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교육 23/제주 대기高]토론식 수업 수능서 돌풍

  • 입력 1998년 6월 21일 18시 30분


제주 대기고 3학년의 영어수업 분위기는 색다르다. 다른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책상에 앉아 수업을 듣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곳에선 학생들이 일어서서 수업을 한다.

12일 4교시. 영어과목의 김상철(金相喆·38)교사는 학생들에게 낱말 맞추기 크로스퍼즐 문제가 인쇄된 유인물을 나눠주었다.

“오늘 배울 내용은 ‘미국의 대학생’입니다. 먼저 필수단어를 배웁시다. 영어 설명과 같은 뜻을 가진 단어를 생각해 자신있는 사람은 나와서 칠판에 답을 적으면 됩니다.”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영어로 설명이 되어있기 때문에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전을 뒤적이거나 옆친구에게 물어보면서 답을 구하기도 했다. 답을 맞춰야만 자리에 앉을 수 있는데 수업이 끝날 무렵엔 모든 학생이 한번씩 발표를 하고 앉을 수 있었다.

‘업 다운(Up·Down)수업’으로 더 유명한 김교사의 수업은 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시작했다.

김교사는 “스스로 발표할 기회를 갖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다”며 “언뜻 보면 수업분위기가 산만해 보이지만 학습효과는 훨씬 높다”고 말했다.

수업방식은 교사마다 다르다. 지난 4월 교육부의 대통령 업무보고에 평교사로 초대를 받아 화제를 모았던 홍정숙(洪貞淑·34)교사의 지리시간도 눈길을 끈다.

‘국토개발’단원을 배우는 이날 수업에서 1학년 학생들은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신문스크랩을 펴놓고 ‘국토개발과 수도권문제’를 주제로 논술시험을 치렀다. 한 학생은 도시팽창을 빵굽기와 비교한 논리전개로 최고점수를 받았다.

‘빵을 굽다보면 처음에는 좌우로 조금씩 넓어지다가 틀에 다차면 위로 부풀어 오른다. 빵의 모습에서 도시팽창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도시는 처음에 넓게만 퍼지다가 어느 정도되면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고층아파트가 들어선다.’

수학과 신창동(申昌東)교사는 수업시간에 한 문제를 5명이 동시에 풀도록 한다. 서로 다른 풀이법을 보면서 문제해결 능력이 향상된다는 것.

전교생이 1천1백여명에 불과한 평범한 대기고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93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도입되면서부터 였다.

첫 시험에서 평준화지역 고교이면서도 학생들의 평균성적이 유난히 높았고 전국 순위의 수험생을 여러명 배출했기 때문. 93년에는 전국5위, 94년에는 전국3위, 그리고 96년 수능시험에서는 전국 수석이 대기고에서 나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최근 5년간 4년제 대학 진학률은 평균 85%.

이처럼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학생중심의 ‘열린 교육’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교사들은 처음 실시되는 수능시험에 대비, 모의고사 등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암기위주의 주입식 교육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교육방식을 토론식으로 전환했다. 또 무엇이든 학생들이 스스로 탐구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각 학년 30명씩의 성적우수자로 심화반을 편성해 1,2학년은 국영수 과목을, 3학년은 수능시험 전과목에 대해 발표학습―토론학습―문제해결학습을 연결하는 수업모형을 적용했다. 예상보다 효과가 크다는 결론이 나왔다. 95년부터는 이 방식을 전학년으로 확대했다.

그래서 이 학교 교사들은 교단에 서는 일이 별로 없다. 학생 스스로 준비해오고 발표하는 토론식 수업을 하기 때문에 교사들은 보조자일 뿐이다.

대기고의 성공담이 알려지면서 요즘은 교육방법을 배우려는 학교들의 방문이 줄을 잇고 있다. 역사가 짧아 신입생들이 이곳에 배정되면 눈물을 흘릴 만큼 꺼리던 학교였지만 이제는 선망의 대상이 됐다. 대기고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자 학생들의 자부심과 애교심도 깊어졌다. 또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전교생을 수용할 수 있는 도서관 ‘면학당’에는 밤이 깊어도 빈자리가 별로 없다.

물론 이 학교가 공부에만 신경쓰는 것은 아니다. 독서와 다양화 특별활동을 통한 인성교육에도 남다른 열성을 쏟고 있다. 응원 에어로빅 등을 배우는 ‘아마게돈’, 보컬그룹 ‘재규어’, 전통무예 우리말연구회 등 29개 클럽에서 전교생이 활동하고 있다. 재규어는 교장실 바로 밑에 위치한 지하 연습실에서 8월 방학중 공연준비를 위해 맹연습중이다.

김승립(金昇立)교감은 “학생들이 교사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창의성을 발휘하도록 유도한 것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기고 연락처 064―21―5141.

〈이인철기자〉in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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