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19)

  • 입력 2000년 1월 9일 19시 54분


짧은 스커트를 입고 화장을 진하게 한 여자들이 가로등 밑에 서서 지나가는 차량들을 살피고 서있는 거예요. 차가 멈추면 다가가서 뭔가 얘기를 붙이기도 하고 담뱃불을 빌리기도 해요. 그가 여자에게 서투른 독일 말로 길을 물어요. 동베를린 방향이 어느 쪽이냐고. 여자는 조소하듯이 대꾸하죠. 전철이 끝났다고 잠자고 내일 가라고 내가 재워 주겠다고. 그는 이런 경우를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룻 밤 자는데 얼마냐고 물어요. 여자는 싸게 해서 백 마르크라고 해요. 그는 질겁을 해서 달아날 수 밖에. 세상에 하룻 밤 자는데 백 마르크라니. 그는 주머니에 꼬깃꼬깃 접힌 이십 마르크짜리 두 장을 새삼 만져 보는 거예요. 젊은이는 다시 크리스마스 장식과 별등이 꿈나라처럼 밝혀진 오이로파 센타 앞의 광장으로 되돌아 왔어요. 그리곤 겨울철이라 물을 빼고 비워진 분수대 근처의 벤치에 가서 앉아 있었어요. 어떤 동양인 남녀가 지나가자 그는 일어나서 머뭇거리며 담뱃불을 빌려 달라고 그랬대요. 담뱃불을 붙여 주던 남자가 그에게 독일말로 중국인이냐고 물었어요. 아니오 나는 코리언이오, 하고 그가 말했고 그 남자는 큰소리로 웃으면서 우리 말로 나도 코리언이오 그랬다죠. 잠깐 그들 사이에는 미묘한 침묵이 흘렀어요. 두 남녀는 유학생 신씨 부부였지요. 젊은이가 멈칫했다가 서로의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꺼냈어요.

동베를린으로 가는 전철이 없습네까?

부인이 먼저 눈치를 챘대요.

아, 지금은 돌아갈 수 없군요. 새벽이 되어야 다시 다닐텐데…. 괜찮다면 우리 집으로 가두 되는데.

젊은이는 얼핏 보기에도 고등학생 정도로나 보일 듯 앳되어 보였답니다. 신 선생이 다시 거들었어요.

여기서 가까운 곳이오. 가서 쉬었다가 날이 밝으면 역까지 데려다 주겠소.

했더니 그는 순순히 그들을 따라 왔어요. 그들은 인적이 끊긴 거리를 세 블록이나 걸어서 로젠하이머 스트라세의 자기네 집까지 젊은이를 데려갔대요. 막상 문 앞에 이르자 젊은이가 문 앞의 계단 위로는 올라오지 않고 보도에 선 채로 그들에게 말하더래요.

여기가 어딥네까?

우리 집이예요.

부인이 그랬더니 다 눈치를 챘는데도 젊은이가 말했대요.

저는 북조선 류학생이야요.

그래요? 우리두 학생이라구요. 어서 들어와요.

내가 이 선생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건 그로부터 사흘이나 지나서였습니다. 신씨 부부가 젊은이를 데리고 집으로 찾아 왔대요. 사실 그들 부부로서는 이틀 밤도 어려웠을 거예요. 원룸이라 두 부부의 침대와 주방과 거실이 한 공간 안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다른 지방의 친구들이 찾아 오면 하던대로 소파 위에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자기네 침대 앞에는 커튼을 쳤다지요.

젊은이의 이름은 조영수, 나이는 스무살, 집은 평양시 보통강 구역이구요, 동베를린 공과대학에 유학온지 이제 겨우 팔 개월 되었어요. 신씨 부부는 아침을 먹이고 어쩌나 보려고 반제 호숫가에도 데려가고 박물관이며 식물원이며 서베를린의 이곳 저곳을 구경 시켜 주었어요. 저녁 때까지 따라 다니더니 동베를린의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던 그들도 당황하기 시작했지요. 이건 어디까지나 중대한 정치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지요. 그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골치를 앓고 있다가 이희수 씨에게 데려가게 된거예요.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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