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함재봉/「총풍」이 남긴 것

  • 입력 1998년 10월 26일 19시 51분


‘총풍(銃風)’이 휩쓸고 지나갔다. 26일 발표된 판문점총격요청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결과는 앞으로도 수사가 계속될 수 있다는 여운을 남기기는 했지만 정치적인 사건으로서의 ‘총풍사건’은 일단락된 듯 싶다.

그렇다면 총풍이 쓸어간 것과 남긴 것은 무엇인가? 총풍이 남긴 것은 정치권과 안기부 검찰에 대해 남아 있던 일말의 신뢰(?) 내지는 기대감(?)일 것이다. 물론 정치권과 안기부 검찰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신뢰’또는 ‘기대감’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되어 버린 세상이다.

▼ 사건핵심 잊지 말아야 ▼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기대를 걸었었다. 왜냐하면 어쨌든 정권이 바뀌었고 여야가 바뀌었다. 바뀐 만큼 한국정치가 과거의 구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던 것은 당연한 기대였다. 또 국가경제가 위기에 처해 있다. 경제발전은 그동안 숱한 대가를 치르면서 과거정권이 그나마 한가지 잘했던 일이다. 그런데 그 공든 탑이 무너져버릴 상황에 처해있다.

그래서 국민은 정부와 정치권이 이 모진 풍파를 헤쳐나가고 국가를 존망의 위기에서 건져내는 지도력과 지혜를 발휘해 주기를 기대했다. 이 또한 당연한 기대였다.

그러나 총풍사태가 보여준 것은 수평적 정권교체도, 국가위기도 정치권을 자기도취와 자가당착에서 깨어나게 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여권은 이번 사태를 치르면서 놀라운 정치적 미숙성을 보여줬다.

총풍사건에 이회창(李會昌)후보 등 지난 대선당시 한나라당 지도부가 관련된 듯한 검증되지도 않은 사안들을 가지고 야당에 대한 정치공세에 사용한 것은 정치도의상의 문제를 떠나서 전략전술상의 무지와 무모함의 극치였다.

안기부와 검찰 역시 공정하고 객관적인 수사에만 전념하기보다는 정치권의 진흙싸움에 말려듦으로써 또 한번 자신들의 위상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권의 미숙성을 질타하는 동시에 이번 사건의 본질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건의 핵심은 우리 정치권의 주변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이 국내 선거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 북한 당국자들을 만나서 모종의 모의를 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을 하고 실제로 그것을 행동에 옮길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는 정치가 아무리 부패하였다 하더라도 경제와 안보의 두 분야만큼은 정치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신성한’영역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정경유착이 얼마나 심각하다는 사실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고 선거 때마다 부는 ‘북풍(北風)’에 대하여 한번 정도라도 의심을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부와 ‘당국자’들의 최소한의 양식과 상식을 믿고 싶었다.

그러나 만일 검찰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정치권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는 ‘적과의 동침’마저도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소수이고 정치권 외곽에 머물던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피의자들이 보여준 것은 정치권내에서는 자기 당파의 이익을 위해서는 이성과 국가를 저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무장간첩 침투, KAL기 폭파사건, 판문점에서의 소요 등은 우리 국민의 안보관과 국가관을 형성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을 배후에서 조정하고 사주하고 있는 북한 수뇌부는 우리의 적이요 민족의 반역자들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이러한 안보관을 뒤흔들어 놓았다.

만일 이 사건들 중 단 한 개만이라도 우리측 정치권의 사주를 받아서 일어난 것이라면 국민은 이제 과연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 또 반대로 이것이 모두 근거 없는 설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쩔 것인가?

▼ 국가-안보관 뒤흔들려 ▼

또 이번사건을 통해 불거져 나온 고문시비와 감청문제도 가볍게 넘겨버릴 사안이 아니다. 검찰은 고문한 사실이 없다고 단언하고 있지만 고문 당했다고 주장하는 피의자들에 대한 국립과학수사본부와 서울대병원의 어정쩡한 신체감정결과는 고문시비를 말끔히 씻어주지 못하고 있다. 감청문제도 도청과 연계돼 뒷맛을 씁쓸하게 하고있다.

한번 심어진 의심의 씨앗은 좀처럼 제거하기 힘들다. 총풍사건이 남긴 것은 정당이나 기관에 대한 불신만이 아니다.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해악은 모두가 정치논쟁에 휘말리고 있는 사이에 우리의 국가관과 안보관이 부지불식간에 부식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함재봉<연세대 교수·정치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