개인의 인생행로 또한 그렇다. 집권당인 민주당, 야당의 길을 선언한 자민련, 또 한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꿈꾸는 한나라당, 그리고 그저께 창당발기인 대회를 연 민주국민당을 보라. 이른바 잡종의 시대, 이탈리아 피자와 조선 된장이 하나로 결합하는 퓨전(fusion)시대, 21세기의 진면목이 한눈에 드러난다. 민주노동당이라는 단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면 이번 총선에 후보를 내는 모든 정당이 다 ‘짬뽕정당’이다.

과거 독재자 밑에서 화려한 출세의 길을 걸었던 구시대 인물과 물고문 전기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던 반체제 투사들이 손을 맞잡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주방장’의 실력과 단골고객들의 취향에 따라 맛은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짬뽕은 어디까지나 짬뽕일 뿐 자장면이나 우동이 될 수는 없다. 지금 우리는 선과 악, 보수와 진보, 민주와 반민주의 울타리가 거의 다 무너져 내린 ‘포스트 모던’ 정치를 목격하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포스트 모던’은 지난 한 주일 정치적 소용돌이의 진원지였던 민주국민당이다. 이 신당의 대표는 경제부총리와 한국은행장, 서울시장을 지낸 경제학교수 출신 조순씨다.

김영삼 정권의 ‘킹메이커’ 김윤환 의원과 평생 야당 노릇만 한 희귀한 정치인 이기택씨, 엊그제까지만 해도 여당 당대표 후보로 거론되던 이수성씨, DJ의 40년 동지를 자처하는 김상현씨 등이 그 뒤를 받치고 있다. 민주국민당 ‘포스트 모던’ 퍼포먼스의 클라이맥스는 ‘마지막 재야’ 장기표씨가 맡았다. 그는 지난 13년 동안 아무도 듣는 이 없는 광야에서 지역주의와 보스정치 타파를 목청껏 외쳤던 ‘한국 정치의 세례 요한’이다.

이 21세기의 ‘세례 요한’이 무슨 심오한 기획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구경꾼에게는 ‘벤처’를 창업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국민당이라는 고색창연한 상호를 내건 이 ‘벤처기업’의 사업 아이템은 ‘정치적 자원 재활용’이다. 그는 ‘정치적 자원재생공사’를 만들어 낙천의원이라는 흘러간 물로 정치개혁의 물레방아를 돌리려고 한다. 무모한 시도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그를 아끼는 많은 이들이 탄식을 내뿜으면서 만류한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랴. ‘벤처’란 것이 원래부터 실패할 확률이 높지만 성공하면 한몫 단단히 잡는 사업 아니겠는가.

거짓말로 성공하는 ‘벤처’는 없다. 민주국민당이라는 괴상한 정치적 ‘벤처’가 성공하려면 우선 이것이 ‘자원 재활용 사업’이라는 것과 아울러 무슨 목적에 재활용할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상표만 바꿔 내다 판다면 그건 ‘벤처’도 아니요 성공할 수도 없을 것이다.

유시민(시사평론가) 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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