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 부도사태로 나라가 온통 시끄럽다. 한보의 금융차입금이 5조원을 넘는다 해서 이와 관련한 비리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됐다. 정치권은 이미 국정조사권을 발동하기로 했고 청와대는 「성역없는 수사」를 다짐하고 있다.
5조원이란 5억원에다 동그라미를 4개나 더 붙인 액수다. 수억원대의 비리가 빈발해 돈의 규모에 둔감해졌다고는 하지만 한보가 차입한 천문학적인 대출규모에는 놀랄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이 사태가 가뜩이나 어려운 우리 경제와 시민생활에 미칠 파장에 대해 두려움마저 느끼게 된다.
이런 두려움의 구체적 실체가 이미 가시화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한보그룹 관련기업과 협력업체들의 경영활동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은행들은 일반기업에 대한 여신의 고삐를 죄고 있어 기업자금에도 비상이 걸렸다. 사채시장 역시 마비됐고 우리 기업의 외국은행 차입금 이자율도 날로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 당분간 계속된다면 우리 경제의 앞날은 실로암담해질 것으로 우려된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치권 정부 기업 어디에서도 속시원한 대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정부는 오히려 불법대출에 직접 간여한 바 없고 압력을 행사하지도 않았다고 주장, 책임과 처리방안을 금융권과 사법부에 맡기고 싶어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미 국가 경제의 안위를 좌우할 정도로 심각한 과제가 돼버렸다. 결국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정부다. 이 시점에서 정부가 서둘러야 할 일은 우리 경제를 병들게 한 책임을 밝히는 것보다 일단 죽지 않도록 살리는 일이다.
지금은 과거지향적 규명에 몰두하기보다 이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할 미래지향적 해법마련에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책임소재 규명과 비리척결의 차원에서만 접근해서는 안된다. 시간을 두고 철저히 조사해도 되기 때문이다. 우선 정부는 모든 정치력과 행정력을 동원해 한보 정상화의 주체를 조속히 결정하고 이를 수습해나갈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한보사태로 우리 경제가 뿌리째 곪아 회생불능 상태로 악화되는 것을 막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정 헌 배<중앙대 교수·경영학>