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18)

  • 입력 1999년 5월 17일 19시 28분


이튿날 내가 학교에 출근했다가 돌아와 보니 내가 불안해 했던대로 당신은 집을 비웠어요. 당신은 산에 올라 세상을 훔쳐 보았던 거예요. 역시 여기는 당신에겐 현실이 아니었을까요. 벽에 붙여 놓은 앉은뱅이 책상 위에는 당신의 리본 편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나 밖에 나갔다 오겠소. 서울에는 안 가고 광주까지만 갔다 올 생각이야. 어제 산에 올라갔더니 친구들 얼굴이 떠올라서 못견디겠더라. 아무리 늦어도 오늘 밤에는 돌아올 수 있을 거요. 혹시 자고 들어오게 되더라도 걱정말기를 바래. 내일 오전까지는 꼭 돌아올께.

편지에 그렇게 써 놓고는 당신은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까지도 돌아오지 못했지요. 내가 그때 당신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알아요? 내가 제일 무서워하던 일은 아무런 준비나 각오도 없이 갑자기 당신과 헤어지게 되는 것이었어요. 우리의 마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당신이 어느 낯선 땅, 길 모퉁이에서 잡혀가 소식도 없이 갇혀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내가 꿈에서 소스라치며 깨어난 게 몇번인지 알아요? 우리가 바라던 세상, 우리가 꿈꾸던 세상은 갈뫼의 단조롭고 평화로운 일상과 같은 그런 곳이라고 나는 생각해 왔어요. 하지만 당신이 책을 통해서 생각하고 이루어낼 세상은 결코 단조롭거나 평화스런 고장은 아니겠지요. 평등을 위한 단호하고 강력한 계급투쟁이 지속되고 있는 긴장된 소용돌이의 공간이 되겠지요. 혁명의 적들이 둘러싸고 있을테니까요. 당신은 이 생활이 자유주의자의 공간이라고 스스로 비하하지 마셔요. 내가 바라는 것은 겨우 이만큼 밖엔 안되니까요. 그 어떤 체제라 할지라도 당신과 나의 이 초라한 피난처는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나에게 이념은 아무런 문제꺼리도 아니겠지요. 당신만 곁에 있다면….

그랬다. 나는 산정에 올랐을 때 내가 자폐되어 있다는 답답증 때문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자들은 막강한 무력과 폭력을 쥐고 번성해 가는데 죽은 벗들은 가족의 숨 죽인 울음에 둘러싸여 얕은 땅 아래서 몰래 몰래 썩어가고 있었다. 무력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올바로 통제할 조직이 있어야만 한다. 세월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도. 피델과 체가 유카탄 반도에서 씨에라·마에스트라에 도착했을 때 폭풍과 매복에 거의 다 죽어버리고 겨우 열 두 명이 살아 남았다. 피델은 바로 그 지점에서 미제와 앞잡이들을 몰아내기 위한 쿠바 혁명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다고 선언했다. 피로와 굶주림으로 지쳐있던 생존자들은 근거지의 동굴에서 피델의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드디어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첫걸음을 내디뎠던 그 길은 남수가 말하던 산정에로의 지름길이었다. 끝까지 살아남아 민중의 권력을 쟁취하자는 봉한이의 멀고 먼 길이기도 했다. 동우는 민족 내부의 새로운 연대를 꿈꾸었다. 그래서 오 월은 나와 나 아닌 것이 갈리는 갈림길이었다.

나는 윤희가 출근할 때까지 졸음에 겨워 못일어나는 척 하고 자리에 엎드려서 기다렸다. 윤희가 나가자마자 얼른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갈뫼 어귀의 다릿목까지 걸어가 읍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고 이어서 읍내의 차부에서 광주로 나가는 시외버스에 올랐다. 시 중심가의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가지 않고 시 외곽의 철도 건널목 앞에서 내렸다. 날씨는 맑고 햇빛이 하얗게 빈 땅에 내려 앉아 있었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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