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17)

  • 입력 2000년 1월 6일 19시 39분


우선 영태를 독일 전통 음식을 하는 레스토랑으로 데려가서 시럽을 넣은 베를린식 맥주를 마시면서 저녁을 먹었어요. 나는 그제서야 얘기를 꺼냈습니다.

밥 먹구 오늘 주무실 데로 데려다 줄게.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한 형 집으로 가는 게 아냐?

응 사실은 원룸 식의 스튜디오라 송 형 잘 데가 마땅치 않아서 그래.

지난 번에는 멕여 주고 재워 주고 한다구 큰소리를 치더니… 내외하는 거야 뭐야. 누구네 집인데?

나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게 그에게 말했어요.

여기서 친해진 사람인데… 좋은 분이야.

송은 잠깐 말이 없더니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친한 사람이 생겼다면… 잘됐구나.

그는 뉘른베르크 소시지를 포크로 연신 서너 개나 찍어서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어요. 나도 가만히 기다렸지요.

뭐하는 사람이야, 학생?

아니 대학 선생이야. 연구소에 나가.

그 사람을 좋아해?

나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어요. 송영태가 나프킨으로 입 주위를 닦으면서 말했지요.

그 양반 집으루 가보지 뭐. 한 형이 좋아 한다면 괜찮은 사람 아니겠어?

여기 며칠 있을 거야?

걱정마라. 내일 동베를린 넘어가서 책 사고 오후에는 떠나야지.

송영태는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희수씨를 만난 셈이 되었습니다. 이 선생은 그의 성격대로 부드럽고 자상하게 그를 대해 주었어요. 오히려 영태가 굳어진 표정이었구요. 이튿날에는 셋이 함께 동베를린 쪽으로 넘어가 보았어요. 차는 이 선생네 집 주차장에 그대로 두고 전철을 타고 프리드리히 스트라세 역까지 가서 통관 수속을 했죠. 나는 처음 가보는 길이었는데 이 선생은 전에 두어번 왔었대요. 여권을 창구에 내밀었더니 서른 여섯 시간 체류가 허가된 통행증을 끼워 주었어요. 그전 보다는 사람이 훨씬 줄었다고 해요. 우리는 걸어서 장벽 넘어의 가까운 도심지를 이리 저리 돌아다녔어요. 아파트들은 낡았고 모두들 서베를린 구경을 하러 빠져 나가서 그런지 거리는 한적했어요. 전에 고속도로에서 동베를린 구역의 휴게소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는데 청소가 안되어 있었고 서비스는 엉망이었지요. 화장실은 또 얼마나 더럽던지. 자기 가게가 아니라서 그런다고 하더니 동베를린에서는 국영 호텔 외에는 커피도 사 마실 데가 없더군요. 송영태가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는지 운터 덴 린덴 거리의 훔볼트 대학 정문쪽에 있는 서점에 들러서 마르크스와 헤겔의 전집을 샀어요. 내가 보기에도 서독에 비하면 거저나 다름없는 값이었지요. 중심가에서 우리는 동그라미 속에 별이 그려진 낯익은 깃발을 보고 가까이 갔다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대표부라는 간판을 보고 나서 반갑기도 하고 께름직하기도 해서 울타리 밖으로 한바퀴 돌아보고 나서 물러나기도 했죠. 송영태가 뒤에 처져서 천천히 다가오더니 내게 중얼거렸어요.

한번 들어가 볼까, 자료나 좀 얻었으면 좋겠는데 말야.

대학 도서관에 많더라.

한 형, 밖에 나와서 받은 첫 번째 충격이 뭔지 알아?

장벽 무너진 거 말구?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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