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정치인은 현금이 있어야 돼요』

  • 입력 1999년 5월 28일 19시 27분


어느 ‘사모님’의 말이 옳은가. 신문은 연일 재벌―장관부인간 ‘옷 로비’사건을 보도하면서 양쪽의 주장을 나란히 대비해놓은 표를 싣고 있다. 그러나 시장에서, 목욕탕에서, 미장원에서 오가는 얘기의 결론은 거의 일치한다.

“누구 말이 옳으냐고? 그거 꼭 말을 해야 돼? 뻔하잖아.”

오늘 우리사회는 얼마나 건강한가. 사회가 건강하려면 어떤 사건이 터졌을 경우 거기에 얽힌 의혹을 풀어주는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고 그 결과를 국민이 수긍하는 믿음이 쌓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숱한 의혹들을 완전히 햇볕에 드러내놓지 않은 채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기면서 불신의 찌꺼기만 사회밑바닥에 겹겹이 쌓아왔다. 그 예의 하나가 이른바 고관집 절도사건, 특히 유종근(柳鍾根)전북지사의 서울관사 3천5백만원 도난사건이다. 그동안 언론에서 기사와 사설로 진실규명을 촉구했으나 검찰이나 유지사 모두 속시원한 답을 하지 않았다. 특히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현장검증을 포기한 검찰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다. 26일 유지사를 직접 만나봤다.

―도난당한 3천5백만원은 모두 현금인가. 수표는 없었나.

“모두 현금이다.”

―요즘같은 신용사회에서 그것도 경제학박사에 대통령경제고문을 하는 분이 3백50만원이라면 몰라도 3천5백만원이나 되는 돈을 집에 쌓아놓고 있었다니…. 미국 같은 데서는 마약이나 뇌물 등 범죄관련이 아니고는 그와 같은 큰 돈을 현찰로 갖고 있는 경우가 없다는데….

“미국과 우리는 다르다. 한국에서는 정치를 하려면 현금이 필요하다. 한나라당 이회창총재도 집에 3천5백만원이상의 현금을 갖고 있을 것이다.”

―수표가 보관하기도 간단할 텐데 왜 현금만 갖고 있었나.

“수표로 주면 싫다고 되돌려주는 사람도 있다.”

―누구한테 돈을 주나.

“선거때 고생한 사람이 찾아오면 주고, 당직자나 국회의원에게도 준다.”

―얼마씩 주나.

“10만원서부터 30만원, 50만원, 또 1백만원 줄 때도 있다. 기백만원씩 주는 경우는 드물다.”

―3천5백만원은 어디서 언제 가져다 놓은 것인가.

“전주 관사에서 가져다 놓은 것이다. 2천만원은 처남이 사업을 시작하는 데 주려고 도둑맞기 전날 갖다 놓은 것이고 나머지 1천5백만원 정도는 늘 보관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쓰면 전주집에서 또 갖다 채우곤 한다. 도난당할 당시에도 2백만∼3백만원은 썼을테니까 실제 잃어버린 돈은 범인이 주장하는 대로 3천2백만원이 맞을지 모른다.”

―전주관사에는 현금을 얼마나 갖고 있나.

“정치를 하려면 1억원안팎을 현금으로 운용해야 한다. 보통 그정도 갖고 있었는데 작년말에는 선관위에서 뒤늦게 정산해준 6·4지방선거 기탁금 및 공영비용 환급금이 많아서 2억원정도 됐다. 이중에는 동생 등에게 꾸어준 채권도 포함돼 있다.”

―선관위에서 돌려받은 게 정확히 얼마나 되나.

“잘 모른다.”

―현금말고 예금은 없나.

“1억은 넘고 2억원쯤 될 것이다.”

―어떻게 자기재산에 대해서 그렇게 부정확한가.

“국가경제는 잘 알지만 숫자 기억은 잘 못한다. 재산관리는 비서나 집사람이 하니까 나는 잘 모른다.”

―정치하느라 돈 쓰는 데가 많다면 그 돈은 어디서 생기나. 월급은 뻔할 테고….

“전부터 갖고 있던 것도 있고, 주위에서 도와주는 사람도 있다. 특히 선거때는 도움을 많이 받는다.”

―서울관사의 가구중에 화장대도 있고 아기침대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부인과 딸(3)도 같이 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 아내는 작년부터 이화여대 대학원에 다니기 때문에 서울에 자주 올라오는데 아기도 데려온다.”

―도둑맞은 그 빌라는 부동산중개소에 내놓고 가구는 모두 치웠다는데, 그것도 새벽에. 검찰은 정식으로 현장검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지사는 공인이니까 귀찮더라도 국민의 의혹 해소차원에서도 검찰의 현장검증에 협조했어야 되지 않나. 당시 박상천 법무장관도 국회에서 검증이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박장관은 사택을 폐쇄한 줄도 모르고 그렇게 약속을 한 것 같다. 박장관이 전화했기에 항의했다. 장관이 현장검증 하라 마라, 돈의 출처를 조사토록 하겠다고 얘기하는 것은 법리에 맞지 않다. 특히 현장검증 다시 하라는 것은 정치공세고 또 TV카메라가 몰려와 이상하게 찍으면 불필요한 구설수에 휘말린다.”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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