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23)

  • 입력 1999년 5월 23일 19시 58분


괜찮아 다들 잘 해나갈 거야.

내가 그네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면서 속삭이자 그네도 간신히 말을 꺼냈다.

뭣 땜에 사는지 모르겠어.

하고나서 혜순은 두 손을 내리고 물기로 얼룩진 얼굴을 쳐들며 나에게 말했다.

우리 이제 그만 두자. 지들 천년만년 해쳐먹으라고.

나와 최도 둘 다 눈알이 벌개져 있었다. 우리는 쫓기듯이 천을 들치며 국밥집에서 나왔고 등 뒤에서 혜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신 나타나지말구…형, 잘 가.

그리고 나는 그네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정자도 건이가 징역을 살던 긴 세월 동안에 취직도 다시 했고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노동자와 결혼을 했다. 안산에서 산다든가. 사는 조건이 지식인 나부랭이들 보다 훨씬 열악했던 그들은 잊혀지고 저희 혼자서들 감당하며 고난을 견디었지만 나중에는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군들 잊을 수 있으랴. 그들의 넉넉한 따뜻함과 시대 속에서 잊혀지고야말 익명에도 당당했던 청춘을.

당신은 일요일 한밤중에야 저에게 돌아왔어요. 나는 자고 있었던 게 아니었어요. 벌써 발자국 소리가 울 밖에서 들릴제부터 나는 그게 당신인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방문이 살그머니 열리면서 낯익은 땀내가 끼쳐 왔거든요. 마치 집 나갔던 개처럼 당신은 언제나 책상 위에 얹어 두었던 노랑색 양은 주전자를 들고 물을 벌컥대며 마셨지요. 나는 그대로 당신이 잠 들기를 기다렸지만 당신은 스탠드 불빛을 등지고 누운 나의 어깨너머로 얼굴을 들이밀고 넘겨다 보았어요. 내가 참지 못하고 일부러 잔뜩 졸음에 겨운 소리로 말을 걸고야 말았죠.

언제…왔어요?

응 아까.

저 거짓말 하는 것 좀 봐. 방금 살그머니 들어와 놓고선.그렇지만 걱정 때문에 밤마다 뜬눈으로 새워 놓고도 당신에게 그런 내색을 해서는 안된다고 작심을 했었거든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부비면서 일어났답니다.

세상 구경이 어땠어요?

여전하더군.

무슨 대답이 그래요.

당신은 주섬 주섬 옷을 벗고 마당으로 나갔어요. 수도를 틀고 양동이에 물을 받아 끼얹는 소리가 들렸지요. 당신이 들어와서 맨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울 때까지 나는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어요.

박살이 났어….

혼잣말로 당신이 중얼거렸어도 나는 못들은 척 했어요. 또 한참 있다가 당신은 천장을 보는 그대로 허공에 대고 말했지요.

옛날 이야기에 나오잖아. 저어 히말라야 산맥 깊숙한 곳에서 조난 당한 이가 어느 바위 틈을 발견했대. 눈보라를 피해서 그 안으로 들어가니까 갑자기 넓어지면서 딴 세상이 나타났대. 거긴 고통도 이별도 슬픔도, 가난도 굶주림도 없는 온화한 나날이 계속되는 세상이었대. 입구를 나서자마자 과일나무와 찬란한 빛깔의 각색 꽃들이 만발한 오래된 정원이 있었어. 현실 세계의 나쁜 건 그곳에 한 가지도 없었지. 거기 사는 사람들은 다투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병에 걸리지도 않고… 하여튼 조화로운 삶이 언제까지나 이어지는 세상.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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